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8.13. 주일 설교: 소돔의 멸망(창19:24~29). 유형주 목사

 

소돔의 멸망(창19:24~29)

1592년은 어떤 해입니까? 1592년은 임진년이에요. 그래서 일본이 그 조선 땅을 침략해 들어온 그런 해가 임진년이죠. 임진왜란이 시작된 년도 입니다. 자, 그런데 이제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인데, 저 멀리 유럽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1592년에 그 파묻혔던, 1500년 동안 파묻혔던 도시가 발굴돼서, 그 표면 위에 오른 그런 때가 1592년입니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그 폼페이, 폼페이가 수로 공사를 위해서 땅을 파다가 이제 발견된 그 유적, 그 당시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A.D. 79년에 이 화산(베수비오 산)이 폭발해서, 그 당시 그 폼페이에 있던 인구가 2천 명이, 고온 열과 유독가스로 대부분 생명을 또 잃게 됐고, 도시 전체는 이제 이 화산재로 다 덮었습니다. 1500년이 지나서 그 수로 공사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인부들이 파다가 이 유적을 발견해서, 그 속살을 드러낸 이런 것이 1592년이고, 그 뒤부터 계속해서 발굴 하는데요, 지금도 발굴 중이라고 이제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 그 발굴된 기록에 의하면, 이 폼페이라고 하는 도시는 당시 그 로마의 귀족층들, 부요한 사람들이 휴양지로 즐겨 와서 사용했던 곳이랍니다. 그래서 그 해안가에 있는 도시였다고 합니다. 위락 시설, 위락 문화가 많이 발달했음을 이렇게 엿볼 수가 있어서 혹자는 이 너무나 부패하고 타락해서 하나님의 진노로, 도시가 멸망했다 이렇게 평가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가 돼서, 이탈리아에 가면 한번 꼭 찾아가 보는 그런 장소이기도 합니다.

1. 소돔과 고모라
성경에도 폼페이처럼, 사라진 도시가 등장하는데요, 바로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자 이 소돔도 원래는 이제 전설 속의 도시로 여겨져 왔는데, 미국의 한 대학교에 그 발굴팀이 이 소돔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그 발견합니다. 그래서 발굴 절차를 거치면서, 이제 사람들이 대부분 이 성경에 기록된 소돔이 실제 한 도시였다라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추세이기도 합니다. 이 소돔으로 예측되는 위치는 사해, 그래서 이 사해에서 또 그 동쪽 부분의 맨 위가 이제 소돔으로 추정하고 있고, 그 밑이 이제 고모라이고, 그리고 그 밑이 세 번째가 소알 성입니다. 그래서 이 세(3) 도시가 연거푸 이렇게 이어져 있는 것으로 추측은 하는데요,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지금은 없는 바로 이 도시가 소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발굴팀의 대표인 스티븐 콜린스 박사님은 이 소돔의 멸망 이유를 지진으로 이렇게 추정합니다. ‘지진 때문에 사라졌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또 다른 교수님은 유성 충돌에 따른 고온 발생으로 불타버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그 별이 지구상 위에서 부딪혔는데, 너무 그 지구 근처에서 부딪혔기 때문에 그 지구가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 고온 열이 발생함으로 인해서 멸망했다. 이런 주장을 하는데요, 이것은 성경의 기록을 좀 연관시키려고 하는 그런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24절 오늘 말씀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동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절 말씀에 이어서, 다 엎어 멸하셨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종말의 샘플을 두 가지 이 사건을 예를 드시잖아요. 대표적인 것이, 첫째가 노아의 물 심판입니다. 노아의 물로, 심판한 것이 첫 번째이고, 그 다음에 두 번째가 소돔의 불 심판입니다.그래서 그 물과 불로 인해서 그 망한 이런 기록을 각각 가지고 있습니다. 자, 이 소돔의 멸망은 창세기 18장, 19장 두(2)개 장에 걸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비중이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 소돔의 멸망 사건, 소돔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뭘 말해주는가 하니, 그것은 그 소돔이 멸망할 때, 그곳에 살던 롯의 가족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 이제 이야기를 읽는 관점입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노아의 가정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가 성경의 관심이거든요. 성경은 구원의 역사이기 때문에요 그리고 소돔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다른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 롯의 가정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그것을 우리가 중점으로 보아야 됩니다. 롯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과 삼촌하고 조카의 관계입니다. 고향 우르를 떠날 때부터 롯은 같이 동행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서 머물고, 또 거기에서 이제 가나안 땅으로 올 때까지 같이 동행 했던 아주 어찌 보면 아브라함이 아들처럼 여겼던 조카 롯입니다. 이미 롯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이제 그 롯을 아들처럼 여기는 그 조카가 롯인데요, 가나안 땅에 정착했는데, 그 지점이 ‘벧엘’ 쯤이라는 곳이 이릅니다. 벧엘과 아이 사이로 이렇게 나오는데요, 거기가 어디냐면, 예루살렘 왼쪽에 약간 위쪽에 있는 지점이 그곳이 벧엘 입니다.
그곳에서 이제 롯도 장성을 해서 자기 소유 재산이 있는데, 재산이 아브라함과 겹치다 보니까, 같이 살기에는 불편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갈라서게 되는데요, 이때 롯이 선택해서 떠난 곳이 바로 요단 동쪽의 소돔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2. 롯의 선택

