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24. 주일 설교. 마가복음 강해 21: 작은 씨가 할 일(막4:30~32). 양은익 목사.

 

 

말씀: 작은 씨가 할 일 (막4:30~32)

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4:30~32)

1.
마가복음 21번째 시간입니다. 겨자씨 비유로 오늘도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세밀한 음성을 들으시고 큰 은혜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겨자씨 비유의 주석과 같은 귀한 시 한 편을 발견하게 되어 잠깐 소개해 드립니다. 박서림 시인의 ‘큰 것을 작게 보고’라는 시입니다. 시인은 큰 것.을 작게 보고 작은 것을 크게 보겠다고 결심합니다.

큰 것을 작게 보고 작은 것을 크게 본다. 해와 달을 어루만지다가 마침내 겨자씨 안에 가둔다. 바이러스가 매머드를 쓰러뜨리고 마침내 지구를 먹어 버린다. 크다는 일 작게 보고 작은 일 크게 본다. 크다는 인물을 작게 보고 작은 인물을 크게 본다.

이 시는 이 사회의 민감한 문제인 크다 작다는 문제, 힘이 있다 와 힘이 없다는 문제, 강하다는 것과 약하다는 문제를 반복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시고자 했던 바로 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는 겨자씨 비유의 주석과 같은 시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들로 인해 아파하고 힘들어하며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살아갑니다. 크다 작다 비교하면서 상처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 소득 문제, 복지 문제 등의 수많은 문제들입니다.

작은 것들은 끊임없이 큰 것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싸움을 겁니다. 큰 것들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것을 바라보며 전쟁하면서 삽니다. 작은 이들은 작은 이들끼리 싸우며, 또 큰 것들과도 싸웁니다. 그러니 싸움은 늘 그침이 없고 전쟁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피가 있습니다. 피는 철철 흘러넘칩니다. 여기저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상처들이 난무합니다. 시인은 이런 세태에 도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모두 큰 것을 크게 보고 작은 것을 작게 보지만, 나는 ‘큰 것을 작게 보고, 작은 것을 크게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2.
주님께서 겨자씨 비유에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겨자씨 비유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그저 일게 작은 겨자씨가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해졌다고 단순하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겨자씨 비유는 상당히 깊습니다. 우리의 삶의 아픔을 치고 들어 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4장에서 주님은 씨뿌리는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기 위해 모여든 우리에게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예상과 기대에 갇혀 있지 않은 나라라고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기 위해 모여든 이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사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고달프고 힘들고 비참하게 만드는 크고 작음의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 나라의 일이지 하나님 나라에서는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겨자씨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계시며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내가 주도권을 갖고 내가 주인이 되어 사는 나라는 세상 나라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진 나라이기에 사람들의 예상과 기대를 깨는 나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대에 갇혀 삽니다. 그리고 기대대로 되지 않을 때 힘들어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초라한 작은 씨에 생명이 있어 자라게 되면 새까지 깃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하신 이유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던 문제가 바로 작음의 문제, 약함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로마 식민지 밑에서 이스라엘 사람들 얼마나 고통을 겪습니까? 당할 때마다 작디작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울분을 토할 수밖에 없던 사람들인데, 그런 이들에게 작은 것을 통해서 결실하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모습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없으면 죽고, 강하면 사는 그런 인간의 예상과 인간의 기대 속에 갇혀있는 나라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작다고 무시하지 말고, 작다고 무너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가 신빙성이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보잘것없는 겨자씨였습니다.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작은 시골 마을 출신 나사렛의 목수가 스팩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토록 작은 이가 작게 시작한 섬김과 사랑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세상을 삼키는 물결로 등장해 거대한 로마제국을 무너트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거대한 악의 체제 앞에서 좌절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대신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씨, 하나님 나라를 심었고, 이 씨가 결국은 제국 전역으로 퍼지게 됐던 것입니다. 잘 봐야 하는 모습입니다.

