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집중 기도회 1: 십자가로 더 가까이(요19:25~27). 양은익 목사. 2018.3.19

 

말씀: 십자가로 더 가까이(요19:25~27)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5~27)

이번 집중 새벽 기도의 주제 찬송으로 ‘갈보리 십자가의 주님’을 부르겠습니다. 계속 부르면서 여러분의 기도 제목으로 삼으시고, 찬송의 은혜를 받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회 동안 드려야 할 기도가 가사에 그대로 다 나오고 있습니다. 1절: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2절: 믿음과 소망을 주시며 그 사랑의 힘으로 실패하지 않고 이기게 해 주십시오. 3절:우리의 모든 간구 응답해 주십시오. 기도의 은혜로 충만케 해 주십시오. 기도의 초점을 놓치지 말고 중심 잡고 깊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제 주일 말씀은 ‘다시 십자가로’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십자가로 더 가까이’입니다. 이 두 말씀 모두 십자가로 더 다가가라는 촉구의 말씀입니다. 프랑스에 전해지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젊은 육군 장교 이야기입니다. 술자리에서 장난삼아 내기를 했습니다. 파리 시내 성당 신부에게로 가서 신부가 듣기 민망한 죄를 말하는 고해성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한 장교가 그대로 했습니다. 죄의 고백을 다 들은 신부는 한참을 침묵한 후 말했습니다. 당신은 성당으로 들어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상 앞에 가서 서십시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계속 반복해서 말하십시오. ‘당신이 저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요? 그러거나 말거나!’ 장교는 신부가 말해 준 대로 성당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상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신부가 알려준 말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반복하다 보니 목이 멨습니다. 그리고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리고 하염없이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떠났습니다. 그 장교는 수도원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얘기를 들어도 십자가가 느껴지지 않고 실감 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도 십자가가 실감 나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장교처럼 십자가 앞에 서서 똑같이 해 보시기 바랍니다. 눈으로 우리가 보지 못하는 오래전 원본의 갈보리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 내가 바라보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품어내는 능력과 신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잡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깨달음이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 십자가는 상징이지만 깊이 묵상하시며 계속 응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십자가 앞에 나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무한한 은총과 치유와 사랑을 주고 계심을 깊이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받으셨던 십자가의 고난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과 교환되며 연합되는 신비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 고난의 교환의 은혜는 부활의 신비다’ 주님의 고난과 나의 고난은 우리가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며 주님께 나아올 때 서로 교환되며 연대 됩니다. 그리고 치유와 회복의 부활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이 신비가 신앙 가운데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일어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은 고난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고난 가운데에 있을 때 우리는 고난의 정답을 요구하지만, 주님은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감을 주시는 것으로 함께 하십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누군가 함께 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방법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주시는 사랑입니다. 내가 십자가 앞에 나아와 그 주님의 고난에 깊이 들어갈 때 주님은 나의 고난에 연합하시고 연대해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는 치유하고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고난의 현장에서 아쉬운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들이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진다는 것입니다. 한 무리는 십자가에 끊임없이 다가가는 자들입니다. 또 한 무리는 십자가에서 멀어지고자 도망치는 자들입니다. 교회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꺼리고 싫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십자가를 가까이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이모,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단 한 명의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이 고난의 현장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있어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복음서 저자는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마26:58). 멀찍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멸시와 모욕을 당하는 비참한 현장에 함께 한다는 것은 명예롭습니다. 전우애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십자가 현장에 있던 사람과 말로만 전해 들은 사람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차원이 다른 신앙의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후 제자들은 십자가 현장, 고난에 동참하지 않았기에 영적으로 철들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후에야 주님의 명령을 따라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께서 대화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대화하면서 주님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눈길로 전해진 사랑으로 그들은 이미 충만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 곁에 있었던 여인들은 십자가가 주고자 하는 최고의 사랑과 용서와 은혜를 최초로 강렬히 받아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십자가는 상징적 십자가입니다. 원형 십자가와는 시간과 공간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사랑과 은혜는 지금도 흘러넘칩니다. 크신 영적 위로와 사랑과 은혜가 넘쳐납니다.

나의 고난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깊이 연대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어머니는 그 현장에서 뜨겁게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이심전심입니다. 삶의 가장 아픈 순간에 미움과 분노가 아닌 사랑과 은혜가 넘칩니다. 우리도 이 경험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성공과 승리가 아닌, 몸소 당하신 고난으로 우리의 고난과 함께하신다는 위대한 영적 신비와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아담 이후 죄로 시작된 우리 인간들의 인생의 고난을 주님은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의 어려움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언약을 주셨고, 삶 속에서 고난 가운데 허덕이는 우리에게 고난을 동참하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당신께서 다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다 아시고 동참하시고 공감하신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위대하고 감사합니까?

우리가 심한 고난 가운데 있을 때도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주님을 외면하면 어디로 달려갈 것입니까? 우리는 작은 고난에도 무력하고 무지해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원망으로 일관하고 아픔 속에서 삽니다.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오. 공감하시는 주님께서 기다리십니다. 겸손하게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오. 내 아픔을 헤아려주고 해결해 줄 사람이 과연 있습니까? 상담치료를 받으시겠습니까? 그때 뿐입니다. 나의 고난을 다 아시는 주님께 나아 오십시오. 여러분들의 아픔을 주님께 내려놓고 주님의 치유와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회 동안 여러분들의 모든 오감이 예민하게 열려서 축복받으시고 아픔을 내려놓고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성령께서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아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을 교정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기간 꼭 기도 제목을 정하시고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고난에 공감하시는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고 풍성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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