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16. 주일 설교: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슥4:6~9). 유형주 목사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 (스가랴 4장 6~9절)

제가 본 영화 中에 <인턴> (2015년)이라고 하는 그 영화가 있습니다. 2015년도에 개봉됐고 남녀 주인공들이 아주 유명합니다. 로보트 드니로는 영화배우는 유명해서 잘 아실 것이고, 저 여성(앤 해디웨이)도 아주 유명한 여배우입니다. 이 영화 속에서 남자 주인공(벤)은 65세에 퇴직을 합니다. 다니던 회사에 은퇴를 하고, 70세에 새로운 회사에 인턴 직원으로 채용이 됩니다. 이것은 ‘노인 일자리 사업의 일환’으로 채용이 된 것입니다. 아주 규모가 있고 유명한 회사에 채용이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연령 제한이 되는 그런 사람이지만, 이제 기업이 이런 사회 공헌을 한다고 그래서 노인 일자리 사업으로 채용이 됩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회사는 그에게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못 믿어온 거죠. 그래서 아침마다 정장을 넥타이를 하고서 거울을 보면서 출근을 하지만, 회사에 가면 하루 종일 자리만 지키다가 퇴근을 하는 이런 자리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월급날 월급은 받아도 힘이 빠지는 거 일 할 맛이 안 나고, 월급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일하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벤(로보트 드니로)이 좀 낙심하고 좀 힘이 빠지는 이런 장면이지만,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격려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이렇게 자기에게 얘기를 합니다. ‘레스 메이키 해픈’(Let‘s Make happen) 뭐라도 해보자!

맡겨주는 일이 없고 사람들이 없는 사람 취급하고 그래도 내가 주저앉을 수는 없고,뭐라도 해서 어떤 무언가 일이 일어나도록 만들자! 그래서 ‘벤’은 일을 찾아서 가요. 회사 사무실 안에서 자그만 일들이지만, 그리고 이 분은 이미 한 회사에서 65세까지 일(근무)했고, 임원까지 올라갔던 그런 분입니다. 그런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소소한 일들을 찾아가면서 하나씩 이렇게 그 기조에 뭐가 있는 거라면, 뭐라도 해보자 이렇게 그러면서 이제 차츰 그 회사 동료들이 이 벤을 좋아합니다. 또 그 영화의 중반부에 보면,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그 회사에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물론 영화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많은 분들이 퇴직을 하고, 이제 시달리는 것이 사회적 역할을 찾지 못해서 우울한 분들이 참 많다는 사실입니다. 직장에 있을 때는 그래도 소리도 내고, 많은 일들도 했지만, 퇴직하고 나면, 그런 어떤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역할을 찾지 못함으로 인해서 스스로 낙심하고 또 무너지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요, 이런 분들에게 참 그 권할 만한 좋은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뭐라도 하면 무언가 일이 일어나게 돼 있습니다. 신앙은 특별히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살아계시고 또 하나님이 일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그 하나님을 우리가 만날 수 없습니다. 어눌한 그런 기도의 언어로, 또 익숙하지 않은 그런 기도의 자세를 가지고 있더라도 기도를 하면 그런 것을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찬양도 마찬가지예요. 주님께 찬양을 드리실 때, 입을 열어 찬양을 드려야 그 멜로디가 우리를 움직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못해요 하고 주저앉기보다는 좀 세련되지 못한 말이라도 예수님, 복음을 증거 할 때 언제 어딘가에서 열매 맺어질 그런 씨앗이 뿌려지면서 뭔가 일이 일어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저는 이 레스 메이크 해픈(Let’s make happen) 뭐라도 좀 해보자!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을지라도, 뭐라도 해보자! 하는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성전을 짓기 시작했지만, 기초만 놓은 채 성전 건축이 중단이 됩니다. 그리고 대신 그들은 자신의 집을 짓고 밭을 경작하는 일에 매달리게 됩니다. 아마 그들 가운데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래, 이제 넘어진 김에 쉬었다 가자’ 혹은 오히려 잘 됐다고 쉽지 않은 일인데, 폐허가 된 그 땅에 건축을 하려니 얼마나 힘듭니까? 아이고, 좀 잘 됐다. 멈춘 김에 좀 푹 쉬었다 가자 이런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유대인들이 성전을 가지지 못하면, 더 이상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의 삶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성전입니다. 성전에서 번제가 들여지고, 수많은 양, 염소, 송아지 이런 제물들이 드려집니다. 유대인들의 삶의 어떤 중심부에 위치한 성전에서 이러한 제물을 태우는 그 연기와 또 피를 뿌리고 이런 것이 그 속에서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때로는 복을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야단을 쳐주시기도 하고 이런 어떤 영적인 일들이 일어난 것이거든요. 그런데, 성전이 없는 유대인들은 더 이상 유대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럴 바에는 바벨론에 있는 것이 오히려 났습니다. 이방인의 삶으로서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70여 년 동안 정착이 된 바벨론에서 먹을 게 더 많고, 오히려 자리가 있는 것이지, 돌아오지 않은 것만 못하다 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성전 건축이 중단하고 16년이 흘러갔습니다. 완전히 주저앉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들을 독려해서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Let‘s make happen, 뭐라도 좀 해보자! 어떤 일이 좀 일어나도록 하자! 하고서 격려하는 것이 스가랴서 입니다. 스가랴는 특별히 8개의 환상, 8가지의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제시합니다. 비록 조금해 보이고 또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은 오히려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장차 그들이 누릴 성전의 비전 영광을 이 환상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1. 다섯 번째 환상
스가랴가 다섯(5) 번째로 본 환상은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에 모습입니다. 자, 이 그림이 이 환상이 스가랴 선지자가 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면 중앙에 있는 이 일곱이 ‘촛대’입니다. 등잔대, 순금으로 만든 이것을 그 ‘메노라’ 라고 합니다. “메노라” 이것은 유대인들의 중요한 상징입니다. 국가적인 다윗의 별과 더불어서 이 ‘메노라’는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상징물이고, 그 성소에 떡상 이라든지, 또 분향단과 더불어서 성소에 들어가서, 성소에 불을 밝히는 것이 이 등잔대 입니다. 그런 것은 늘 익숙한 것이지만, 다섯 번째 환상에서 특이한 것이 바로 그 좌우로 두 감람나무가 등장합니다.