창세기 13장 12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거주했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장막을 옮겨서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그러니까 그쪽에서 보면 동쪽이죠. 그러니까 동쪽으로 해서 쭉 가다가 이제 그 사해에 바로 인접해 있는 소돔에 머물게 됐는데 이 소돔이 아주 기름진 땅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제 롯이 좋다고 생각하는 땅을 선택했는데요, 좋아 보였어요. 그런데 문제는 뭡니까? 소돔이 아주 그 기름진 땅으로 보였는데, 이곳이 죄악으로 가득 찬 곳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문명이 발달할수록, 그 죄의 어둠은 짙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살수록, 사람은 자꾸 죄악을 추구하는 것인데요, 이 소돔에 대표적으로 발달한 죄악이 뭐냐 하면 ‘동성애’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동성애에 관련해서 얘기할 때는 이 소돔을 빼놓을 수가 없고, 그래서 소돔이라는 소돔에다가 와이 자를 붙여서 형용격으로 만들면 Sodomy 입니다. 소돔과 같은 그런 뜻인데요, 이 단어가 아주 그 성적으로 타락한 이런 의미를 이제 담고 있는 그런 어떤 대명사가 된 땅이 소돔이었습니다. 이런 곳은 살만한 곳이 아닙니다. 선택해서 갔더라도 당장 그곳을 나와야 됩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헤브론을 선택합니다. 창세기 13장 18절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장막을 옮겼어요. 아브라함도 그러니까 벧엘과 아이 쪽에서, 어디로 옮겼냐 하면은 남쪽으로 좀 내려왔어요. 그래서 헤브론에서 정착을 했다. 헤브론에서 정착하고 거기서 여호와를 위해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벧엘 이라는 곳은 야곱이 돌 배개를 베고 잤던 곳인데요, 그 밑에 있는 이 헤브론에 아브라함이 그 정착했고,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예배하는 이런 사람이 되었는데요, 이 헤브론은 그 이후로 유대인들의 성지가 되는 곳입니다. 나중에, 다윗이 자신의 어떤 왕국을 일구어 가는데, 제일 먼저 기지로 삼았던 곳이 헤브론입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왕이 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헤브론에서 정착을 하게 됩니다.

