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4. 주일설교:교회, 자라감의 터전 (살전5:10~14). 양은익 목사

 

말씀 : 교회, 자라감의 터전(살전5:10~14)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5:10~14)

3월이 시작됐습니다. 여러분 모두 봄의 새 생명으로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교회에 대한 말씀 두 번째 시간입니다.

스위스의 내과 의사인 폴 트루니에는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혼자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는 이로 존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있어야 합니까? 교회에서, 동료 그리스도인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이 함께함이 신약 시대 교회의 핵심입니다.

함께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16세기 십자가의 요한은 비유를 들어 함께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얘기합니다. ‘홀로 떨어진 고고한 영혼은 홀로 타는 석탄과 같다. 그 불길은 이제 식는 일만 남았다. 더 이상 뜨거워지지 않을 것이다’ 깊은 신앙 체험으로 내 영혼이 불타올라도 함께 하지 않으면 결국 식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해야 신앙을 잘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나쁜 경험이 있는 교우들은 ‘함께’ 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원칙적으로 함께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과 신앙의 선조들은 끊임없이 정보로 또한 충고로 알려 주는 것은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함께 하는 것이 불편한데도 ‘함께하라’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함께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으로 자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홀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의 모습을 이루기 힘듭니다. 사랑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가치입니까? 하지만 혼자서는 안됩니다. 섬김 또한 얼마나 귀한 가치입니까? 이 또한 홀로는 안됩니다. 격려도 마찬가지입니다. 홀로 있으면 편합니다. 부딪힘도 없기에 신경 쓸 일도 없습니다. 예배 한 시간만 드리고 가면 됩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생활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만남입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고, 수평으로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귀한 사랑, 아들의 생명까지도 우리를 위해 희생케 하신 생명을 바친 사랑입니다. 이타적 사랑입니다. 이런 귀한 사랑을 받은 것에 만족하면서 홀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예배만 보고 가는 신앙생활을 하시겠습니까? input이 있으면 output이 있어야 합니다. 그 받은 귀한 사랑을 서로 나누고 돕고 섬기는 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사람과의 만남 없이 하나님만을 만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없이 사람만 만나도 안됩니다. 둘 다 만나야 합니다. 교회는 이 두 만남의 터전입니다. 이 두 만남이 활발하게 일어나야 교회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만 추구해서도 안 되고, 사람과의 만남만 추구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가 교회답고 신자의 삶이 교회 안에서 잘 성숙하려면 이 두 만남이 모두 있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성장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 ‘함께 자라가는 터전’입니다.

한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의 가장 큰 소망과 기쁨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함께 하는 이들이 자라는 것입니다. 삶이 변하는 모습을 볼 때 큰 감사가 있습니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자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부부간에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함께하는 성도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볼 때 큰 기쁨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랄 수 있습니까? 저절로 자라면 좋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합니다. 바울은 그래서 말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10절) 성장하고 자라나기 위해 언제든지 그리스도와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든지, 잠을 자든지, 이생에서든, 저생에서든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의 목적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면 자라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우십시오'(11절, 새번역) 이것이 바울이 알려주는 성도의 자람(성장)의 원칙입니다. 사랑은 받은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표출되어야 합니다. 받은 사랑이 표출되고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는 애씀이 있을 때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즉 바울은 성장은 함께할 때, 격려할 때, 세워줄 때 일어난다고 가르쳐 줍니다.

1. 자람(성장)의 원리: 함께
피차, 서로, 함께 이 모두 너무나 귀한 말입니다. 함께라는 단어 속에 성장의 key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함께, 서로, 더불어’ 단어가 계속 나옵니다. 서로 돕고, 서로 짐을 지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나누고, 서로 기도하고.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함께, 서로, 더불어 받은 사랑을 나누고 짐을 나눔은 우리를 아름답게 성장시켜 줍니다. 혼자 한다는 자기 중심성을 버리십시오. 서로 함께하고, 서로 격려하며 짐을 나누십시오. 사람은 사랑을 받으면 자라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느끼는 분들이 더 크게 성도들을 껴안고 격려해 줘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나도 성장하며 사랑을 받은 교우들도 함께 성장합니다.

2. 자람(성장)의 원리: 격려
신앙은 서로 격려할 때 자라납니다. 성장이 촉진되는 것입니다. 비난은 퇴보를 일으킵니다. 받은 사랑을 나누어 살려면 격려가 있어야 합니다. 격려는 응원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일, 그 사람 속에 있는 잠재력을 발견하고 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응원을 많이 받는 이도 복 받은 사람이고, 응원해 주는 이들도 복 받은 이들입니다. 이런 응원과 격려는 신앙인들을 성숙하고 자라나게 해 줍니다.

