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8.20. 주일 설교: 시날 평지에 쌓은 탑(창11:1~9). 유형주 목사

 

“시날 평지에 쌓은 탑” (창세기 11장 1~9절)

오늘 우리가 보는 내용은, 대홍수를 겪고 인류가 ‘시날’이라고 하는 평지에서, ‘바벨’이라고 하는 도시를 건설하고, 또 거기서 높은 탑을 쌓는 소위 바벨탑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먼저 이 시날 평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입니다. 이 메소포타미아라고 하는 지역은 두 강 사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유브라데스 강하고 티그리스 강하고, 그 사이에 이렇게 흘러 내려옵니다. 두 강 사이, 중간에 이렇게 가까워지면서 거기 ‘바벨’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이렇게 열리면서 그 페르시아 만 쪽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이곳이 시날 평지에서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평가를 받는 곳이 수메르 문명입니다. 황하 문명, 인더스 문명, 문명들과 함께 이 수메르 문명을 이제 최고로 꼽는다고 합니다. 시날 평지에서 수메르 문명이 꽃을 피운 그런 곳입니다. 또 시날 평지 아래쪽은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가 있는 그런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시날 평지는 건축에 필요한 석재를 구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산이 있어야 이제 깎아내면서 돌도 캐내고 그러는데요, 여기는 산이 없었기 때문에 석재가 없었습니다.

오늘 3절 말씀에 보시면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그 새로운 신소재가 건축의 재료로, 건축 기술이 새롭게 발달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술을 가지고 새로운 건축물들을 만들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이제 주로 이런 탑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이렇게 좁아지는 이런 탑을 건물을 세웠고, 이것이 지금도 그 유적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르’에는 ‘지구라트’ 라는 명칭의 건물이 있습니다. 지구라트는 높이 솟은 건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지구라트 유적이 지금도 그쪽 일대에서는 이렇게 많이 발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창세기의 기록에 대한 어떤 근거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그래서 이 노아의 후예들이 이 도시를 건설하고 높은 탑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탑을 쌓는 목적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4절에 보시면,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어떻게 하자 그랬습니다. 하늘에 닿게 하자. 우리 이름을 내자. 온 지면의 흩어짐을 면하자. 라고 이 탑을 쌓는 목적이 세 가지가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목적은 하늘에 닿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렇게 높은 곳을 올라가려고 하는 이유는 이것은 첫째로는 ‘호기심’ 때문입니다. 하늘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한 호기심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출발하지만, 나중에는 정복하려고 하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이 어떤 과학적인 기술 문명의 중요한 패턴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는지 보자!’ 이렇게 호기심에 이어서, 그 다음에 그것을 이제 정복해버리는 것이, 이것이 문명의 목적입니다.

예를 들면, 그런 것입니다. 유전자를 변형하였습니다. 그 유전자로 과학이 발달해가지고 그때 막 복제 동물을 만들고, 또 복제 인간을 만드려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과거에 있었습니다. 그때 기억이 나는 기사는 신의 창조 코드를 우리가 복제하였다는 기사였습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께서 천지를 혹은 창조주가 이 세상을 창조한 그 원리를 마치 발견한 것처럼, 복제 기술이 발달하였다는 그런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유발 하라리’ 라고 하는 인물이 <사피엔스>라고 하는 책으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제 이 유발 하라리는 그의 다음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인간은 이미 신이 됐다.’ 라는 주장을 하였고, 그것이 바로 ‘호모 데우스’ 라는 두 번째 책입니다. ‘호모 데우스’라는 말이 ‘인간 신’이라는 뜻입니다. 데우스는 신이고 호모는 인간이니까 그래서 ‘인간은 이미 신이 되었다.’ 라는 이야기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진화론자입니다. 유발 하라리의 이런 말은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고, 교만한 말입니다. 아무리 높아도 하늘에 닿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히말라야하고 백두산하고 어느 쪽이 높아 보입니까? 밑에서 위로 올려 보면, 히말라야 산이 높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위에서 내려다보면, 두 산(히말라야, 백두산) 모두, 그 산이 그 산 임 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토리 키 재기 입니다.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이 지금 입을 벌릴 정도로 발달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AI 등등 이런 것들이 있어서, 엄청난 그런 것들을 이루어내는 것 같고 위대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런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이 탑을 쌓는 이들의 첫 번째 목적이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그 의도가 불순한 것입니다. 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을 정복하고자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어떤 주권에 대한 어떤 도전으로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보시면, 하늘에 닿는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에 하늘에 닿았다는 그런 기록이 등장하는 성경 구절이 창세기 28장 12절에 보시면 나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본 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꿈에 등장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아무리 탑을 쌓아도 하늘에 닿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야곱처럼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 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이것이 하늘에 닿는 방법이고, 하늘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바람직한 태도이지, 어떤 자신의 힘으로 하늘에 닿아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을 내려오게 만들려고 하는 이런 시도는 매우 잘못된 인본주의적인 태도입니다.

