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6.10. 주일 설교: 우리도 깨끗하게 하소서(막1:40~45). 마가복음 10. 양은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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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 우리도 깨끗하게 하소서(막1:40~45)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1:40~45)

오늘 마가복음 10번째 시간입니다. 지난주 제목은 예고 드렸습니다. ‘우리도 깨끗하게 하소서’입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우리는 마가복음 1장을 마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우리를 상당히 부끄럽게 만듭니다. 나병 환자는 그 시대에 가장 불결한 사람, 저주받은 사람, 희망 없는 사람, 가장 외로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주인공이 주는 도전이 만만치 않습니다. 전염병 중에서 가장 꺼리며 가장 저주받은 병으로 여기며 모든 사람이 피하던 이 나병 환자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을 잘 받으시고 깨달은 바를 삶에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이 나병 환자에 대한 개인적인 자세한 내용은 없어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모두가 불결히 여겨 사람 있는 곳에 나오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께 나아와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고 주님은 긍휼히 여기셔서 고쳐 주셨으며 예수님께서 침묵하라고 하셨는데 이 놀라운 사실을 침묵할 수 없어서 널리 전파했다는 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병자를 고치고 치유한 사건은 성경 곳곳에 나오기 때문에 그냥 또 병 고침 사건이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말씀 들어가기 전에 시인 자신이 나병 환자였던 한하운 시인(1920~1975)의 시를 보겠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몸을 관찰하면서 몸이 하나둘 문드러져 없어지는 것을 시로 적었습니다. 이 시는 손가락의 변화를 적은 시입니다.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 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느 양지 터를 가려서 깊이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손가락 한 마디)

잘 알다시피 나병은 심각한 전염병입니다. 걸리면 손가락, 발가락, 얼굴 모두 뭉개집니다. 일단 환자가 되면 집을 떠나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유배 생활을 해야 합니다. 외롭고 고독한 병입니다. 어릴 때 동네에 나병 환자가 나타나면 ‘문둥이 온다’ 누군가 소리치면 모두 놀라서 피하려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던 기억이 납니다. 이 나병 환자들이 느꼈을 상실감, 고독감, 절망감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문둥병 걸린 많은 이들이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절망이 되면 그랬겠습니까? 40절에 나오는 이 나병 환자가 느끼는 상실감, 절망감, 고독감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나병은 발병 후 평균 9년 정도 살았다고 합니다. 나병은 주위 사람들에게 전염시키면 안 되기 때문에 유대 법에서는 엄격히 다뤘던 질병입니다. 환자는 발병되면 ‘나는 부정하다!’ 외치며 주위에 사람의 접근을 막아야 합니다.

이런 치명적인 병에 걸린 주인공이 42절의 기적 같은 단어 ‘깨끗해졌다’를 만나게 됩니다. 이 얼마나 소망을 주는 단어입니까? 기적의 단어입니다. 이 주인공 나병 환자는 ‘소망을 잃은 이’, ‘상처받아 희망을 잃은 이’ 등의 상징적 환자로 봐도 됩니다. 이 시대 이런 나병처럼 희망을 앓고 절망의 병에 빠져 헤매는 환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에게 회복됐다, 고쳐졌다, 변화됐다는 단어는(42절) 가장 절실한 단어들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떻게 절망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자가 치유함을 받고, 회복됐을까? 이 비밀을 알아내고 우리의 것으로 받고자 함이 오늘 말씀의 목표입니다. 회복이 절실한 분들 계십니까? 오늘 말씀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핵심 단어는 두 개입니다. 바로 ‘갈망’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갈망은 나병 환자 쪽에서 하는 것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주님이 갖게 되시는 마음입니다. 이 둘이 만나 불꽃이 일어나면서 치유의 신비한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1. 갈망
갈망할 수 없는 이가 바랍니다. 그 당시 나병은 불치의 병입니다. 희망의 끈이 전혀 없어 절망하고 목숨을 끊는 상황에서 이 나병 환자는 치유되기를 갈망합니다. 이 생각 자체가 놀라운 것입니다. 이런 희망의 생각을 품고 고침 받고자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는 행동을 했다는 자체가 정말로 굉장한 일입니다. 이 주인공은 우리로부터 존경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갈망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자가 이 정도로 치열하게 갈망하면 그 자체로 존경받아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희망이 끊어지는 상황이 오면 ‘이제 그만하자’ 포기하고 체념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이 나병 환자는 체념하지 않고 낫고자 갈망했습니다.

