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3.3. 주일 설교. 마가복음 강해22: 흔들리지 않으리(막4:35~41). 양은익 목사

 

말씀: 흔들리지 않으리 (막4:35~41)

1.
3월 첫 주일 아침입니다. 우리 주님의 은총과 평안이 우리 교우들 모두, 사랑하는 가족들, 하시는 일 가운데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봄의 소리가 계속 들려 오겠지요! 봄의 소리가 뭔지 아세요! 예, 제가 하나하나 불러 보겠습니다. 살아라. 자라라. 꽃피라. 희망하라. 사랑하라. 이게 다 봄의 소리인데, 생명의 소리입니다. 이 귀한 봄의 소리가 크게 들리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신 마가복음의 말씀도 이 봄의 마음으로 받기를 바라겠습니다.

이 봄의 아침에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주시는 마음은 다른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 흔들리지 마세요’. 흔들리기 잘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기대고, 주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아침 이 마음이 크게 다짐 되면 좋겠습니다.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흔들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흔들리지 않고 사는 게 흔들리면서 사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다 흔들려 보셨겠지만 흔들리게 되면 이래저래 힘들 수 밖에 없잖아요. 흔드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이 흔들고, 상황이 흔들고, 건강이 흔들고, 돈이 흔들고, 자존심으로 흔들리고. 그래서 더 물어봐야 합니다. 그런데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능할까요!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도전하시는 문제가 바로 이 문제인데, 함께 보면서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
오늘 본문 보셔서 알겠지만, 전체 그림이 어떤가요? 안정돼 있지 않지요. 전체가 다 흔들리고 있지요. 딱 한 분 예수님만 빼고. 보세요. 바람, 크게 불고 있습니다. 광풍입니다. 바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동치고 있습니다. 배는 말할 것도 없구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 전부 흔들리고 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오늘 본문은 ‘흔들리는 이’와 ‘흔들리지 않는 이’가 선명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흔들리는 제자들은 불안하고, 흔들리지 않는 주님은 평안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쪽에 있으세요. 불안 쪽입니까? 아니면 평안 쪽 이십니까?

사람은 흔들리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수없이 올라옵니다. 신앙인들은 이게 더 많아집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러시는 건가? 이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올라옵니다. 38절 한번 보시겠어요. 제자들이 주님을 깨우면서 한 말이 나오지요.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도대체 잠만 자면서 가만있는 이유가 뭡니까?’ 낯설지 않은 장면이지요!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흔들릴 때 많이 하는 푸념입니다. ‘사랑하신다면서 왜 돌봐주지 않는 겁니까? 힘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막아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마치 이러한 반발이 정당한 것처럼 따지고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미안해하셔야 됩니다. ‘아! 내가 잠깐 한눈팔았다. 미안하다’. 이르서야 하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삐딱선을 타셨는지 사근사근하지 않으십니다. 섭섭한 마음에 푸념을 하는 제자들에게 보십시오. 오히려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계십니다. 흔들리던 상황, 간단한 게 정리한 후에 한마디 하십니다. 40절입니다. ‘너희들은 왜 그렇게 무서워하기만 하고, 믿음이 없느냐?’ 다독거리지 않고 꾸짖고 계십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와서, ‘목사님, 정말 힘듭니다. 죽을 정도로 힘든데 어떤 응답도 하나님은 주시지 않네요’ 하는데, 제가 위로는커녕 ‘집사님은 왜 그렇게 믿음이 없으세요. 믿음을 가지세요. 믿음을’ 이런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제자들이라고 다르지 않았을 것 같은데…근데도 주님은 에둘러 말하지 않고 그들의 믿음을 치고 들어 오시지요.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그렇게 흔들리지 않았을 텐데 그걸 모르고 있었다’라는 겁니다. 제자들의 밑천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38절에 보면 주님을 부르는 호칭이 나옵니다. 뭐라고 부릅니까? ‘선생님’.(didaskalos, 가르치는 사람) 그들에게 주님은 선생님 정도, 랍지 정도의 분밖에 안 되고 있습니다. 큐리오스, 주님이 아니라 선생님입니다. 아직 주님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들과 함께 하는 주님은 선생님이 아니라 바람을 꾸짖고, 바다에 명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시편 107편에 보면 하나님을 바다를 다스리는 분으로 노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23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24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25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27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28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9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30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107:23~30)

