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25. 주일 설교: 교회, 사랑의 배움터(요일4:7~12). 양은익 목사

 

말씀: 교회, 사랑의 배움터(요일4:7~1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4:7-12)

귀한 예배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씀이 주는 기쁨이 넘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두 주간은 교회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특별한 말씀은 아니지만, 교회가 얼마나 귀한지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의 관심은 두 단어에 있습니다. 교회와 사랑입니다. 이 두 단어는 분리돼서는 안되는, 반드시 붙어 있어야 하는 단어입니다.

사랑이 붙어 있어야 하는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교회와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정과 교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두 곳에서 사랑을 배우고 모판같이 심고 키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우리는 이 두 곳, 교회와 가정에서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베풀고 아름답게 키워가야 합니다. 교회와 가정은 사랑이 늘 있어야 합니다. 교회+사랑, 가정+사랑입니다. 교회와 가정은 사랑의 모판 같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는 사랑을 배우고 나누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가정과 교회를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가 배우기를 원하고, 또 배우고 받은 사랑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로써 다른 모든 것-믿음, 그 밖의 모든 성품-은 조금 부족해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만은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 없는 가정, 사랑 없는 교회. 이것처럼 불행한 조합이 있을까요? 가정과 교회에 사랑이 있게 하려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는듯한 착각을 합니다. 아는 것 같지만 모르는 것이 사랑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사랑)이 무엇인지를 믿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알려 줍니다. 사랑은 종류가 많습니다. 그 많고 많은 사랑 중에 성도들이 배워야 할 가장 귀한 사랑, 반드시 성도에게 있어야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장소는 바로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충만함으로 임재하시는 교회입니다. 교회만큼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반드시 이 사랑을 배우고 습득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각자 열심히 성숙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뜨겁게 나오는 곳입니다. 교회는 이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을 강하게 체험하며 배울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교회에서 상처받고 사랑을 오히려 잃어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만날 때 마다 상처받는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표현은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저기 오시는 집사님을 보고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갔는데 그 집사님께서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한 표정으로 인사한다면, 아마 속으로 ‘뭐야 나를 무시하는 거야?’하고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무심코 던지는 감정 섞인 가시 돋친 말들은 상처를 줍니다. 모든 부류의 상처받은 영혼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이기에 교회는 상처 속에 신음하는 현장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시기에 이런 일을 겪었었습니다. 새로 부임하여 맡은 교구의 가족들이 많았기에 가족 이름과 자녀들 이름을 외운다고 외웠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어느 날 맡은 교구 권사님과 마주쳐서 자녀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실수를 하고만 것입니다. 이름 석 자 중 한자가 잘못된 것입니다. 권사님께서 정색하시며 그 자녀는 자신의 자녀가 아니라 합니다. 그리고 교구 목사가 교구 자녀 이름도 틀리게 얘기한다는 얘기들이 들리고 상처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런저런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들 결심합니다. ‘내가 교회에서 말하나 봐라. 절대 얘기 안 한다’합니다. 이런 마음을 먹게 되면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사랑도 할 수 없게 되고, 친밀함이란 귀한 가치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불행한 교회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친밀함이란 방어가 필요 없는 관계입니다. 서로가 존중해 주고 인정해 주는 편안한 관계입니다. 그 상대방의 부족함과 독특함 등이 전혀 문제가 안 되고 수용됩니다. 그가 처한 모든 상황을 넉넉하게 받아 주게 됩니다. 만약 교회 안에서 받은 상처들로 인해 이런 좋은 관계가 다 사라지고, 교회 안에 긴장감이 넘치고 서로 조심하는 관계로 들어가면, 모든 관계는 피상적인 관계가 됩니다. 그런 관계에 사랑은 없습니다. 대형 교회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작은 교회의 장점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관계의 친밀함과 사랑의 교제입니다. 그러나 만약 작은 교회가 피상성에 빠지면 그 자체가 파멸입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에 대한 상처로 관계가 피상성에 빠지면 사랑할 마음도 사라지고 그 관계 속에 존재하는 사랑은 없습니다.

