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 산의 여호와이레'(창22:9~14)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그런 명령을 내리십니다. 2절(창12:2) 말씀에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번제로 드려라 하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시험
번제는 태우는 제사입니다. 이제 태우기 전에 일단 숨을 끊어야 되고, 칼로 그 다음에 가죽을 벗겨야 되고, 또 뼈를 각을 뜨는 것입니다. 부위별로 다 절단해서 분류를 시키고 그런 다음에 불러 태우는 것이 번제입니다. 그러니까 철저한 소멸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번제’인데요, 이것을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는 이것은 참 끔찍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만약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오늘 나에게 그런 명령이 주어진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아멘, 네. 라고 대답할 사람은 소수라고 생각이 듭니다. 저 같아도 순종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버럭 화부터 낼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실 일이 없다 하는 이제 그런 이야기를 할 것이고, 혹 하나님이 정말 그런 명령을 했다면 그런 하나님은 안 믿어도 되겠다. 이렇게 이제 반응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말씀을 대할 때 보여주는 전형적인 그런 태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말씀을 들을 때는 그 말씀에 대해서 의심하고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믿음이 있다면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너무나 참 충격적인 그런 말씀이지만, 왜?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까? 하는 이런 것을 가지고 고민을 하게 될 것이고, 만약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이 하나님의 감춰진 뜻을 계획을 기대하면서 순응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명령을 내리신 이유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글은 아브라함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시험인 줄 몰랐습니다. 우리는 이제 알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것은 이 명령을 아브라함이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보시려고,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주신 명령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시험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건설적인 시험, 건설적인 목적 뭔가를 건설하려고 하는 그런 목적을 가진 시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험의 목적은 훈련하는 것이고, 연단하는 것이고, 그래서 때로 이제 이것이 고난의 형태로 성도들에게 올지라도 성도를 견디게 하고, 또 단단하게 하고, 또 정결하게 하고, 결국은 이 시험을 통해서 연단을 받아서 믿음이 부쩍 성장해지는 그런 목적을 가진 건설적인 시험이 있는데 이건 유익하죠. 그리고 이런 시험의 출제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끔 시험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런 얘기를 1장 2절에도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이런 건설적인 목적을 가진 시험은 비록 그것이 고난의 형태로 올지라도 기쁘게 여기고 또 당연히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한 가지는 파괴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하나는 건설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파괴를 위한 목적의 시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유혹이라는 그런 단어로 번역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아담과 하와에게 뱀이 나타나서 하와에게 뱀이 제안한 것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어라 하는 그러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하는 이것은 일종의 유혹입니다.
이 유혹에, 결국 인류는 사망의 저주 아래로 빠뜨려 파괴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험의 출제자는 마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분명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그랬는데요 그러니까 시험이라는 단어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악한 목적에 파괴적인 어떤 목적을 가진 이런 시험을 하나님 절대 하지 않으시고 14절(약1:14) 말씀에도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유혹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서 미혹됨이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유혹은 바로 사탄이 주는 것이고, 유혹은 무서운 점이 있습니다.
앞에 얘기한 시험과 유혹의 차이점 있는데요, 시험은 뭔가 불합리해 보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번제로 바쳐라. 이것은 얼마나 참 불합리하게 여겨지고 언뜻 동의하기가 힘들고 참 힘든 것입니다. 하지만 시험은 유익한 것입니다. 결국은 그런데 유혹은 그럴 듯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게 되면 좋을 것 같고, 또 그럴 듯한 어떤 그런 생각을 가지게끔 하는 것이 유혹이 무서운 점입니다. 우리를 파괴하는 덫인 유혹이 뭔가 나쁜 것이고, 해로운 것처럼 여겨진다면 절대 안 빠질 것입니다. 그런데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그럴 듯해 보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이유가 그럴 듯해 보였기 때문에 넘어 갔습니다.
창세기 3장 6절에 보니까 여자가 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본즉 너무 해로워 보였고 먹으면 토할 것 같고, 한 입 깨물리면 죽을 것 같이 이렇게 보인 게 아닙니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저거 한 입 탁 먹기만 하면 하나님처럼 될 것 같은 마음이 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유혹의 무서운 점이라는 것입니다.우리를 미혹하는 것들이 대개는 그렇게 과장이 돼서, 위장이 돼서, 오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가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런 유혹을 만날 때는 유혹을 만날 때는 36계주행랑이 상책이다. 그래서 시험은 견뎌야 되고 싸워야 되고 유혹은 도망가야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만나게 된 시험은 첫 번째 건설적인 시험에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출제자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시험하신 이것은 건설적인 시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실행하실 때는 반드시 분명한 목적이 있을 때 시험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유혹과 시험의 차이점을 또 이렇게 구분하기도 합니다. 유혹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등장한다고 그럽니다. 왜냐하면 시험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좀 더 업그레이드 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한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시험이기 때문에, 그 때에 거기에 맞는 시험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들을 바치라는 오해를 살 만한 이 시험을 그때 아브라함에게 시행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단서가 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2절 말씀에 보시면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냥 이삭이라고 안 하시고 앞에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죽여라. 그러니깐 그냥 이삭을 죽여라, 그러지 않고 앞에 네 아들, 네가 사랑하는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네 아들을 죽여라 는 말씀입니다. 거기에 이제 뭔가 좀 단서가 있는 것입니다.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살 때 얻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사라)는 그때 나이가 90살이었습니다. 100살에 얻고, 90살에 이렇게 낳았으므로, 그 아들(이삭)이 귀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네가 그 귀한 존재를 버릴 수 있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시험인 것입니다. 우선순위의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해야 됩니다. 그것이 비록 너무나 귀한 자녀 일지라도, 하나님을 우선 선택해야 됩니다. 지금 그것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자녀도 충분히 우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어떤 우선순위의 문제가 될 때는 자녀라도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2. 순종하는 아브라함
이러한 하나님의 시험(명령)에,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요? 3절 말씀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나귀의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갔다 그랬습니다. 말없이 순종한 대단한 믿음입니다.
