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마가복음 9. 우리도 따르게 하소서(막1:32~39)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막1:32-39)
오늘은 ‘우리도 따르게 하소서’라는 제목으로 마가복음 9번째 말씀을 보겠습니다. 다음 주까지 ‘우리도’라는 제목의 형태로 계속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우리도 꾸짖어 주소서’, ‘우리도 일으켜 주소서’, ‘우리도 따르게 하소서’, ‘우리도 깨끗게 하소서’. 다음 주의 말씀 ‘우리도 깨끗게 하소서’로 1장을 마칠 것입니다. 이 네 가지 모두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들이 다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신앙인의 삶을 살 때 중요한 두 가지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모방과 실천입니다. 모방은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그대로 따르고자 하는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실천은 마음으로 본받은 것을 행동으로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방하고 실천하는 애씀의 과정을 통해 신앙은 성장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는 이유도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그대로 본받고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아, 이때 주님은 이렇게 하셨구나’하는 것입니다. 본받고자 애쓰는 굉장한 노력과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의 감정까지, 마음마저 모두 읽어내고 잡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삶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방하고 실천하며 점점 더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모방과 실천!
그리스도인으로 살지만, 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능으로 저절로 되는 삶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모방하고 실천해야 가능합니다. 모방과 실천으로 주님이 사셨던 삶이 제2의 천성이 되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연습하고 모방하고 실천하고 애쓰는 노력을 해야만 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사랑과 관용과 이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저절로 어느 날 갑자기 거룩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만만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하루하루를 인내하며 주님을 모방하고 실천할 때 우리 성도들의 삶은 거룩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도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하는 간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모방하고 따라야 할 주님의 모습 세 가지를(공감, 기도, 사명) 살펴볼 것입니다. 많은 도전 받으시고 여러분들의 것으로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1. 공감(共感)
첫 번째 따라 해야 할 주님의 마음은 공감입니다. 공감은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나와 네가 다름에도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아파하고 서로를 받아주고 사랑해 줄 힘은 공감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공감의 능력이 클수록 더 놀라운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공감이 있으면 놀라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놀라울 정도로 공감하는 마음을 갖고 계셨습니다. 자기 일이 아닌데 마치 자기 일인 양 놀라운 모습으로 겪어 내십니다. 그 공감의 마음으로 많은 일을 이루어 내십니다. 참으로 따뜻한 모습입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32절) 늘 병자를 고치고 치유하셨으니 이 구절도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지나치지 마십시오. 주님은 공생애 처음 회당에서 사역하신 후 지금 그날 시몬의 집에 와 계십니다. 아픈 시몬의 장모를 만지시고, 그 장모를 일으켜 세우셨음을 지난주 봤습니다. 바로 그날입니다.
해지는 시간 많은 무리가 웅성웅성 바쁘게 시몬의 집 쪽으로 몰려옵니다.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십시오. 한결같이 병들고 아픈 이들 입니다. 귀신들린 자들은 얌전하지 않습니다. 갈릴리 일대에 그날 예수님의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그 몇 시간의 소문으로 이들이 시몬의 집 앞으로 몰려드는 것입니다. 해 질 녘에 모여든 이유는 유대 법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해가 진 후에야 병자를 고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모여들었을까요? 많다를 두 번이나 연속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 혼자서 치유하고 감당하기에는 벅찬 수의 환자들이 몰려온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 앞에 고름 냄새 피우는 아픈 이들, 귀신들려 소리쳐 대는 병자들이 계속 몰려든다면 여러분들은 환영하시겠습니까?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주님의 치유 방법이 병자를 몇 그룹으로 나눠서 대표 기도식으로 ‘낫거라!’, ’귀신아 나갈지어다!’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마치 그 사람 혼자 있는 것처럼, 시몬의 장모에게 손을 내밀고 신적 영광으로 일으켜 세우신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임재하는 영으로 치료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병자 한명 한명, 귀신들린 자 한명 한명을 그렇게 치유하시니 시간은 어느덧 밤이 깊어져 자정이 가깝고 육신을 입으신 주님의 체력도 많이 지치셨을 것입니다.
