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음이 자각될 때.

20151103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뢰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창17:17~18)

약속을 그렇게 받고도
웃고 있는 아브라함을 보면
김수영의 탄식이 생각납니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부분)

정작 큰소리칠 사람한테는 아무 소리 못 하고
기름 덩어리 많이 주는 만만한
설렁탕집 여주인에게나 큰소리치고 있는
자신의 작음을 본 것이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브라함은
여기서 이렇게 웃으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그의 웃음은
자신의 작음을 보여주는
궁색(窮塞)한 웃음일 뿐입니다.

약속 없이 살던 사람들과 함께 살다
그들의 당연함에
너무 길들여졌던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스며든
익숙함은 편안을 주지만
조심할 필요도 있다는 거 다 아실 겁니다.

알을 깨고 나오려면
힘겨워도
낯섦을 받아들 일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혹여, 부끄러운
자신의 작음이 자각될 때가 있거든
방치(放置,내버려 둠)하지 말고
잘못 길들여져 있는 건 없는지
꼭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무르익는 삶이 선물같이 다가올 겁니다.

새길 가는
오늘 하루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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