친밀은 사랑이 기본이 되어 나오는 선물입니다. 친밀함이 없으면 관계가 깊어질 수 없습니다. 오해가 상당히 쉽게 일어나게 됩니다. 오해가 일어나면 또 서로 상처를 입게 됩니다. 만약 당사자가 신앙인이면 믿음조차도 흔들리게 됩니다. 가정도 흔들리고, 교회도 흔들리게 됩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교회에서 사랑을 배워 벗어나야 합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사랑이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서로를 상처 주고 아프게 하는 공격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두 가지 문제-사랑을 모르는 것과 자기중심의 죄성-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파악하고 깨달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배워, 사랑을 해야 함은 성도의 사명입니다.

1. 사랑을 배우지 못함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을 모르기에 사랑에 폭 젖어 있지 못하기에 사랑이 저절로 우러나오지 못합니다.
2. 자기중심의 죄성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위치에 자신을 올려놓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기중심의 죄성은 사랑을 하지 못하게 끌고 갑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사람은 환경적 존재이며 문화적 존재입니다. 사랑 없는 환경에서 자라면 사랑을 배울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채 성인이 되면 사랑을 몰라서 사랑할 수 없는 자가 됩니다. 그들에게 신앙인들이 사랑을 얘기하면 ‘사랑이 밥 먹여주느냐?’합니다. 예, 제대로 사랑하면 밥 먹여 줍니다. 제대로 사랑하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정글 같은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잡아먹고, 잡아 먹히는 문화에 젖어 있는 이들은 이기는 것만 습득되어 사랑이 무엇인지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강한 의식 없이 무방비로 사회에 노출되면 세상 사람과 똑같아집니다. 공격적이 되며 거칠어지며 성공하려는 논리 속에 파멸의 길로 들어섭니다. 반드시 의도성을 갖고 사랑을 배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사랑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그 사실을 얘기합니다. 세상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10절),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11절),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18절)’ 합니다. 강조하기 위한 과장법도 사용했지만, 핵심은 진실입니다. 이렇게 의인도 없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이기에 그들에게는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함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롬3:12-17)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들은 말이 독해집니다. 욕하면서 저주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을 보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들은 행동이 독해집니다. 피 흘리는데 빨라집니다. 폭력과 평화 없으므로 나타납니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 없는 자들의 이 모습은 그 시대에도 과장이 아니었고 이천 년 지난 지금도 과장이 아닙니다. 키르케고르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못 할게 없다’ 하나님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계실 자리에 자신이 자리합니다. 그래서 무서울 게 없습니다. 그래서 악한 말, 악한 행동, 폭력을 죄의식 없이 행합니다. 그 정당성은 ‘내가 원하니까 한다’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요즘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Me too’에 대해 알고 계시죠? 가려지고 숨겨졌던 낯뜨거운 사건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위치에 있는 자들, 부패한 인간이 보여주는 추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죄성의 근본은 ‘너’가 아니라 ‘나’ 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 자신을 하나님 자리로 놓고자 하는 ‘나’ 중심의 인간의 죄성때문입니다. 이 근원적인 죄성을 벗어나지 못하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죄성을 깨셔야만 사랑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 죄성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서로에게 친밀하게 마음을 열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우리의 감정을 극복하며 스스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요한 사도는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우리는 사랑을 스스로 할 실력이 없다는 요한 사도의 고백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 속할 때만 나의 죄성을 극복해서 나 아닌 너를 받아들이며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이 스스로 사랑하기는 힘듭니다. 사랑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훈련되어야 합니다. 성숙시켜 우리는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인간인 우리도 나름대로 사랑을 조금씩은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내가 중심이 된 조건부의 사랑, 이미 한계를 가진 모조품 사랑, 짝퉁 사랑입니다. 나의 마음에 맞으면, 조건에 맞으면 우리도 흔쾌히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조건이 와르르 무너지면, 우리의 사랑도 와르르 무너집니다. 조건은 우리를 좌지우지합니다. 전문기관에서 100가정을 조사했습니다.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는 가정이 얼마나 되는지를 조사했습니다. 100가정 중 5가정이 비교적 거의 다투지 않고 살고 있다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왜 우리는 이렇게 사랑의 결핍 속에서 힘들어하면서 사는 것입니까? 사랑으로 충만해야 하는 교회에 왜 상처와 다툼과 불화가 있는 것입니까? 답은 ‘나’ 입니다. 죄성 가득한 나 중심의 사고 때문입니다. 이 답은 무시할 수 없는 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해야 할 교회에서조차 사랑이 없어지게 되면 이 상황을 버틸 장사는 없습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줍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4:10-12)