이런 일은 진액이 빠질 정도로 힘이 듭니다. 혼신의 기도를 하면 1시간 기도로도 상당한 체력이 소모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자신의 영을 쏟아내셨으니 얼마나 힘들고 지치신 밤이었겠습니까? 주님은 과시로 내가 신의 아들이라시며 이 일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보고 마음이 아프고 측은하여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바로 공감입니다. 남의 일인데 마치 내일인 것처럼 같이 아픈 것입니다. 그들이 속상한 것처럼 나도 같이 속상한 것입니다.
시몬의 집 앞에서 치유하는 사역이 일어난 것입니다. 공감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때 치유받은 환자와 그 가족들이 얼마나 좋았을지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굉장한 기쁨이 넘쳐났을 것입니다. 그 깜깜한 밤 주님의 터치로 살아나고 치유된 그들과 그들 가족의 마음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공감에는 따뜻함과 사랑과 이해가 있습니다. 공감은 상대방의 아픔을 알고 이해하게 해줍니다. 공감하는 순간 우리의 굳어진 마음은 일순간 녹습니다. 바로 이 마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마음입니다. 굉장한 영적인 에너지가 공감에는 있습니다. 공감하는 능력이 클수록 우리의 영적인 에너지와 능력은 향상됩니다. 영적인 치유의 능력이 나오게 됩니다
이 한 밤에 보여주신 주님의 공감하는 능력은 우리가 사는 요즘 시대의 무관심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공감의 시대가 아닌 무관심(indifference)의 시대입니다. 공감해봤자 손해라는 생각이 팽배한 단절의 시대입니다. 공감하고자 하는 감정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마저 무관심을 택하면 어떡하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살아보려고 길을 따라나선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무관심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공감이 주는 변화를 체험해 봐야 합니다. 공감에 관한 관심이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움직임은 교회에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일반 학자들도 이 공감의 위력을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공감하는 삶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무관심은 아주 나쁜 마음이며 나쁜 영성입니다. 사람들의 아픔, 내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모른척합니다. 그래서 나쁜 것 입니다. 닭 소 보듯, 소 닭 보듯 합니다. 이런 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감이 있게 되면 달라집니다. 공감은 나를 변화시키고 내 주변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에게서 공감으로 치유하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여러분들도 주님을 모방하고 본받고 따라서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공감하는 능력이 높아질수록 더욱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2. 기도(祈禱)
성도들이 주님을 본받아서 모방해야 할 일 순위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 모습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마가의 기록을 봅시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35절) 목사님들은 이 구절로 예수님이 새벽기도의 원조라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새벽은 바로 전날 밤 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신 그 밤을 지낸 새벽입니다. 주님은 아주 잠시 잠깐 눈을 붙인 후 일부러 일찍 일어나셔서 기도하러 한적한 곳을 찾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피곤하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기도해야겠구나, 기도 안 하면 안 되겠구나 하시고 일어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뭐 이렇게까지 기도해야 하나’하십니까? 주님의 첫날 사역은 엄청난 소문을 불러일으켰고 그날 밤 그 소문에 많은 병자가 주님의 치유를 받기 위해 몰려들 정도로 성공적인 출발입니다. 아직 그날 밤 치유하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는 환자들이 아마 시몬의 집 앞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들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성공을 기약 받고 있는 순간에 주님은 강력하게 기도의 필요를 느끼신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성공이라고 느끼는 이 순간 주님은 기도하러 일부러 일찍 일어나셔서 힘드신 몸을 이끌고 한적한 곳, 바로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후대에 붙은 예수님 별명이 ‘바보 예수’입니다. 그냥 계셨으면 대박 난 곳에서 사람들의 인기를 더 얻으셨을 텐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명성을 얻기 시작할 그 순간 주님은 자신이 출발한 곳, 아무도 없는 곳,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음성을 들었던 그곳, 40일간 금식 기도하셨고 사탄의 유혹을 받고 이기셨던 그곳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대중적 명성은 주님에게 위기로 느끼셨을 수 있습니다. 사탄도 광야에서 이미 그런 유혹으로 시험했었습니다. 주님은 기도의 자리로 다시 초심의 자리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주님의 기도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 모습은 어떻습니까? 