이 롯이 선택하였던 소동과 고모라의 죄악은 점점 심해졌어요. 하나님은 그 땅을 멸망하시기로 결정하십니다. 그러나 롯의 가정은 구원하기로 하셨고, 이제 천사들을 보내서 이끌어내십니다.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데, 그런데 이 롯의 태도가 약간 이상합니다. 15절 말씀에 보시면 동틀 때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이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하고서 빨리 도망가자 하고 천사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16절에 그러나 롯이 어떻게 했어요? 지체했다. 아주 심각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롯이 떠나는 것을 지체했습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이 성이 곧 불로 확 뒤집혀 져서 망하게 생겼는데요, 지금이라도 가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이고 무서워라.’ 하고서 빨리 도망쳐 나와야 됩니다. 그런데 롯은 지체하였습니다. 도대체 좀 이상한 장면입니다.

이 지체하는 이유를 저는 두 가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첫째로 이것은 ‘롯의 안일함이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이 천사가 와서 끄집어내기 전만 해도 그 전날 어떤 사건이 일어납니까? 손님으로 온 분들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와서 끄집어내라고 합니다. 그래서 관계한다, 상관한다고 그랬는데요, 그것은 동성애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끄집어내라 그랬더니, 이 롯이 이 사람들 말고 우리 딸들을 내 보내주면 어떻겠느냐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롯이 하는 행동이나 오고 가는 말이 여러분! 비정상적이고, 너무나 이상한 장면입니다.

그런 엄청난 일을 우리가 볼 때는 겪었음에도 이 롯이 사실은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말도 안 되는 얘기, 이게 어떻게 그렇게 마을 주민들이 찾아와서 그 손님을 끄집어내서 그렇게 하겠다든지, 아니면 거기에 대해서 내 딸을 대신 주면 어떻게 하겠다라든지, 이런 오고 가는 대화들이 말도 안 되는 그런 이야기인데요, 문제는 이 롯은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이 소돔에서는 이런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 속에서 롯의 양심이 무뎌졌을 것이고, 며칠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고 어제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요, 설마 오늘 무슨 일이 있겠는가? 싶은 이런 어떤 그 롯의 안일한 판단, 이것이 롯을 지체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중요한 일에 뒤로 미루고, 또 지체하는 이유는 다 안일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정말 시급한 일이고 당장 해야될 일이고 너무나 중요한 일인데, 내일 해야되겠다 다음 날 내일 모레 해야되겠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다 아니라면서 나오는 결정입니다. 이런 매우 심각한 중차대한 상황에서도 롯은 안일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롯을 지체하게 만든 이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소돔에 대한 미련을 꼽을 수 있습니다.지금까지 살던 곳을 그냥 떠나라고 하시니까, 어느 곳에 잘 지어놓고 신도시에다가 다 장만해 놓은 다음에 그걸로 가자고. 그랬었다면 좀 안심하고 떠났을 텐데요, 그냥 무작정 와서 그냥 살던 집에서 빠져나가자. 그러니까 이게 쉽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종말의 진정한 모습은 그런 거거든요. 아주 긴급한 것이고 너무나 중요한 생명을 걸고 있는 그런 것들인데, 머뭇거릴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종말의 특징이라는 거예요.
근데 이 롯이 지금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닮아가야 될 믿음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미련 없이, 죄악의 땅에서, 떠나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에서 떠납니다.

근데 지금 그것을 보고 자란 롯은 못합니다. 롯은 소돔에 있으면서 영적인 감각이 많이 무디어 진 것입니다. 롯의 이런 태도는 어떻게 작용을 하냐 하면, 가족 전체의 구원에 부정적으로 작용을 합니다. 어떻습니까? 그의 아내는 못 빠져나왔죠. 다 데리고 나와야 되는데요, 아내가 못 빠져나왔어요(26절). 두 번째 사위는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14절).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지금 긴급하지 않았습니다. 긴급하지 않은데, 도망가자고 사위들 데리고 얘기할 때, 뭐라 그랬겠어요. 야 혹시라도 불에 이 땅이 불타서 다 망할 수도 있을지 모르니까 혹 나가보는 게 어떻겠니? 뭐, 이 정도로 얘기 안 했겠어요? 정말 그런 거에 대해서 본인이 진정성을 느끼고 시급함을 느꼈다면 그냥 사위들을 묶어서라도 끌고 나가야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사위들을 비난할 게 아니라, 롯의 기본적인 태도에서 이런 발생 된 문제다 이런 생각이 들고,