빨간 화살표가 보이시죠. 그게 관입니다. 관을 통해서 그 감람나무, 정확하게는 올리브 나무라 입니다. 그래서 이 올리브 나무에 꽂아 가지고 거기서 이제 관을 통해서 올리브 유가 기름이 이렇게 그 등잔대에 기름이 놓이게 되면서 이제 불을 밝히는 이런 아주 특이한 그림(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스가랴는 이 환상을 보고서 천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이 두 감람나무는 무엇을 뜻합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천사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14절 말씀에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에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그래서 이 두 감람나무는 두 사람을 상징합니다. 두 명의 사람은, 정황상 보면 스가랴서 3장 여호수아(대제사장)하고, 스룹바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차 귀한 자, 그 귀한 그룹에 유대인들의 재건을 하는 그런 유대인들의 두 명의 지도자들, 투톱으로 이렇게 세워진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에 대한 환상이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앞장인 3장에는 여호수아의 문제를 다룹니다.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인데요,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여호수아의 옷을 벗기고 깨끗한 옷을 입히고 또 관을 씌워주심으로 인해서 이 무너진 여호수아의 권위를 세워주셨고,

오늘 함께 읽으신 4장 본문은, 스룹바벨에게 오늘 말씀이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스룹바벨이라고 하는 이름은 좀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그 뜻이 ‘바벨론의 씨’라는 뜻입니다. 바벨론의 후손이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바벨론 출신, 바벨론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벨론에서 출생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우리가 성경의 족보를 보면 이분은 왕족입니다. 유다의 정통, 후손입니다. 다윗의 혈통이고, 정확하게는 여호야긴 왕의 손자입니다. 유대의 마지막 왕이 시드기야 잖아요. 시드기야는 스무(20) 번째 왕인데, 그 앞에 이제 열아홉(19) 번째 왕이 여호야긴 왕인데요, 이분의 손자가 스룹바벨 입니다. 페르시아 정부가 유대 총독으로 임명을 해서, (1차 귀환 때) 돌아오게 됩니다. 성전 건축이 중단됨으로 인해서 스룹바벨의 리더십이 훼손됐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모든 중압감과, 이런 책임 화살이 스룹바벨에게 향하였을 것입니다.