아침 일찍이 주저함이 없이 하나님의 그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 아들을 죽이기 위해서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약 75km), 3일 길을 아들을 죽이기 위해서 말없이 떠나가는 아브라함의 모습,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본래 그런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주저 없이 아들을 바칠 만한 그런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런 하나님의 명령 앞에 말없이 주저 없이, 거리낌 없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이와 같은 시험이 오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성장시키기 위해서 주는 것인데요, 이미 그 수준에 올라가 있으면 그 시험은 오지 않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떠나긴 했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괴로웠을 것이고 그리고 온갖 생각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 3일 길을 걸어가면서 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러시지? 나한테 무엇을 말씀하시지?’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을 했을 것입니다.그러니까 3일 길을 찬송가를 부르면서 힘 있게 걸어가기 보다는, 가기 싫은 그 걸음을 괴로워하면서 걸어가면서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부단히 묵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습니까? 왜 아들을 죽여야만 됩니까? 하나님 이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셨어요? 인신제사는 원래 가증하다고 여기시는 분 아니셨어요? 왜? 이런 명령을 하십니까?’
이런 이해되지 못하는 불합리해 보이는 이런 어떤 시험에 대해서 계속 물었을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3일 길이 그렇게 지나가면서 그의 묵상이 점점 깊어지고 어떤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은 언제나 그러셨지. 때로는 내가 모르는 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었어도 지나놓고 보면 하나님은 늘 나에게 좋은 것을 주셨던 분이야. 지금은 순종할 때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어야지.’
그(아브라함)는 하나님에 대한 그런 결론을 그가 내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너무 이삭을 낳고 기르면서 하나님한테 소홀한 것이 있지는 않았는가?’ 하는 그런 회개도 드렸을 것이고, 믿음을 가지고 그런 회개를 하고, 어떤 그 3일 길을 그렇게 걸어갔을 것입니다.
사실, 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언제 성장했냐면, 이 3일 동안에 걸어가면서 그의 믿음이 더 깊어지고 성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 문제를 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생의 그 문제를 풀어가는 그 과정 속에 사실은 성장하는 것이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고난의 시간을 두시는 이유는, 그 고난 속에서 끊임없이 묵상하고,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 신앙이 성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그 모리아 산으로 가는 3일 길이 그의 그 문제를 풀어가는 그러면서 신앙이 성장하는 그런 과정이었던 것이고 그래서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올라갔을 때는 더 이상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단호하게 그 칼을 자식을 죽이기 위해서 목을 찌를 수도 있는 것이고, 단숨에 심장을 찌를 수도 있는 것이고, 그 칼을 단호하게 내리꽂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아침 일찍 명령을 듣자마자 떠나서 3일 지났는데, 그냥 바로 꽂았으니까 전혀 주저함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그거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 3일 동안에 얼마나 그가 기도드렸을 것이며,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다졌을 것이며, 그리고 그 결론으로 그는 그 말씀에 순종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오히려 다급해가지고 아브라함을 붙잡으십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 모리아산의 여호와이레
12절 말씀에,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멘.
지금 아브라함의 믿음은 절정에 올라간 것입니다 이미 그 시험은 성공한 것입니다. 이삭으로 인해서, 100세에 낳았던 그 사랑하는 아들 때문에 하나님께 소홀했던 그런 부분들이 믿음의 영역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이제는 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선명해진 것입니다. 성장한 것입니다. “최고의 믿음은 아끼지 않는 것,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아까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진짜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경외의 내용이 네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는 것을 볼 때에 알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이 원하실 때 하나님께 아끼지 않는 우리 여러분들 믿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위해서는 우리가 아낄 것이 없습니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8장 32절 말씀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보내주셨고,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위해서 아껴서는 안 됩니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치른 시험은 합격이고 이 시험에서 아브라함이 체득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다는 ‘여호와 이레’입니다.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이 체득한 것은 그 때로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라도 그것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미리 앞장서셔서 좋은 것을 준비하실 것이라고 하는 이 믿음이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믿음입니다.
모리아 산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순종과 믿음이 돋보이는 그런 성지입니다. 그래서 기록에 의하면 이 모리아 산은 솔로몬이 성전(역대하 3:1)을 세웠던 터가 그게 모리아 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윗 시대에 그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던 오르난의 타작마당(역대상 21:18~30)이 있는 곳이 바로 이 모리아 산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교회의 매우 중요한 성지, 지금은 무슬림 쪽에서 또 차지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 모리아 산은 우리가 기억해야 될 그런 성지이고, 또 이 아브라함의 그 순종의 그 행위가 있었고 또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진 그런 성지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좋은 것들을 얻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인해서 여호와 이레의 은혜를 늘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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