2019.5.19. 주일 설교. 마가복음 강해 23: 적대와 환대 사이에서(막5:1~20). 양은익 목사

 

 

마가복음 23: 적대와 환대 사이에서(막5:1~20)

1.
그 동안 중단되었던 마가복음의 말씀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적대와 환대 사이’라는 제목으로 5장 앞부분 말씀 보면서 주님의 뜻과 마음을 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사건의 개요는 간단합니다. 갈릴리 지역에서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넘어 오신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 사람을 온전케 하심으로 이방 지역 전도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된다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5:1절에 보면 가신 지역이 ‘거라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라사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신도시입니다.

로마는 자신들의 식민지 통치를 위해서 갈릴리 바다 남동쪽 지역에 10개의 신도시(데가볼리, Deca+polis)를 세우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거라시입니다. 거라사에 대한기록이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라고 하는 중요한 책에 기록되 있는데 한 대목 읽어 드리겠습니다.

‘베스파시안은 기병대와 많은 보병과 함께 루키우스 안니우스를 거라사 지방에 보냈다. 안니우스는 마을을 공습한 후에 미처 피하지 못한 천 여명의 청년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가족들을 포로로 잡고 또한 군사들로 하여금 재물을 약탈케 했다. 마침내 그는 주거지를 불사르고 주변 마을로 행군해 나갔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도망갔지만, 노약자들은 비명에 갔으며 모든 것이 불길에 휩싸여 사라졌다’

어제가 5.18 이었는데, 거라사 지역 사람들에게도 5.18 같은 비극적이고, 아픈 역사가 계속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장에 보면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나오는데 우리는 이 사람이 무슨 연유로 귀신에 사로 잡혀 돌로 자해하며 들로 산으로 다니면서 고함를 지르는 불행한 삶을 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병든 사회는 언제나 병든 사람을 만들어 내는 법, 그 당시도 이런 저런 이유로 狂人된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광인은 언제나 악한 영의 좋은 먹잇감인데, 성령이 있는 것처럼, 악한 영도 있어서 악한 영은 억울하고, 힘든 영혼들의 인격을 파괴시켜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도 쉽지 않은 삶을 살다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돼지’가 계속 나오는데 오늘 사건에서 중요한 암시를 주고 있는 단어입니다. 돼지는 게걸스러운 욕망의 상징인데, 거라사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단의 휘장이 돼지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라사 지역의 사람들은 돼지같은 로마군에 의해서 정신이 나갈 정도의 고통을 겪게됩니다. 하지만 이 돼지들이 어떻게 됩니까? 9절에 보면 주님께서 귀신의 정체를 밝혀 냅니다. 이름을 물으니까 뭐라고 답합니까? ‘내 이름은 군대다’. 6000명을 거느린 군단이라는 말인데, 이 귀신들이 어떻게 됩니까? 2000 마리의 돼지떼에 들어가 – 마치 출애굽 할 때 모세를 추격하던 바로의 군대가 홍해에 – 수장되는 것처럼 몰살하게 되고, 더러운 귀신에 의해 고생하던 사람이 온전하게 됩니다. 이런 걸 보게 되면 본문에 나오는 광인은 단순한 광인이 아니라 불행한 사회의 희생양으로 아픔을 겪고 있는 대단히 안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이러한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다.

2.
2절부터 5절에 보면 무덤가에 사는 이 사람의 모습이 나오는데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의 혼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덤 사이를 뛰어 다니면서 돌로 자해하고 있구요, 악을 쓰면서 다니고 있습니다. 지금의 광인들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가장 불쌍한 모습이 7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역시 고함을 지르면서 말합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간단히 넘기면 안되는 말이 나옵니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이 없다는 것이고, 상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관은 관계이고, 관계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게 사람인데, 악한 영에 지배된 이 사람은 관계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이 말이 두번 나옵니다. 1:24절에 한번 나오고, 여기 7절에 나오는데, 두 번 다 이 말을 누가 하고 있습니까?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무슨 얘긴지 아시겠습니까?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게 되면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상관하지 말라’고 하는, 적대감에 사로 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뭘하든, 무덤에 살든, 고함치며 살든 신경끄고, 못본척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이 좋으세요? 좋아하지 마세요. 대단히 불행하고, 해서는 안되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악한 영의 지배를 받으면서 서슴없이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3.
우리도 이 소리를 자주 듣고, 자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알아서 할 것니까 상관하지 마세요. 아는 척 하지 마세요. 어디서 듣고 있습니까? 부모는 자식들에게서 듣고, 아내는 남편에게서 듣고, 목사는 교인들에게 듣고, 교사들은 학생들 한테 듣고. 안 듣는데가 없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말 같지만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단단히 병든 모습입니다. 상관하지 말라는 말은 두 번 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하고 있습니다. ‘상관하지마. 간섭하지마. 못본척 해’라는 말은 성령의 언어가 아니고, 악한 영에게서 나온 악한 영의 언어입니다. 가볍게 보면 안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강준만 교수의 [한국인 코드]라는 책에 보면 6.25 전쟁이라는 아픈 현실을 겪으면서 가지게 된 한국인의 심성,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전쟁의 비극을 겪으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됐을까요? 예, 상관하지마. 바로 이 마음입니다. 6.25 전쟁이 우리에게 남겨준 치명적인 심성이라는 것입니다. 다 굶고, 다 죽어가고, 다 힘든데 상관하게되고, 아는 척하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알면서도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만 이런 6.25의 심성이 전쟁이 끝났는데도 트라우마로 남아서 한국인들의 마음 한 곁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게 되고, 필요 이상으로 적대적이 되 버린 겁니다.