퍼지기 시작한 그분에 관한 소문을 들으면서 예수님이라면 이 병을 낫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간절히 믿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절망의 심연에 빠져서 갈망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때 이 나병 환자처럼 갈망하는 소망을 품고 주님께 나아오는 주님의 위대한 백성들 되시기 바랍니다. 갈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포기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갈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갈망할 수 있는 것은 큰 은혜와 은총의 사건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40절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라고 합니다. 이 나병 환자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행동을 취한 것입니다. 들을 수 있는 것도 복이요, 행동으로 옮겨 예수께 나아오는 행동을 취한 것도 복입니다. 나병 환자가 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예수님의 자비하심, 병 치유의 능력, 신비한 힘’ 등이었을 것입니다. 이 소문에 순간 ‘이분께 가면 나을 수 있겠구나’. 강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으로 끝내지 않고 자신의 갈망을 이루기 위해 소문의 당사자인 예수께 달려간 것입니다. 이 장면에 큰 도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갈망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 얼마나 깊게 예수님께 달려나가 보셨습니까? 한 주간 해 보셨습니까? 한 달간 해 보셨습니까? 아니면 그 상황에 절망하여 그대로 주저앉으셨습니까?

유대인들의 정결법에 따라 나병 환자는 사람들에게 50보 이내로 가까이 가면 안 됩니다. 하지만 이 나병 환자는 불결한 몸으로 당돌하게 정결법을 어기면서 예수님께 달려간 것입니다. 마음 가득한 갈망이 법까지 어기면서 예수님께로 나아오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나아오는 데에는 대단한 각오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격리돼서 죽느니 돌에 맞아 죽더라도 한번 예수님을 만나보자 하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갈망을 마음에 묵혀 두지 않고 현실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키르케고르는 ‘무엇인가를 바랄 수 있다면 내가 바라는 것은 부도 권력도 아닌 가능성에 대한 열정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가능성에 대한 열정이 바로 갈망입니다. 이 갈망은 현실에서는 존재가 없는 ‘가능성’일 뿐입니다. Noting입니다. 미래의 일입니다. 부와 권력을 마다하고 가장 바라는 것이 ‘가능성에 대한 열정(갈망)’이라고 한 키르케고르의 통찰은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세상은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현실의 세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실제로 존재하는 가능성의 세상입니다. 이 가능성의 세상이 바로 갈망의 세상, 믿음의 세상, 기도의 세상,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세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세상만을 인정하면서 살게 되면 현실이 주는 무게감, 중압감에 갇혀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살게 됩니다. 현실의 삶을 이겨내고 극복해 낼 수 있는 답은 바로 가능성의 세상, 상상 속의 세상, 생각 속의 세상, 믿음의 세상입니다. 이 가능성의 세상을 포기하면 현실의 세상도 포기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얘기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믿음의 세계는 현실을 뛰어넘게 하고, 극복하게 하고 놀라운 일을 이루어 냅니다. 믿음의 세계로 뛰어넘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현실이 아닌 것 ‘아…. 이렇게 되면 좋겠다.’라는 갈망을 현실로 끌고 들어와, 갈망하며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세계, 가능성의 세계, 상상의 세계를 갈망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 낼 수 있습니다. 대단한 이야기를 들어도 ‘거짓말하지마, 기도도 많이 해 본 것도 아니면서. 기도해봤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더라’ 하며 현실 안에서의 시각으로 다 판단하고 부정하며 끝내려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세계, 믿음의 세계, 가능성의 세계에서 살라고 합니다. 이 가능성의 세계를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소망하고 갈망은 하면서도 발걸음을 떼지 않습니다. 이 위대한 나병 환자는 갈망을 생각으로 끝내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위대하다고 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자존심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강해서, 안다고 해도 실제로 행동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이 나병 환자는 희망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움직였습니다. 