하나님의 사랑은 화목제물의 사랑입니다. 화목제물이란 동물을 잡아 죽여서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이는 사랑의 극치입니다. 생명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귀한 생명, 그것도 아들의 생명을 드렸습니다. 자신을 부인하여 이루어낸 사랑입니다. 어려운 사랑입니다. 놀라운 사랑입니다. 조건은 눈 씻고 봐도 없습니다. 한없는 사랑입니다.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런즉 ‘우리도 서로 사랑 하자’ 합니다.

교회에서 성도는 사랑을 배워 행해야 합니다. 이 사랑에 눈뜨고, 그 구원의 실체에 접붙임을 당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자로 설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 사랑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접붙임 되어 사랑하고 사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십자가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 힘들게 여기던 섬김과 희생과 봉사를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넉넉히 해나가는 자로 서나가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얘기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사랑할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는데 어떻게 다 사랑 하실 수 있냐고 묻고 계십니까? 그런 생각은 정말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십자가 사랑으로 깊이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몸서리치며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지’하면서 아파하고 고민하는 이들에게 강력하게 임합니다. 노예 상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이 임하여 완전히 변화되어 새 삶을 살게 하는 사랑의 역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하면서 스스로 위안하며 사랑을 키워가지 않는 이들에게는 사랑의 위대한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이 부족한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왜 내 사랑은 이것밖에 안 되나?’ 묻고 고민하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기 위해 깊이 들어가십시오. 긴장과 상처 속에 사는 삶은 이제 그만두셔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 생활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실체에 깊이 들어가십시오. 하나님을 붙들면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나와 심하게 다른 너가 즐비한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사랑을 배우고 익히기에 최적의 장소입니다.

바울은 사랑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사랑이 없으면 방언도 은사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귀한 은사인 예언과 믿음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믿음이 믿음 될 수 있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 자신 혼자만의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믿음도 자기도취에 빠질 수 있습니다. 믿음은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믿음의 바탕은 사랑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랑을 배우고 키워 나가십시오. 정글 같은 사회에 사랑이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사랑으로 사는 모습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쳐서 고쳐나가야 합니다.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하는 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를 실천해야 합니다.

1. 하나님과 연결하기
사랑의 실력이 없는 내가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돼야 합니다. 우선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 생활로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제하셔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는 모두 참석하십시오. 기도의 자리에도 기쁨으로 모두 참석하십시오.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해지십시오. 깊고 진지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경험하시게 되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들은 입만 움직입니다. 관성에 의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벗어나십시오.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모하시고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이렇게 할 때 우리에게는 자기 부인의 영성이 생겨납니다

2. 자기 부인의 영성
자기를 낮추고자 하는 영성입니다. 하고 싶은 사랑, 세상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적인 사랑에는 ‘혐오기’가 있습니다. 사랑의 유효기간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 도달하면 대부분 심하게 다투고 멀어지고 헤어집니다. 그냥 놔두면 안 됩니다. 자꾸 극복해야 합니다. 그나 나나 똑같은 인간입니다. 둘 중 누군가가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는 이가 자기 중심성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 질 때 사랑의 혐오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만약 둘 다 하나님을 모른다면 사태 해결은 어려워집니다.

우리 모두에게 사랑은 참으로 절실합니다. 상처는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하십시오. 상처 가운데 있습니까?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사랑할 수 있는 자로 든든히 서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 깊은 사랑을 체험한 자로, 나 아닌 이웃의 아픔을 끌어안고 보듬어 주는 따듯한 사랑의 사람으로 든든히 서 나가게 되시기를 축복하고 축원 드립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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