성전 건축의 최종적인 중단의 책임은 이 스룹바벨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스룹바벨)도 지금 아주 낙심하고 그렇다고 다시 해보자고 한들 엄두도 안 나고 이렇게 지금 무너져 있는 스룹바벨을,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다시 해라. 해보자! 주저앉지 말고 성경 건축을 다시 해라 하고서 촉구를 합니다. 스룹바벨로서는 분명 자신이 없었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스룹바벨에게 힘을 실어주십니다.

2. 하나님의 약속
그래서 3장에서 여호수아에게 그런 일을 행하신 것처럼, 오늘 스룹바벨에게는 그 힘을 줄 수 있는 세 가지 약속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그가 아니라 누구라 우리가 받더라도 누구라 누가 받더라도 정말 힘이 날 수밖에 없는 그런 놀라운 말씀을 그에게 주시죠.

첫 번째 약속은 6절의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같이 한번 읽을까요)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아멘! 여러분! 이 말을 듣는 순간에 스룹바벨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어요.

누르고 있던 그런 근심, 두려움, 중압감, 이런 것들을 다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걱정 마, 내가 할 거야. 너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같이 할게. 그리고 네 힘으로, 네 능력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고 나의 영으로 될 수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걱정하지 마. 내가 할 거야. 하고서 들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만 일하신다는 의미가 아니고 너는 쉬어라 하는 말이 아니고 결국 ‘스룹바벨’이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자신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리더십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하심과 성령의 능력 주심을 따라서 일 한다 라고, 일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꾼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너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일종의 그것은 교만이고 불신입니다. 조그마한 근심이나 두려움은 기도하도록 우리를 자극하는 그런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지나친 근심과 두려움은 오히려 교회의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만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지, 내 능력으로 안 되는 것이지,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결코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는 말씀을 주십니다.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래서 하나님의 일처럼 쉬운 것이 참 없습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힘으로 되는 것 아니고 능으로 되는 것 아니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다시 한 번 우리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살아가고 일하시는 그런 우리 성도들이요, 일꾼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두 번째 약속의 말씀은 또 7절에 나옵니다. 7절 큰 산아 내가 무엇이냐 내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아멘! 큰 산이 평지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큰 산이 평지가 된 사건(역사)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이스라엘을 가로막고 있던 그래서 이스라엘을 절망케 두려워했던 홍해가 갈라지면서 거기에 길이 생겼습니다. 그 바다가 변해서 길이 되었습니다.그 견고한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이라고 하는 큰 산을 무너뜨렸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기독교 역사 속에, 성경의 역사 속에,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하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역사에는 이런 일들이 가득 채워진 것이 이것이 성경의 역사다 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어떻게 무너뜨렸습니까?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겠다고 했을 때, 모두 다 반대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서로(다윗과 골리앗은) 매치가 될 수 없는 상대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이라고 하는 큰 산을 이겼습니까? 그(다윗)는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고, 또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그런 분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이길 것이라고 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던 것이고, 결국은 골리앗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하나님의 승리이고, 동시에 다윗의 승리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승리는 다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심으로써, 만들어낸 열매요, 승리가 우리의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의 어떤 리더십으로 무언가를 해내서 이루어낸 일은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으십니까? 무신론적 철학자인 니체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비겁하다 약자다 틈만 나면 하나님 뒤로 숨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렇게 무력한 자들이 약자들이다 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을 절대 부끄러워해서도 안 되고, 그것이 약자도 아닙니다. 인생은 기본적으로 하나님 도와주지 않으면 살기 힘든 사람입니다. 아무리 자랑하고 자기 힘이 있고 권세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입지 아니하면 우리는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여러분! 바라기는 정말 이 일이 우리가 기대하고 소망하고 계획하는 일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있다면, 염려하고 두려워할 일이 아니고 도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일이 확실하다면 그런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일 아니고 도전해야 되는 것이고, 큰 산이 평지가 되는 기적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한 번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약속이에요. 9절 말씀 이런 말씀을 주셨어요. 스룹바벨의 손이 이 승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이것도 참 귀한 약속입니다 시작한 일을 마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도 복입니다. 우리가 그 축구 경기를 이제 보다 보면, 이 해설자들이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축구 경기를 이렇게 이 선수들을 평가하면서 뭐냐 하면은 좋은 공격수는 드리볼도 좋고 패스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골문 앞에서 마지막 슛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무리하지 않고 그 앞에 아무리 많은 기술을 가지고 가도 마무리를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툴지만 그래도 골대를 향해서 한번 차야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있고 좋은 공격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시작하면 반드시 마무리 짓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자, 여러분들 한번 물어봅시다. 책을 읽으시는데 재미없는 책은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들이 목사님이 추천하고 또 소문이 좋아가지고 책을 하나 샀어요. 책을 읽기 시작하였는데요, 한 10 페이지도 안 읽었는데, 재미가 없을 경우, 무언가 이렇게 감동도 없고 어떻게 하십니까? 보통 그때 대부분 그냥 그 책을 덮어버리죠. 저도 가끔 덮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이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책 아니라도 다른 읽을 책이 수두룩한데 하고서 덮어버립니다.

