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새 길을 여는 사람(요1:19~23)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요1:19-23)
지난주는 참 추웠습니다. 지금 겨울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습니다. 양파는 추운 겨울 한파에 매운맛이 제대로 든다고 합니다. 우리도 양파처럼 이 한파에 사랑의 맛, 은혜의 맛이 제대로 들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새길을 여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 들으시면서 새길 열고자 하는 각오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지난주 우리는 ‘Walking man’이란 조각을 보고 말씀도 나눴습니다. 계속 워킹맨처럼 앞을 향해 걷고 넘어져도 일어나 다시 걷다 보면 길이 만들어집니다. 지금 깜깜해서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게 될 것이고, 없던 길도 만들어질 것입니다. 처음부터 있던 길은 없습니다. 루쉰의 말대로 잡초 투성이의 길을 누군가 걷다 보면 그 뒤로 뒤따르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 사람들이 많아지면 큰 길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꾸준히 걷는 희생과 헌신의 걸음이 새길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워킹맨의 의미는 대단합니다.
없던 길, 새 길을 새로이 만들고 헤쳐 나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계산이 빠르며 계산기를 두드리는 이해 타산적 사고에 길든 사림들은 이 새길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 개척의 새 길은 무언가 각오하는 사람만이 만들 수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손해 보지 않는 쪽, 고생하지 않는 쪽으로의 선택을 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모두 살기 힘들기에 본능적으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자체가 내게 이득을 주고 내가 편하고 손해 보지 않고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쪽으로 치우침은 반성해야 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계산을 못 하는 사람은 무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귀한 가치인 사랑, 희생, 섬김, 헌신 등의 가치들은 계산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 중 아주 중요하고 귀한 가치들은 이익과 손해라는 가치 판단을 넘어서는 것들입니다.
그래프를 보여 드립니다. 수직축의 양 끝에는 ‘이익, 손해’라는 가치가 있습니다. 수평축의 양 끝에는 ‘옳음, 그름’의 가치가 있습니다. 각각의 구간을 1,2,3,4 로 나눌 수 있고, 그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이 그래프가 중요한 이유는 선택의 요소에 계산만 있으면 안 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결혼 상대를 결정할 때도 내게 이익일까? 손해일까? 만을 고려합니다. 교회를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 기준을 적용합니다. 영적인 문제까지 손익을 따지는 판단 기준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선택의 90% 이상은 손익을 판단 기준으로 해서 내려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우리가 새해를 출발하면서 가져야 할 선택 기준 중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의 기준- 도덕성, 영성, 윤리성-을 힘들더라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을 할 때 가장 좋은 선택은 1번일 것입니다. 이익도 주고 도덕적 신앙적으로 옳은 선택입니다. 여러분 모두 새해 1번의 선택이 있기를 바랍니다. 최악의 선택은 4번입니다. 이 선택은 손해도 보고 윤리적, 영적으로 잘못된 선택입니다. 손해만 보고 하나님의 뜻에도 어긋나고. 4번의 선택은 피하십시오.
문제는 2번과 3번 선택입니다. 2번 선택은 이익은 보지만 도덕적 영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안 맞는 선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선택을 많이 합니다. 열심히 살지만, 상대방을 속이기도 하고, 사기도 치면서 이익을 얻어내고 있습니다. 우려스러운 것은 우리도 은연중에 2번의 선택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할 수 없지’라는 합리화로 말이지요. 이익을 보기 때문입니다. 고민을 하기는 하지만 포기는 못 합니다.
3번 선택은 손해는 보지만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옳은 선택입니다. 이 선택을 하게 되면 사람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각오와 결단이 필요한 이타적인 선택입니다. 삶의 뜻과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우리는 오늘 ‘새길을 여는 사람’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새 길은 이 3번을 선택하는 사람들로 인해 만들어집니다. 이 길은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손해 보더라도 희생이 있더라도 택하는 길,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어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길 이 만들어지고 열립니다. 오늘 본문 23절의 ‘광야의 소리’가 3번의 선택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사는 삶의 소리가 ‘광야의 소리’입니다. 이 광야의 소리를 내는 자들이 걷는 길은 섬김과 희생의 길입니다.
광야가 상징하는 것은 ‘힘듦’입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을 향해 외칩니다. 요한은 신분상 광야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아론 제사장 가문, 최고 가문 출신입니다. 그런 신분을 가진 그가 편함과 이익을 마다하고, 광야에 나가 손해 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사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서 고생하는 요한의 ‘광야의 소리’를 외치는 자들입니다. 이 세례 요한의 삶은 계산만 하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삶입니다.
19절에서 유대인들은 요한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제사장과 레위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냅니다. ‘당신이 메시아냐’, ’당신이 엘리야냐?’, ‘당신이 그 선지자냐?'(그 선지자란 보통은 모세를 의미합니다) 요한이 출세를 지향하는 기회주의자였다면 ‘예’ 했을 것입니다. 이들의 관심을 이용하여 출세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모든 질문에 ‘아니요’라고 대답합니다.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1:23) 라고 소개합니다. 나는 메시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모세도 아니며 다만 내 뒤에 오실 분(주님)을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라 합니다.
우리는 유혹을 받습니다. 주위에서 띄워주려고 하면 눈 한번 질끔 감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선택을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단호히 유혹을 뿌리칩니다. 새 길을 만드는 자의 소명을 감당하려면 요한처럼 해야 합니다. 자신을 희생해야 새길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요한은 3번 선택을 한 것입니다. 오늘 이 3번의 선택을 마음에 잘 담으시기 바랍니다. 이 3번의 선택은 많은 이들이 꺼리는 선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입니다. 세례요한의 후예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해야 하는 삶의 길입니다.
우리는 2번 선택을 하기가 쉽습니다. 영의 눈은 감고 육의 눈으로 사는 세상 사람들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잘못된 선택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선택은 잘못된 선택입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빈 선택입니다. 하나님을 동원한 이익 추구에 몰두하는 잘못된 영성으로 우리는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돌이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길 내면 좋겠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손해를 봐도 계산 안 하고 묵묵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며 묵묵히 워킹맨처럼 앞을 향해 꾸준히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이 길을 걷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질수록 안 보이던 하나님의 새 길은 만들어지고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길은 어떠합니까? 1번 선택으로 이익도 생기고 하나님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으면 가장 좋은 축복의 길입니다. 길이 막혔습니까? 왜 막혔는지 영적으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길을 만드는 사람은 ‘광야’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영의 사람들이 새 길을 만들 수 있습니다.
좋은 결과가 이루어지기 위해 누군가의 숨은 헌신과 희생과 섬김이 필요할 때, 내 가족을 위해, 내 교회를 위해, 내가 사는 이 사회를 위해 내가 그런 자리에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들이 내 주위 가족과 이웃을 위해 세례요한이 되어 짐을 지고, 섬기며, 희생하는 선택을 할 때 새 길은 만들어집니다. 새 길은 절대 공짜로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은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축복 속에서 이 길을 걸어가시는 한 해 되시기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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