언제 기도하십니까? 어디서 기도하십니까? 어떻게 기도하고 계십니까? 새벽에 하십니까? 직장에서 하십니까? 한밤중 부엌 한구석에서 하십니까? 주님, 다 아시지요? 라는 기도만 하십니까? 아니면 아예 안 하십니까?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방하며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오늘 주님께 배우듯이 기도는 어려울 때만 잠깐 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해서 만사가 형통할 때 오히려 새벽에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공식입니다.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말 잘 듣고 남편 직장 일이 잘될 때 그때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도의 공식을 마음에 담아두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일이 안 풀릴 때 하는 것이다’하는 낡은 생각을 아직도 하고 계십니까? 잘못된 고정관념입니다. 반드시 버리십시오. 기도는 언제나 어디서나 해야 합니다. 힘들 때도 기도하시고 힘을 구하십시오. 성공할 때는 기도로 감사하시고 겸손을 구하십시오. 주님처럼 성공의 시점에 초심으로 돌아가 기도의 자리로 나아 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십시오. 기도는 영적 호흡입니다. 기도가 없어지면 잠시 잠깐은 살 수 있어도 그 인생은 점점 피폐해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
헨리 나우웬은 기도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초조감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유혹 속에서 평화를 맛보고, 여전히 불안하면서도 안전하고,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으면서도 빛의 구름에 둘러싸이고, 여전히 의심하면서도 사랑에 감싸여있다’ 여러분의 기도가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사명(使命)
따라가야 할 세 번째 모습은 사명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깊게 수행하고자 하는 단단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36절에 보면 제자들이 새벽에 기도하러 나가신 주님을 광야로 찾아갑니다. 급하게 찾으러 간 이유가 37절에 나옵니다. 주님 만난 제자들이 하는 말이 뭡니까?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사람들이 주님 찾고 난리가 났습니다’. ‘여기서 기도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빨리 가셔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런 말 하면 안 됩니다. 제자의 본문이 뭡니까? 따라가는 자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라오라 말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이끌고 가려고 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모든 사람이 찾고 있으니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겁니다. 대단한 명분이고, 그럴듯한 유혹입니다. 많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근데 주님은 많음에 흥분돼있는 제자들에게 요즘 말로 돌직구를 던집니다. ‘난 안 간다’ 대신 다른 가까운 마을, 작은 마을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작은 마을에 가서 내가 해야 할 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겠다’
38절입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인기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인기를 아무나 얻습니까? 애쓰고 노력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인기도 얻습니다. 여러분들도 많은 이들이 찾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겁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찾을 때, 이거 하나만은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잘되고, 사람들이 많이 찾고, 바빠질 때일수록 하나님을 꼭 보세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뭔지를 확인하세요. 그리고 그리로 가십시오. 그 길 가다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면 떨어져 나가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더 크게 성공하고, 더 잘될 거라는 말은 제가 못 드립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영혼은 더 잘되고, 복되고, 평안하고,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嚴賢 虛聖(엄현 허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엄현, 엄함이 있어야 현명해지고, 허성, 비움이 있어야 거룩해진다는 말입니다. 뒤집어서 얘기하면 엄하지 않으면 현에 이룰 수 없고, 비움이 없게 되면 깨끗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새겨들어야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이들보다도 엄함(자기 절제)과 비움의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할 것 다 하고, 놀 것 다 놀고 그리스도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잘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감, 주님의 기도, 주님의 사명. 잘 따라 하셔서 풍성한 은혜 누리시기를 바랍니다.(정리: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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