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8. 주일 설교. 성품론 4: 사랑(갈5:22~23. 요일 4:7~11). 양은익 목사.

 

 

 

말씀. 성품론4: 사랑(갈5:22~23. 요일4:7~11)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7-11)

3주에 걸쳐서 우리는 왜 성품이 요구되는지 살펴봤었습니다. 오늘부터는 개별적인 성품에 대한 말씀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많은 깨달음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단어를 반복해서 계속 듣다가 보면 실제로는 그 깊은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실제로 잘 알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살펴볼 성품 첫 번째인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깊은 깨달음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삶의 전환점이 되시며, 삶의 변곡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절제, 온유, 충성은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양선, 자비, 오래 참음은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화평, 희락,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성령의 열매인 사랑입니다. 이 땅에 사는 그 엄청난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나 자주 이 사랑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사랑이란 단어는 어마어마하게 언급되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 마음에는 사랑에 대한 본성적인 갈망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이야기한 것 중 첫째가 사랑입니다. 왜 사랑을 첫 번째로 언급했을까요? 그만큼 중요하고, 그 뒤 따라오는 여덟 가지 열매를 뒷받침해 주는 가장 중요하고 기초가 되는 성품이기 때문에 첫 번째 일 것입니다.

몇 년 전 ‘곡성’ 이란 영화가 상영됐는데, 주인공 경찰관의 딸 효진이가 말한 대사가 유명합니다. 딸이 이상한 증세를 보이자 아빠가 딸에게 ‘너 누구를 만났니?’ 추궁합니다. 그때 효진이는 아빠를 향해 거의 악을 쓰면서 말합니다. ‘뭣이 중한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중한지도 모름서!’ 바로 이 대사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접하면서 우리도 이 질문을 던져봅니다. ‘삶에서 정말 무엇이 중요하십니까?’ 어느 정도 삶을 살아 본 우리는 삶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알게 됩니다. 삶의 한계를 알게 됩니다. ‘뭣이 중한디?’ 이 질문에 어떤 답을 갖고 계십니까? 우리는 중요하다고 우선순위를 두는 것을 위해 살아갑니다. 거의 다 비슷합니다. 사는데 이것이 없으면 불편하고 절실하니까 그것을 위해 매여서 삽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 앞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극명하게 갈렸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의 답이 ‘사랑’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라는 성품의 가치가 더 깊고 무겁게, 책임감 있게 우리의 삶에 깊이 자리 잡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가치는 정말로 평가절하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의 가치는 속히 회복되어야만 합니다.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습니까? 가진 게 없는 가난한 여인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사랑하는 이의 선물을 사줍니다. 갓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주는 엄마의 희생. 얼마나 귀한 사랑입니까! 사랑은 이렇게 귀하고 위대하기에 포기되어서는 안 되는 삶의 가치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생로병사 희로애락, 탄생부터 죽을 때까지 인생의 모든 기쁨과 슬픔 가운데 함께 하면서 우리를 견디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세상에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고, 사랑으로 가득 차 게 해야 하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거부하거나 포기해 버리면, 그 순간부터 삶은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거친 광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은 천국이라고 했고, 사랑이 없는 곳을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지옥 같은 삶을 살려고 작심한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한, 안타깝게도 사랑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갑니다. 얼마나 살면서 많이 속고 당했는지 사랑을 포기합니다. 사랑은 젊은 시절 잠깐 하는 불장난이 아닙니다. 사는 것이 힘들어도 사랑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1974년 가수 이장희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주옥같은 사랑의 노래를 우리에게 줬습니다.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오늘 밤 문득 드릴 말 있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 할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나 그대에게 드릴 것 있네. 오늘 밤 문득 드릴 게 있네’

이런 사랑은 다 어디에 간 것입니까? 우리는 사랑을 해도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은 고고하게 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정의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사랑은 언제나 상대방에게 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나와 너를 묶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에게 묶여서 함께 참고, 견디며, 온유하며, 좋든 싫든 함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사랑입니다. 힘들지 않은 사랑은 없습니다. 묶이면 힘듭니다. 사랑은 고백도 아니고 자기만족도 아닙니다. 나와 너는 정말 다릅니다. 자식들도 정말 나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묶여 있기에 끝까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사랑을 얘기하면서 정말 많이 얘기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이 묶임의 상황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눈뜨지 않으면 도무지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4:9)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와 주님을 함께 묶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함께 묶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사랑의 실체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에 눈뜨게 될 때, 우리는 사랑 할 수 있는 자로서 나갈 것입니다. 이 묶임의 사랑의 실체를 알게 된 바울은 그 유명한 고백을 쏟아냅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6-39)

우리는 그리스도와 묶인 자가 되었기에 그 어떤 것도 이 묶음을 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극치를 더 깊이 느끼시고 더 깊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들어도 하나님 원망하고 하나님 사랑은 생각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와 묶으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그 귀한 아들을 화목제물로, 십자가 죽음으로 바치는 인생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위함입니다.

아브라함도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제물로 삼고자 함은 실로 굉장한 일입니다.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우리와 묶이신 것입니다. 도무지 풀려고 해도 풀 수 없는 사랑으로 묶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드디어 사랑하는 자로 서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엄청난 신적 사랑을 받고 묶여 있으니 우리도 서로 묶여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떨어지지 말자는 것입니다. 삼겹줄처럼 서로 묶여 슬픔 많은 세상, 서로 간에 실수 많이 하면서 살아가는 이 세상 묶여서 더 사랑하며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내 안에 이 사랑의 마음이 조금씩 커져가야 합니다. 이럴 때 나머지 성령의 열매들도 줄줄이 열매 맺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면 마음에 기쁨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평화가 생깁니다. 나 자신에게 또한 나와 하나님 사이의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없는 삶은 지옥입니다.

사랑에는 쉬운 사랑(easy love), 어려운 사랑(hard love)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어려운 사랑입니다. 어떤 게 어려운 사랑입니까? 요즘은 다 어려운 사랑인 것 같습니다. 세상이 사랑과 멀어지다 보니까 만만한 사랑은 하나도 안 보입니다. 아주대 응급 외상 센터에서 일하는 이국종 교수가 토로하는 장면 봤습니다. 사람 살리려고 헬기 타고 날아가면 시끄럽다고 내리지 못하게 하고, 김밥에 먼지 들어간다고 민원 넣는 사람들로 이 나라는 차고 넘친다고 합니다.

사랑하기 정말 힘듭니다. 이런 곳에서 성품을 키워내야 하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힘든 싸움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에 묶여 있는 은혜를 받았기에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고, 이 땅을 살았던 수많은 성도들이 간 길입니다. 이 대열에 저와 여러분들도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할 능력과 시간이 있을 때 더 깊게, 더 많이 사랑합시다.

사랑은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성품이고, 삶이고, 인생입니다. 다른 것은 부족할지라도 사랑에서만은 부족함이 없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복하고 축원 드립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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