3.
작고 약한 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말 들어 보셨습니까? ‘싸그리 망해 버려라’ 얼마나 위험한 말입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특별히 청년들의 마음속에 이런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자부심을 느끼면서 살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은 겁니다. 자신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부심으로 살면 되는데 작은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지를 모르니 분노와 억울함과 원망이 마음 한 곳에 꽉 차 있는 겁니다.

작은 이들의 소원이 뭔가요? 나도 커서 누리면서 살고 싶다. 아니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아닌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큰 자든, 작은 자든 길을 잘못 든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크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배타적인 우월감 속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합니다. 힘 있고 잘났으면 그 잘남을 다른 이들을 위해 사용할 줄 아는 자리까지 가야 하는데 잘남을 즐기기만 하는 이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게 얼마나 못난 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힘없는 이들은 어떻습니까? 힘없는 이들은 자기만 아는 강자들에게 당한 게 억울해서라도 대박 한번 터져서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것을 누려봐야겠다는 심리로 가득 차 있는데, 이것도 못난 겁니다. 큰 자든, 작은 자들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게 인간 나라, 인간이 주도하는 세상 나라의 모습입니다.

4.
여러분은 큰 사람입니까? 작은 사람입니까? 잘난 사람입니까? 못난 사람입니까? 큰 소리로 말하기 힘든 문제이지만 이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면 현실에서 가지는 나의 지위와 조건에 대해서 언제나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큰 자도 사랑하시고, 작은 자도 사랑하십니다. 큰 자도 작은 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힘을 얻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의 조건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에게 존귀하고, 특별한 존재입니다. 큰 자에게 맡기신 역할이 있고, 작은 자에게 주신 역할도 있습니다.

각자 주신 배역에 맡게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감사하며 살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에게는 크다 작다는 판단이 의미가 없습니다. 크면 얼마나 크고 작으면 얼마나 작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병이어면 충분하고, 소년의 손에 들려진 물맷돌 하나로 역사를 바꾸어 놓으십니다. 여리고 성이 아무리 크고, 거대한 제국 바로가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추풍낙엽 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넉넉한 지위와 운명 속에 있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약해도 넉넉할 수 있고, 약한 우리 안에 하나님의 강함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어떤 현실도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는 믿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가져야 합니다. 억울한 마음으로 살면 안 됩니다.

정호승 시인이 아침에 방문 틈으로 흘러들어온 햇살에 비친 먼지를 보고 쓴 기도, 한 대목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른 아침에, 먼지를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먼지가 된 나를 하루종일 찬란하게 비춰주셔서 감사합니다’.(햇살에게, 정호승)

먼지를 보면서 먼지 같은 하찮은 자신을 발견한 것도 놀라운데, 그런 먼지 된 자신을 찬란하게 비춰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한 것은 더 대단합니다. 값진 깨우침입니다. 여러분들도, 작은 나를 끊임없이 비춰주시는 하나님 바라보면서 작다고 실망하고, 작다고 무시하는 버릇, 성향이 있다면 지워 버리시기 바랍니다. 실망과 무시는 작을 때 이 세상이 주는 몹시 나쁜 감정의 주입입니다.

5.
작을수록 작다는 조건과 현실에 묻히면 안 됩니다. 묻히지 않을 때 예상을 깨는 반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 보십시오. 정말 작은 자들입니다. 어떤 누구도 약점 많은 이들을 통해서 복음이 이토록 풍성하게 전해질지 누가 상상이나 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겨자씨 같은 그들을 통해 엄청난 일을 이루셨습니다.

고전 3:6~7 말씀은 맞는 말씀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새번역)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작은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문제로 만들지 마십시다. 교회 건, 사회 건 작은 것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데 그럴수록 약함과 작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작아도 넉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씨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음 안에 큰 믿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이 믿음 뿌리고 뿌리셔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인생의 자리에서 결실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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