기억합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탑을 쌓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배의 단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닥다리로 해서 하나님께 올라가는 자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두 번째 목적은 조금 더 노골적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내자 그랬습니다. 자기 이름을 내자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시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어떤 그 본질적인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매슬로우 라고 하는 그 심리학자가 인간의 욕구가 5단계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처음에 먹는 문제, 안전의 문제 이런 것들이 쭉 있습니다. 그리고 존경의 요구가 있고, 마지막이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사람에게는 먹고 살만 하면, 반드시 도전하는 것이 이름을 내려고 하는 어떤 그런 욕망이 강력하다고 매슬로우는 지적을 합니다.

역사 속에 권력자들이 정권을 잡고 권력이 강해지면 반드시 하는 일이 어떤 건축물을 남기는 거대한 건축물을 남겨서 역사 속에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하는 그런 일들을 무리하게 시행을 하였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것 때문에 추락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시날 평지에서 탑을 쌓았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탑을 쌓은 목적이 바로 그들의 이름을 내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을 참 조심해야 됩니다. 공명심이라고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공명심입니다. 그러니까 이 공명심은 ‘허영심’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이름은 있습니다. 반드시 가져야 될 이름입니다. 그것은 빌립보서 4장 3절에 한번 보시면 쓰여 있습니다.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클레멘트와 그 외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그래서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이름,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는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들의 이름은 생명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다 이렇게 적어주셨고, 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천군 천사들이 내려와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신다고 그랬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생명록에 기록된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5절 말씀에 보시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집니다.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책이 이름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감사하고 오직 우리의 이름보다 주의 이름을 높이고 자랑하고 전파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목적은 ‘흩어지지 말자!’ 입니다. 시날 평지, 광활한 땅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도시도 만들고 탑도 쌓고 오손도손 뭉쳐서 잘 살아보자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여 있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먼저 우리 홍수가 끝난 뒤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9장 1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 주시고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흩어져서 온 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이게 하나님 미션이고, 문화 명령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시작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이것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미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흩어져야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도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신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분명히 예수님께서도 흩어지라고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가 성령을 받고 난 뒤에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서로 유무상통하고 먹을 것을 나누고, 가진 재산을 나누고, 너무나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모습은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흩어집니다. 핍박을 통해서 흩어지게 만드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창11장)에서도, 도시를 건설하고 탑을 쌓고, 그럴 듯한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뜻을 역행했던 세 가지(하늘에 닿자, 우리의 이름을 내자, 흩어지지 말자) 이런 목적이 있었습니다. 시날 평지에서, 인류를 하나님이 흩어버리셨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흩으신 방법입니다.

7절 말씀에 보시면, 우리가(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전에는 언어가 하나여서, 다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혼잡하게 하다라는 뜻이 ‘바벨’이라는 것입니다. 9절 말씀에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결론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물어볼 것은 저와 여러분이 지금 무엇을 쌓고, 무엇을 남기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가에 대해서 한번 주는 질문이 이곳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려가셔서 허물어버리는, 그런 바벨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공력으로 인정해 주시고, 이런 것들을 우리가 쌓아가고 만들어가는 것이 참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작사 엘리자 H. 해밀턴, 작곡 아이라 D. 생키

아이라 데이빗 생키는 부흥사 무디와 함께 귀한 부흥사에게 찬양 인도를 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한 종입니다. 평생 1,200편 가량의 찬송가를 지었습니다. 스코틀랜드 대도시에서 부흥집회를 열었을 때입니다. 그 집회에 한 소녀가 나와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집 근처에 있는 교회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제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목사님 말씀하시기를, “이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너의 앞길을 인도해 주실 거야.” 그러니까 그 소녀가 “목사님! 저는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그러니까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모습 그대로 그냥 제 앞에 알아오기만 하면 주님이 너를 받아주시고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거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소녀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 뚝뚝 흘리면서 날 위해 죽으신 주님 내 모습 이대로 날 받아주세요. 이 간증이 부흥사 무디에게 전달되었고 부흥사 무디가 말씀을 전할 때 이 소녀가 구원받고 변화된 모습을 간증했습니다. 이 찬송가 많은 사람에게 불려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그 예수 믿은 소녀가 자기 집에서 하숙하던 구두 고치는 사람하고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 남편 분과 결혼하였는데요, 그 남편 분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라! 그래도 거절하고 거부하고 성경책을 읽으라고 갖다 주면 성경책을 찢어버리고 남편이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남편이 기관지염이 병이 깊어지고 병원에 입원하게 됐습니다.

그때에도 남편 분에게 계속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병중에 누워 있는 남편에게 와서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다음 그 찬송가 가사를 읽어줍니다. 날 위해 죽으신 주, 주님이 그대로 받아주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남편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런 말이 어디 있냐고 그랬습니다. 남편에게 안경을 가져다주니까, 그 찬송 가사를 보게 읽게 됩니다. 그 찬송 가사 중에서, 날 위해 죽으신 주 날 받아주소서. 그 말이 남편 눈에 탁 들어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남편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두 주일 후에 이분이 나 이제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집으로 돌아가야 되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가지고 날 위해 죽으신 주 날 받아주소서. 두 시간 동안 찬송을 반복하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고 천국에 갔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주님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이 우리를 그대로 받아줄 것입니다.찬송가 214장 (1절)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 하시사 날 받아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 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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