무슨 얘기입니까?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권위는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인데, 제자들은 그런 권세를 가지신 분이 자신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주님은 지금 그 사실을 가르쳐 주고 계신 겁니다.

3.
물론 우리 가운데 누구도 흔들리는 제자들을 한심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누군들 그런 상황에서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설교 몇 번 듣고, 교회 몇 번 나간다고 쑥쑥 자란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뿌리 깊은 불신이라는 죄성이 박혀 있어서 쉽게 믿지를 않습니다. 포세이돈 어드벤쳐라고 하는 오래된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배가 침몰하는 매우 급한 상황에 탈출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방해나 하지 마십시오’

이 지경까지 만들 하나님께 울분을 토하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언제 필요할 때 도와주는 것 봤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안에 가득합니다. 제자들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40절은 이런 제자들, 이런 우리를 향한 주님의 도전입니다. ‘왜 가만있느냐’는 반발에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흔들릴 때마다 주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주님 자신에 대한 믿음, 주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잔잔케 하는 그런 존재로서의 주님을 알고, 믿게 되면 두려워할 이유도, 흔들릴 이유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41절에 보면 제자들이 풍랑이 멈춘 후에 더 두려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살 수 있게 됐는데 두려워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렇게 큰 풍랑을 제압한 분 앞에 서 있는데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제자들이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쉽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물론 사람은 알아도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앎이 점점 깊어지고, 확실해진다면 흔들림은 현격히 줄어 들것이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쪽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사실은 그렇게 깊어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신앙조차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 정도밖에 안 되는 시대입니다. 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격이 있게 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4.
이 장면을 어떻게 보는 가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이 장면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겁니다. 믿든지 아니면 웃던지. 웃는 분들도 많습니다. 기독교도 별수 없구나. 이런 허무맹랑한 사건이 일어났고, 그것을 이런 과학의 시대에 믿으라고 하다니. 믿음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에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폐쇄된 자연과학적인 법칙에만 매달려 있는 이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 사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리석어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면 정말 어리석은 겁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과 하나님 있는 세상. 어떤 세상이 좋은지, 어떤 세상이 맞는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저는 하나님 없는 닫힌 세상 세상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인격이 없는 법칙의 세계입니다. 법칙의 세계는 냉정한 세계입니다. 원인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결과를 감수해야 합니다. 동정이 통하지 않습니다. 기회가 없습니다. 저는 이런 세상 싫습니다.

하지만 인격자이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용서를 구할 수도 있고, 애원할 수도 있습니다. 기회를 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쳐 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기도 아닙니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감사인지 모릅니다. 살다 보면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있는데, 그런 순간에 기도할 대상이 없다는 것처럼 비참한 것은 없는데 그래도 좋다면 할 수 없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세상과 우리를 존재케 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신실함과 선하심으로 이끄신다고 하는 믿음과 인정입니다. 그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이 다스림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 급기야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위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는데,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분이 우리를 버리시겠습니까?

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읽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며, 풍랑 가운데서도 함께 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얼마나 벅찬 삶이고, 사실입니까? 거친 풍랑,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흔들림 많은 세상 한복판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흔들리지 않는 삶이 가능한가?

다른 이들은 몰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이끄심을 소망하고 믿는 이들은 ‘예’라고 하는 답이 나와야 할 것이며, 그쪽으로 가야 합니다. 오늘 아침,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하는 결의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히12:2) 여러분들의 가슴에 더 깊고 크게 새겨지기를 바랍니다.(정리: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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