그런데, 어떤 독서가가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재미없는 책을 딱 읽으면 끝까지 읽으면서 그래도 한 구절은 괜찮은 게 있겠지 하고 끝날 때까지 읽는다는 것입니다. 한 구절은 괜찮은 말이 나오겠지 하고 이렇게 끝까지 하면 읽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끝까지 읽었는데도 한 구절도 눈에 안 들어온다면, 그러면 이제 뭐라고 끝을 내느냐 하면, 이 책은 재미없는 책이다. 이거는 절대 추천해줘서는 안 되는 책이다. 그것이 그 책을 읽은 보람이라는 것입니다.저는 참 그 말이, 공감됩니다. 최소한 그 분은 이 책은 재미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우리가 읽어보지 않고서 뭔 얘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중요한 건 무슨 일을 하든 마무리하는 끝마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스가랴 선지자 당시에, 16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멈춰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뒀으면 좋겠는데, 다시 그것을 끄집어내십니다. 왜냐하면 해야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때로는 멈춰버린 일인데요, 어떤 것은 그냥 멈춘 채로 사라질 때도 있지만, 어떤 일은 다시 하도록 하십니다.어떤 책은 멈췄다가도 반드시 다시 읽도록 하십니다.성경을 읽다가 레위기에서 그냥 걸려 넘어졌어요. 그냥 중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다시 읽도록 하십니다.