격려와 아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아부는 아쉬울 때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격려는 내가 아닌 너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아부는 거래가 될 수 있지만, 격려는 응원입니다. 격려는 삶에 큰 영향을 줍니다. 지금은 서툴러 보여도 그 속에 있는 잠재력을 보고 응원해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보시고자 하시는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격려하라고 합니다. ‘격려, 칭찬, 인정’은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성도는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격려가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녀노소 모두 격려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격려가 많은지? 흠잡을 때가 많은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많은 이들이 함께 모이는 곳입니다. 교회는 ‘격려의 터전’이 돼야 합니다. 사람을 살려야 하고, 자라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기를 꺾어 버리는 터전이면 어떡합니까? 교회는 어머니의 품과 같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아부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격려는 어떤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서로 더 많은 격려함으로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3. 자람(성장)의 원리: 세움
덕을 세운다는 것은 사람을 깎아 내리지 않고 세워준다(build)는 뜻입니다. 신앙은 서로 세워 줄 때 자랍니다. 사람은 세워줄 때 살아나고 성장합니다. 개를 훈련할 때도 칭찬해주고 인정해 주면서 하나하나 훈련해 나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움 받은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서로 세워주고 격려해 줘야 합니다. 이 세워줌의 원리는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한국 문화의 단점 중 하나는 잘하는 이들을 깎아 내리려는 것입니다. 내가 못 먹는 것은 남도 같이 못 먹기를 바랍니다. 이런 마음을 품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사건건 깎아내리고자 하면 어떡하겠습니까? 주님을 중심으로 연합한 지체들로 모였으면 서로 격려하고 세워줘야 합니다. 교회공동체에서 깎아내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됩니다.

12절부터 14절까지 보게 되면 이런 불행한 일을 막게 하는 바울의 통찰이 나옵니다. 함께하고, 격려하며 세움이 있으려면 1. 내가 자라야 하고(12.13절), 2. 다른 이들의 성장을 도우라(14절)는 것입니다.

1. 내가 자라야 한다(자기 자람. 12.13절)
자신의 신앙 성장을 위해 어떤 고민을 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신앙의 성장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지도자 얘기를 꺼냅니다. 각 개개인의 신앙 성장을 위해 교회 지도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입니다. 12절. 13절 잘 보시기 바랍니다.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수고하며,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지도하고 훈계하는 이들을 알아보십시오. 그들이 하는 일을 생각해서 사랑으로 그들을 극진히 존경하십시오. 여러분은 서로 화목하게 지내십시오’

어떤 말씀이 보이십니까? 잊고 있는 성장의 원칙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터전에서 자라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역할이 큰데 그 지도자를 알아보고, 존경하고, 지도자와 화목할 때 자랄 수 있습니다. 지도자와 어긋나면 신앙도 어긋나기 때문에 일단은 지도자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존경하고, 지도자와 화목 하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바울의 권면입니다.

교회 지도자란 누구입니까? 지위만 가졌다고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말 들어 보셨습니까? ‘목사라고 다 목사냐? 목사다워야 목사지’, ’집사라고 다 집사냐? 집사다워야 집사지’ 12절에 보면 지도자의 자격이 나옵니다. 어떤 이가 지도자입니까! 사람들 가운데서 수고하고, 그들을 지도하고, 훈계하는 사람입니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이 지도자고, 잘못된 길로 갈 때 쓴소리를 해서라도 바른길로 이끌어 주는 이가 지도자입니다.

쉬운 일 아닙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는 이런 수고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목사도 있고, 수고하는 이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자기 일도 아닌데, 밤과 낮으로 기도하면서 애를 쓰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정말 눈물 나게 감사할 일입니다. 이렇게 수고하는 이들을 인정하고, 그들의 사랑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런 말 하는 것 들어 보셨을 겁니다. ‘당신, 나한테 설교하는 거야’ 설교하지 말라는 겁니다. 매일 설교하는 저로서는 이런 말 들으면 상당히 당황스럽습니다. 도대체 설교를 어떻게 알고 있길래, 이런 말이 나오고 있는가?

신앙의 자람을 위해서는 지도자의 역할, 사역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가장 많은 지도는 설교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바른 설교를 해야 하고, 청중은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선포고 음성입니다. 마음에 맞으면 받고 아니면 뱉어내는 견해와 강의가 아닙니다. 설교는 메시지이기에, 들은 메시지에 대한 결단이 필요한 겁니다. ‘주님. 제가 해보겠습니다’ 말씀을 허투루 듣지 않고 품으려는 마음은 여러분들의 신앙 성장에 대단히 유익합니다.

매 주일 선포되는 말씀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필요한 말씀이라 생각되면 적어 놓으시고 누군가와 깨달은 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말씀에 내 것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격려하라는 말씀을 들었다면, ‘격려 좋지. 필요하지’ 이러고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격려하라고. 그럼 누구를 격려하지. 내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 누구지. 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2. 다른 이의 성장을 도우라(14절)
14절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 게 오래 참으십시오’ 중요한 성장의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장은 나만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이들과 함께해야 됩니다. 무질서한 사람, 마음 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 있으면 모른척하지 말고 벗어 날 수 있도록 격려하며 세워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도 자라게 됩니다.

나와 너무나 다른, 다양한 이들과 함께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바울이 하는 말이 뭡니까?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참음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 아닌 너에게는 다 참아야 합니다. 다 아실 겁니다. 나도 빨리 안 변하고, 너도 빨리 안 변합니다. 오래 참고, 기다려 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인내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들어 줄 겁니다.

교회는 부족한 자들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자라, 성숙해져 가는 곳입니다. 들풀 교회 안에 이런 귀한 자람이 있도록 힘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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