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18. 주일 설교: 다시 십자가로 (요12:32~33)

 


말씀 : 다시 십자가로(요12:32~33)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요12:32~33)

봄이 오는 길목 참 좋은 주일 아침입니다. 교회 난방을 한대만 틀어도 충분히 따뜻한 봄으로 가는 길목에 와 있습니다. 새싹을 틔우는 봄의 생명의 기운이 여러분 안에도 힘차게 약동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 한 주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고난 주간이 다가오고 있고, 내일부터 새벽 집중 기도회입니다. 주제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관한 책들, 말씀과 묵상과 기도와 찬양을 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151장 찬양으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생각할수록 십자가는 귀합니다.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편했을까요? 마음대로 하니까 좋았을까요? 이번 두 주간 십자가를 깊이 알게 되고, 또한 귀하게 여기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볼수록 역설입니다. 어떻게 그러한 잔혹함과 폭력 속에서 미움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용서와 사랑, 화해, 그리고 그들을 위한 기도가 나올 수 있습니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눅23:34).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인데, 사하여 달라니요.

십자가의 겉모습만 보는 이들은 그 장면이 너무 잔혹하여 이런 말까지 합니다.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를 대신해 참혹한 죽음을 죽게 하는 것이 어떻게 도덕적이냐? 하나님의 자녀 학대 아니냐?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거부감을 가지고 십자가를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해이지만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있을 수도 있는 오해입니다. 십자가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십자가를 주님이 지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더 깊이 봐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십자가를 지게 할 수밖에 없었던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아름다움이다’는 글을 봤습니다. 피로 가득한 십자가가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아름다움을 봤던 이 분은 ‘아름다움’의 어원을 찾아보고 십자가에 있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은 세 가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는 것(知), 앓는 것(痛), 안는 것(抱)입니다. 각각의 어형 변화를 보십시오. 알음에서 다음이 붙어 알음다움 되어 아름다움이 되게 됩니다. 앓음과 안음도 마찬가지의 변화를 겪어 아름다움이 됩니다. 아름다움 안에는 이 세 가지 뜻이 다 들어 있습니다. 눈에 보일 때 멋있게 보이는 것이 아름다움의 다가 아닙니다.

아름다움이란 아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진리와 지식대로 살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픔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앓음(아픔,痛)을 통해 철들어 남의 아픔을 아는 이로 살게 될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픔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안아 주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모든 안아줌은 아름답습니다. 외면하고 배척해 보십시오. 아름답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의 모습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는 증오와 복수의 악순환을 깰 수 없다는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知). 주님은 그들의 폭력과 모욕을 그대로 다 받아내십니다. 심한 앓음(痛)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밀어내지 않고 안아 주십니다.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안음입니다. 십자가는 아름다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받는 메시아를 BC 700여 년 전에 이미 예언해 주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4~7)

십자가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최후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찔림을 당하셨고,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상함과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우리의 죄를 안고 가셨습니다. 참으로 슬프고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가장 처참한 사형 도구인 십자가가 우리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신비와 역설, 십자가의 정신과 마음을 알게 되면 십자가는 세상의 어떤 이야기 보다 가장 크고 진실한 Big story가 됩니다. 십자가는 모든 성경의 핵심입니다. 모든 성경의 이야기들은 십자가로 집중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는 유일한 길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이해하게 될 때 나의 사람됨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번 기도회를 통해 여러분들 모두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어 여러분들의 삶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많은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일으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가 전해 주는 메시지는 상당히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십자가는 나를 알게 만듭니다. 위장되지 않은 내 모습을 보게 합니다. 내 수준이 높지 않다는 거, 부끄러운 게 많다는 거,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보여 주셨던 십자가의 정신과 은혜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매일의 삶에 짓눌린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요즘 힘들다 힘들다 해도 살 만큼은 거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나 성도의 사는 모습을 들여다보면 시원한 모습을 찾기 어렵습니다. 고장 난 데가 너무 많습니다. 바울은 ‘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교회나 신앙인들의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살펴보면 정말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우리의 자랑은 진정 십자가뿐이어야 합니다. 십자가 정신을 놓치게 되면 모든 것을 다 놓치게 됩니다.

한 기독교 인터넷 매체에서 ‘비기독교인인 당신은 왜 개신교를 싫어합니까? 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7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① 개신교인은 말 따로 행동 따로다. ② 개신교인은 사랑은 없고, 욕심만 가득하다 ③ 개신교인은 권력과 결탁해있다. ④ 수준 미달의 목사가 많다. ⑤ 타 종교에 배타적이다 ⑥ 헌금을 강요하고, 재정을 투명하지 않게 사용한다 ⑦ 끼리끼리 놀고, 끼지 못하는 사람은 왕따시킨다.

어디에서부터 고쳐 나가야 하겠습니까! 일본 강점기를 사셨던 이용도 목사님을 ‘눈물을 주소서’라는 글을 통해 소개해 드렸습니다. 오늘은 목사님의 글 ‘피를 주소서’를 보겠습니다. ‘우리는 눈물도 말랐거니와 피는 더욱 말랐습니다. 그래서 무기력한 빈혈 병자가 되었습니다. 피가 없을 때는 기운이 없고, 맥없고, 힘없고, 담력 없고, 의분 없고, 화기 없고, 생기가 없습니다. 그 대신 노랗고, 겁 많고, 쓸쓸하고,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주사해 주소서. 그래서 우리는 새 기운을 얻고 화기와 생기 있고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당신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서 우리에게 주사해 주옵소서’

목사님은 십자가의 피에서 답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소망’을 줍니다.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주님의 피로 선명히 물들어 살아나기를 바란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피’ 곧 ‘생명’입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신앙 앞에 제대로 서지 못하면 우리는 가짜입니다. 주님의 피로 인해 생명을 받을 때 우리는 살아납니다. 마음이 아프고 상처로 갈급한 분들은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그 은혜 앞에 엎드리시고 그 신비한 은혜를 체험하십시오. 새 생명을 받아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선포가 없는 기독교는 없습니다. 두 주간의 새벽 집중 기도회 동안 십자가를 얘기할 것입니다. 잘 받아 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32절 보십시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12:32) 깊게 묵상해야 할 소중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대로 땅에서 들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내는’ 출발점이 됐습니다. 주님을 알아보고 따르는 사람들을 얻으셨습니다. 십자가가 출발점입니다. 우리의 믿음, 헌신, 은혜 전부 ‘나’에게서 나오지 않고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십자가에서 교회가 태어났고, 성도가 태어났습니다. 새롭게 출발하고 싶으면 십자가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성탄의 밤과 십자가의 낮을 비교해 보십시오. 성탄은 밤에 시작했습니다. 새벽에 깨였던 자들만 성탄의 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였습니다. 환한 대낮이었습니다. 일부러 외면하고자 하지 않는 이상 누구나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32절) 모든 사람이 다 십자가로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파나 교회로 이끌림을 받은 게 아니라 ‘십자가’에 의해 이끌려 온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인해 새로운 생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몸값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입니다. 우리의 몸값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다는 자부심을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는 존귀한 자들입니다. 주님의 피 값으로 이룬 구원과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헛되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믿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믿음이란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주님은 이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용기 있게 받아들이십시오. 이번 새벽 집중 기도회를 통해 십자가를 제대로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느라 지치고, 힘들었던 모든 이들이 영적인 공허함을 벗고 십자가의 은혜로 살아나는 풍성한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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