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보의 시대에 읽는 십계명(출20:1~17)
1.십계명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받는 장면 지금 보고 있습니다. 율법은 애굽 땅에서 노예로 살던 이들에게 자유를 선물한 하나님께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갈 사람들에게 주신 당부의 말씀, 삶의 지침입니다. 여러 말씀을 하시는데 그 중에 가장 골격이 되는 말씀이 열가지의 계명, 십계명입니다.
(1)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 숭배하지 말라.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을 어떤 상으로 만들어서 예배하지 말라.
(3)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헛되게, 의미없게) 부르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하지 말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대단하게 보이십니까? 아니면 겨우 이 정도야. 별거 없네. 이렇게 보이십니까? 어떻게 보는 사람들이 더 많을까요? 아쉽지만 별거 없이 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십계명은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시대착오적이고 유치해 보이는 고대의 유물 정도로 볼 때가 많은데 과연 그런가? 정말 유치한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신자들은 무시하지 말고 물어봐야 합니다.
진리가 단순하듯,단순한 십계명 안에 시대와 개인의 문제를 푸는 키(key)가 나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2.자세
십계명을 대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습게 보고, 하찮게 보면 십계명은 유명무실, 의미가 없게 됩니다.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자세는 십계명을 대할 때 기꺼이 응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말씀에 대한 응답의 책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자세는 간절함입니다. 응답의 책임과 간절함. 십계명을 대할 때 가져야 하는 중요한 자세입니다. 이 자세가 없으면 십계명은 있으나 마나가 되버립니다.
(1) 응답의 책임
첫 번째 자세는 응답의 책임입니다. ‘주님 말씀하셨기에 책임을 갖고 응답하겠습니다’. 이런 자세가 있을 때 십계명이 살아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이런 계명이 필요했을까? 물을 때 계명의 뜻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응답의 책임이 필요한 이유는 십계명을 보면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은 조건문이 아닙니다. 조건문은 이럴때는 이렇게 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하고. 상황과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게 조건문인데, 십계명은 조건문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형식은 두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라. 하지 말라’. 조건이 붙지 않습니다. 해야 할 것은 어떤 상황, 어떤 장소, 어떤 사람이라도 해야 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리하면 하지 않고, 유리하면 하는게 아니라 하지말라 하셨기에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타협의 대상으로 주시지 않고, 정언 명령, 절대적인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명령에 책임을 갖고 응답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손 번쩍 들고 ‘내가 하겠습니다’. 이게 책임있는 응답의 모습인데, 십계명을 대하는 모습이 이래야 됩니다. 사람들이 거침없이 거짓을 말할 때 손 번쩍 들고, ‘주님, 저는 안하겠습니다’.이런 자세가 중요합니다.
십계명을 보면 4계명과 5계명의 ‘하라’는 명령 빼고 나머지 8개 명령은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살인하지마, 간음하지마. 거짓말하지마’. 이런 명령에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살인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으면 그걸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겉으로는 ‘하지 말라’지만‘하지 말라’의 명령 속에는 ‘하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에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라는 명령이 들어 있고,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에는 간음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니라 부부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 아름답고 복된 가정으로 만들라고 하는 적극적인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책임있는 응답은 십계명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알고 반응하는 응답입니다. 이런 응답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십계명, 많이 묵상하고,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손 번쩍들고 응답한 계명 하나 하나가 모여 삶을 치유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줄 것입니다.
(2) 간절함
이처럼 십계명을 대할 때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십계명을 대하는 두 번째 자세는 ‘간절함’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워 십계명의 수신자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나’라고 하는 의식을 가지고 십계명 가운데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못하고 있는 게 무엇언지 고쳐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간절함을 가지고 십계명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간절해야 하는 이유는 계명 안에 나를 살리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가상의 세계가 아닙니다. 하루하루 땅에 발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아내고, 겪어 내야 하는 리얼리티의 세계입니다. 우상이 넘쳐나고, 쾌락이 넘쳐 납니다. 거짓과 살인과 탐욕이 하늘을 찌릅니다. 이런 현실과 현장에 십계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삶이 간절하다면 십계명도 간절해야 합니다. 실패하면 삶이 무너지기에 실패하면 안됩니다.
3.퇴보의 해법
오늘 말씀 제목에 보면 ‘퇴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퇴보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뒷걸음치는 것입니다.수준이 떨어지고, 가져야 할 모습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영적 퇴보든 사회의 퇴보든 퇴보에는 윤리의 퇴보가 있고, 윤리의 퇴보는 영적인 퇴보와 톱니 바퀴처럼 맞물려 있습니다.
솔제니친이 1983년 템플턴 상을 받을 때 한 연설 가지고 왔는데 들어 보십시다. ‘만일 내가 오늘 약 6천만 명의 우리 국민들을 삼켰던 파괴적인 혁명의 주요 원인을 가급적 간략하게 구성하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 버린 것이 바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이유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만일 내가 여기서 전체 20세기의 주요 특성을 밝혀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다시금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그 이유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고 간결한 답변을 발견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찮은 존재로 축소시키고 우리를 핵무기에 의한 죽음과 재래식 무기에 의한 죽음 직전으로 데려온 지난 두 세기의 그릇된 희망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경솔하게 그리고 자신있게 버렸던 하나님의 따뜻한 손을 결연하게 추구하라고 제안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할 때에만 이 불행한 20세기의 과오들에 대해 우리의 눈이 열릴 수 있고, 우리 무리가 이 과오들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향할 수 있다’
하나님을 잊어 버리는 순간, 세상과 개인은 퇴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라 말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라지면 신앙은 퇴보하고 퇴보한 신앙은 더러운 오물로 가득차게 됩니다. 죽임, 쾌락, 거짓, 탐욕이 득세합니다. 그러면서도 합리화합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은 퇴보의 시대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 남의 얘기 아닙니다. 한번 뒤져 보세요. 우상이 있나 없나. 우리 시대가 마음 다해 부모를 공경하는 시대입니까? 살인하지 말라했지만 죽임과 죽음으로 가득차 있지 않습니까? 말로 죽이고, 폭탄으로 죽이고. 진실보다 많은 게 거짓이고, 음란과 쾌락이 안 퍼진곳이 없습니다. 진보가 아니고 퇴보입니다.
이래도 십계명이 시대 착오적이고, 유치하게 보이십니까? 하나님이 정언의 절대 명령으로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시대가 흘러도 나올 수 밖에 없는 문제이기에 ‘하지 말라’, ‘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이 정도는 다 안다. 말하지 마십시다. 여전히 나의 문제고, 세상의 문제입니다. 그냥 두면 안됩니다. 십계명은 필요하고, 지켜야 합니다.
제방에 작은 구멍이 났습니다. 지나가던 한 사람이 그냥 두면 안될 것 같아 누가 시키지도 않았은데 돌을 갖다 구멍을 메웠습니다. 마을에 큰 비가 왔지만 제방과 마을 모두 피해 하나 없이 건재했습니다. 알지 못하는 그 이가 구멍을 메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이름하여 ‘칭송받지 못한 영웅’입니다. 진짜 영웅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영웅입니다.
간절함을 가지고 십계명의 삶에 응답하는 ‘칭송받지 못하는 영웅’들이 많아 질 때 무너지는 둑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영웅 되십시오. 십계명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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