예수께로 달려 나와 갈망했던 마음속의 가능성 즉 그의 믿음을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40절) 이것은 나병 환자가 상상 속에서 늘 되뇌었던 말입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의지)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능력)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이런 믿음이 의외로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말과 실제 믿음 사이에 너무나 많은 것이 쌓여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가 얄팍하게 알고 있는 지식, 우리의 경험과 의심들입니다. 다 제거해 버리시기 바랍니다. 갈망을 포기하는 순간 현실도 포기하게 됩니다. 갈망하지 않으면 현실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갈망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고쳐지기 원하고, 회복되기 원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갈망을 주님께 가져가셔서 주님께 손 내미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 눈앞에는 보이시는 실존으로써의 주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내놓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내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지금은 갈망은 다 사라지고 욕망만 남아 있는 시대입니다. 욕망은 나의 욕구입니다. 기도의 자리에 나의 욕구들만 갖고 나아갑니다. 그러나 내 존재를 송두리째 치료할 수 있는 것은 갈망입니다. 욕망은 안 됩니다. 욕망을 들고 기도의 자리로 가셔도 아마 응답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갈망을 원하십니다. 갈망의 영성을 키워 가십시오. 그때 돌파구가 열립니다. 갈망이 변화의 첫 번째 시작입니다. 우리 모두 갈망이 필요합니다. 영적 갈망을 발견하셔서 기도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그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42절)이 나병 환자의 갈망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 나옵니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는 것으로 보아 굉장히 많이 진행된 나병 환자였던 것 같습니다. 다 문드러져서 보기 힘들 정도의 아픔을 가진 자가 지금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린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 마음이 짠해지신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은 ‘불쌍히 여겼다’입니다. 이 ‘불쌍히 여겼다’라는 말, 창조주께서 한 인간을 불쌍히 여겼다는 이 말은 엄청난 소망의 말이요, 희망의 말이요, 믿음의 말입니다. 절망에 빠진 인간의 간절한 갈망과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 이 둘이 만남이 치유와 회복의 불꽃을 일으킨 것입니다.

2. 불쌍히 여김 (막1: 41, 42)
주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정결법에서 금한 나병 환자를 만지시며 치유하시는 일을 일어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 법을 어기신 것입니다. 부정한 것을 만지는 것을 금하는 법, 즉 ‘부정한 것을 만지면 부정해진다’라는 접촉의 신학을 깨시고, 부정한 것을 정한 것으로 만드시는 역전을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내가 원하니 깨끗함을 받으라’(I will, be clean.ESV).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에 응답하셨습니다. 믿음에 믿음으로 반응하셨습니다.

갈망하는 자의 눈물의 간구에 주님도 무너지신 것입니다. 마치 주님 자신이 아프신 것처럼 주님은 반응하십니다. 우리도 이 나병 환자처럼 간절해야 주님께서 무너지십니다. 나의 간절한 갈망은 주님을 무너지게 하고 치유를 일으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애끓는 마음, 긍휼의 마음, 하늘의 마음, 성령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Ego 강한 인간의 마음은 아닙니다.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우리도 받아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힘들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게 되면 피하고 싶은 마음, 미워하는 마음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살아 있으면 고쳐내고, 살려내고,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자산이요, 최고의 힘입니다. 이 마음 받으셔서 풍성한 믿음의 세계를 전하시기 바랍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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