처음에는 상관하지 않는게 서로에게 편합니다. 근데 사람 마음 묘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상관하지 않고, 못본척하는 게 그렇게 미울 수 없게 됩니다. 그 순간 부터 미움 가득한 적이 되버리는 겁니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없습니다. 상관하지 않게 되면 결국 적대적이 되고, 그런 사회와 개인은 병들 수 밖에 없습니다. 적대감이 뭡니까? 적으로 여기는 마음인데, 적으로 여기는데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고, 무슨 사랑이 나오고, 무슨 기쁨이 나오겠습니까? 적은 짓밟는 존재지, 세워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한번 살펴 보시겠습니까? 세워주는 일이 많은지, 짓밟는 일이 많은지! 짓밟는 일이 많으면 인정해야 됩니다. 더러운 영이 지배하고 있구나.

4.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대가 아니라 환대입니다. 타락 이후 사람은 독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독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독을 품어냅니다. 막아내지 않으면 독에 독이 더해 더 독한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상관하지 않는 게 대세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는게 능사가 아닙니다. 상관할 때는 예수님 처럼 상관해야 되고, 적대적인 마음과 감정을 깨버려야 합니다.

본문 보십시오. 나와 당신은 상관없으니 상관하지 말라고 강변하지만 주님은 물러서지 않고 상관하십니다. 그 사림을 힘들게하는 악한 영과 대적하여 물리치십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독을 품고 있는 이 땅에 해독제로 오셨듯이, 마음 한 가득 독을 품고 ‘상관하지 말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관심으로, 기도로, 능력으로 다가가 그 독한 독을 해독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독 빼낼 생각은 하지 않고 나만 편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돼지 같은 욕망에 사로 잡혀 있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선관 시인의 ‘없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번개 시장에는 번개가 없고,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국화빵에는 국화가 없고, 정치판에는 정치가 없네’

그러면 교회에는 뭐가 없습니까? 신앙인들에게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붕어빵에 붕어가 없으면서도 붕어라고하면 가짜이듯이, 있어야 할 것이 없는데도 교회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가짜 일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라면 예수님의 정신이 있어야 하고, 예수님의 거룩한 영이 있어서, 그 정신과 거룩함으로 독 가득 품고 상관하지 말라고 고함치는 이들을 품어내는 사랑과 환대가 있어야 합니다.

5.
17절은 같은 일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됩니다. 17절 보십시오. 귀신들이 돼지떼에 들어가서 몰살한 후에 사람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이 사람이 계속 있다가는 돼지 한 마리 값이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손해 볼 것 같거든요. 그러니 상관하지 말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너무 단편적입니다.

그토록 자신들을 괴롭혔던 사람이 정신 차린 모습을 보면 놀라야 하고, 그런 일을 이루신 분을 환영하는 게 맞는데 ‘돈’이 들어가고, 손해가 들어가니까 불편해 지기 시작한 겁니다. 여기 있지 말고 ‘가십시오’ 우리의 모습이 안되기를 바랄뿐입니다.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상관하신 결과가 나옵니다. 그 사람의 독을 뺀 결과, 환대한 결과입니다.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았다’ 누구도 제어할 수 없었던 Untouchable Man인데 옷 얌전히 입고, 제 정신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고, 생명의 변화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변합니까? 적대자에서 환대자로 변합니다. 20절 보십시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무덤에 홀로 살면서 세상과 사람에게 대적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자신과 같았던 그들의 삶을 적대하지 않고 환대하면서 그리스도의 능력과 생명을 전하는 최초의 이방인 선교사가 됩니다.

6.
로마서 15:7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은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개역개정). ESV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Welcome one another, as Christ has welcomed you.그리스도가 여러분을 환영하셨듯이 서로를 환영하십시오.

적대감이 넘쳐 나는 시대에 바울이 성도들에게 한 귀한 당부입니다. ‘서로를 환영하십시오. 환대하십시오’ 이래야 되는 이유가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먼저 받은 ‘선행의 환대’가 있기에 ‘환영하라. 환대하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대는 그리스도인에게 단순한 윤리가 아니라 신앙 자체입니다. 이 환대의 신앙이 그리스도를 알게 만드는 출발이고, 힘입니다. 신앙은 환대 속에서 꽃피고 적대 속에서 죽습니다. 독이 넘쳐 나는 세상에서 환대는 입에 발린 낭만적이기만한 단어가 아닙니다. 우리 중에 환대가 쉬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환대는 용서와 같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참된 용서인데, 환대도 환대하기 힘든 것을 환대하는 것이 진정한 환대이기 때문에 쉬울 수가 없습니다. 환대 속에는 포기와 참음과 자기 낮춤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환대가 위대한 거고, 힘이 있는 겁니다.

말씀 맺겠습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혀 상관하지 말것을 외치는 세상의 모습을 봤습니다. 이런 세상에 지지도 말고, 넘어 가지도 마십시다. 적대와 환대의 갈림길에 늘 서게 될텐데 그때마다 환대와 환영쪽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치유와 회복이 두 팔 벌려 환하게 맞아 줄 겁니다. 주보에 나오는 환영의 기도 읽고 마치겠습니다.

환영의 기도

마음 흔들리고 아플 때마다
모든 것을 환영한다고 고백하는
이 환영의 기도를 조용히 드려 보십시오.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이 순간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이
나의 치유를 위한 것임을 알기에 나는 환영합니다.
모든 생각, 느낌, 감정, 사람, 상황, 조건을 환영합니다.

매 순간 이 환영의 기도가
살아난다면 삶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환영 기도하는 우리를
하나님은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삶의 현실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 모든 것을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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