여러분! 그런 면에서 노아하고 비교가 됩니다. 노아의 리더십, 100년이 넘은 기간 동안 여덟(8) 명의 가족을 꽁꽁 하나로 묶어서 그 산 위에서 배를 만드는 이것은 리더십이 없으면 힘듭니다. 산 위에 가족들을 묶어서 종말을 대비하는 이런 태도는 노아의 정말 중요한 믿음입니다. 노아의 리더십 입니다. 자, 어찌 보면은 오늘 이 롯의 모습은 세상에 붙들려 사는 오늘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다 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그것을 끄집어내면 지체하니까 끄집어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원의 중요한 원리를 두 가지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구원은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라는 것’입니다. 롯의 모습이 좀 못마땅해 보이긴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어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입니다. 그리고 은혜입니다… 16절에 한번 보세요. 16절에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천사들이 그 사람들이 천사들이 손을 잡아서 성 밖에 두었다 그랬습니다. 근데 이게 여호와의 자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구원받는 자리로 예배하는 자리로 이렇게 인도하여서 이렇게 두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인 은혜구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하나님 이끌어 구원의 은총을 있게 하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고 마땅히 찬양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구원은 시급한 것입니다. 구원은 늘 급한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받는 데 있어서 안일함과 또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구원은 항상 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끄집어낼 때는 항상 급한 거예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종말은 늘 갑작스럽게 오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종말에 대한 비유를 말할 때, 도적 같이 임한다고 하셨습니다. 건강도, 재물도, 한순간입니다. 지금 시급한 것은 구원을 누려야 됩니다. 우리 마지막으로 이 롯의 구원의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 하나 있어요. 여러분! 롯의 구원을 얘기할 때 우리가 반드시 짚어야 되는 부분이 뭘까?

3. 아브라함의 기도

아브라함의 기도죠. 아브라함의 기도가 중요합니다.노아의 때는 이제 이런 부분이 등장하지 않는데, 롯의 경우에는 아브라함의 기도가 18장에 아주 길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하나님께 던집니다. 18장 2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이 아브라함의 생각은 지금 소돔에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는 의로운 백성들이 있는데요, 왜 의인들을 같이 멸하시려고 합니까? 하는 이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중요한 질문입니다. 18장 26절에 보면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 의인 50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10명까지 내려가잖아요. 소돔 땅에 10명이라도 의인이 그걸 찾으은 그들을 위해서 이 지역을 용서할 것이다. 여러분 여기 중요한 교훈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세상이 유지되는 것은 소수의 의인들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세상이 변화될 가능성 때문에 하나님이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의인들이 있다면, 그 의인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다려주시는 것이 이 성을 용서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 소망이 되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는 뭐냐 하면, 우리는 이 도시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 아브라함의 존재인데, 이 구절이 그 말씀에 우리 한번 29절을 한번 보시면 아주 중요한 표현을 하나 등장합니다. 29절에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롯을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롯은 누구 때문에 구원받았어요? 롯은 하나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아브라함 때문에 롯이 구원받았다라고 얘기하면 안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구원의 어떤 채널 그 역사를 기도하는 그 옆에서 기도해주는 사람의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누군가의 기도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기도드렸기 때문에 그 사람의 기도를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 삼촌을 가지고 있는 롯은 행복하잖아요. 그런 부모를 가진 자녀들은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하고 또한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는 아브라함과 같은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 결론이에요. 종말과 구원은 임박한 실존이다. 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종말은 임박했다. 이미 도끼자루가 나무에 놓여 있다라는 것입니다. 종말은 이미 시작이 됐습니다. 그리고 구원도 그러므로 임박한 그런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종말이 임하든 전혀 어색할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나 감사한 것은 구원도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이 늘 깨어서 하나님으로 인해서 종말을 준비하고 또 하나님으로 인해서 구원의 온전함 즐거움을 누리는 우리 저와 여러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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