어떤 일은 다시 시작하도록 하십니다.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고 결국은 마무리하게 하시죠. 사도행전 20장 24절에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이, 바울을 위대하게 만들었던 정신입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려 함에는 내가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3절에 이렇게 지적합니다. 너희가 어리석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정말 믿음으로, 정말 신앙으로 시작했는데, 이렇게 지금 주저앉았으니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6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 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달려가는 이 길을 끝까지 달려 마치도록 우리와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다 마칠 수 있는 그런 일들을 체험할 수 있기를 우리 주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스룹바벨에게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다시 영화(인턴)로 한번 돌아와서, 이 로버트 드니로, 벤이 이제 인턴 지원을 하기 전에, 자기 이력서를 인터뷰하는 어떤 영상을 찍어서 보냅니다. 자기가 옛날에 회사 들어갈 때하고는 전혀 다르죠. 그래서 집에서 이렇게 딱 해가지고 카메라 앞에서 자기를 소개하는데, 자기를 써주십시오. 하면서 자기의 어떤 이력을 얘기하는데, 장점을 얘기합니다. ‘나는 충성됩니다. 내가 한 직장에서 오랫도록 정말 충성했습니다. 나는 믿을 만합니다. 성실합니다. 그리고 나는 위기에 강합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고 계세요. 마지막으로 가장 강점은 뭐냐면 내 능력이 필요할 겁니다. 나는 사회적 직장 경험이 너무나 풍부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게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한 가지 더 덧붙이는데 이제 이 장면이 아주 또 명대사 입니다. 내 안에 여전히 음악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 영화를 보는 사람은 그 대사가 아주 의미 있는 대사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얼마나 문학적입니까? 음악가는 은퇴를 안 한다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 이야기도 합니다. 음악가는 은퇴를 안 한다. 그 속에 음악이 여전히 떠오를 때까지는 근데 자기 속에도 그런 부를 노래가 여전히 있다 라고 합니다. 내가 70이 되었지만 남들은 은퇴하라. 그러고 들어오지 말라. 그러고 쉬라! 그러고 이제 그만하라! 그러지만은 내 속에는 여전히 부를 노래가 남아 있다. 음악이 있다 라고 하는 뮤직 인 미(Music in me) 그래서 내 안에 뮤직이 있다. 음악이 있다고 이 멘트가 저는 참 와 닿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비록 육신적으로 나이가 들고 은퇴했을지라도 우리 안에 성령께서 여전히 계시는 한 우리는 성령의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내 힘이 남아 있는 한, 내 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한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E.M 바운즈가 기도에 대한 책을 많이 쓰셨는데요, 그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든 노력은 나에게 있고,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는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일이 되어 지는 것은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모든 노력은 나에게 있고,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일하시는 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산도 평지로 변하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우리와 함께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용의 선교사님 (순회 선교단) 이라고 계십니다. 그 막내아들이 김선교 선교사님 입니다. 김용의 선교사님이 아들 2남 3년을 낳았는데요, 다 선교사가 되라고 마지막 아들한테는 이름까지 선교 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늦둥이 막내 이름을 ‘선교’라고 짓고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신앙 교육을 합니다. 성경 읽기로 한글을 가르치고 매일 아침 학교 가는 아이에게 말씀 묵상했니? 이렇게 물을 정도로 철저하게 신앙 교육을 했는데, 이 아이가 사춘기가 되니까 방황하기 시작하는데요, 이 아이가 중학생 2학년이 되고 나니까 애들과 어울려 싸움하고 애들 괴롭히고 담배도 피고 막 외박도 하고 사고를 치는 겁니다. 목사님, 선교사님의 자녀가 속 썩이면, 부모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과 함께 하나님 영광 가리게 될까 봐 더 고통이 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고, 저 아이의 죄 때문에 하나님 영광 가리면 어떡하나, 그런데 열일곱(17) 살 때는 고등학교를 자퇴해버렸습니다. 영적 방학을 계속 합니다. 밤에 가위에 늘리고 정신과 치료도 받고 신경 안정이라 수면제를 먹을 정도까지 됐습니다. 자살하려고 나무의 목을 매달려갔다가 다른 사람이 발견해서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10년 동안 그 아들(김선교)이 부모의 마음은 완전히 무너지고 또 무너지고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10년 후 주님께서 그 아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 김용의 선교사님의 막내아들, 김선교 선교사님이 <믿음은 전투다>라고 하는 책을 냈습니다. 아들 선교사님이 고백합니다. 그동안 내가 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답을 내게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주목하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답은 너무도 단순하고 명확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었습니다. 아무 소망이 없던 저는 이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함께 죽었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실 때 함께 예수 생명으로 부활했음을 믿음으로 붙들게 되었습니다. 아들 김선교 선교사님이 <믿음은 분투다>라는 책을 냈을 때, 아버지가 추천사를 썼습니다. 아버지의 추천사입니다.

젊은 날의 성장 통을 겪으며, 영혼의 내적 투쟁을 치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때론 안타깝고 조바심이 나는 때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 없이 염려하던 부모인 저희가 심히 부끄러워졌습니다. 운동의 날, 달리다가 넘어진 아들에게 보내는 응원처럼 일어나 다시 뛰어 괜찮아! 승리할 수 있어! 라고 목이 쉬도록 외치면서 함께 트랙을 끼고 돌며 두 팔을 휘두르던 흥분의 그 순간처럼, 그래 복음이면 충분하지. 예수면 다지. 라고 외쳐 봅니다.

주님의 손에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자녀의 문제도, 생활의 문제도, 가정의 문제도, 직장의 문제도, 사업의 문제도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만들어 주시고, 여러분의 자녀를 위한 하나님 일꾼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 같은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찬송가 ‘저 장미꽃 위에 이슬'(442장)을 지으신 분은 찰스 어스틴 마일즈라고 하는 분입니다. 이분이 1913년에 찬송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100년이 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 찬송에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가장 절친한 친구 아담 가이벨이라는 친구 있는데 아담 가이벨은 8살 때 눈병으로 눈이 먼 그러한 사람입니다. 아주 가깝게 지내는 친구였는데 아담 가이벨이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참 믿음으로 잘 길러 가지고 좋은 신랑을 만나서 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사위가 나가서 일하는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나서 사위가 죽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담 가이벨이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어찌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제가 저희 가정이 평생동안 주님을 잘 섬겼는데 어찌하여 나의 사랑하는 딸의 남편이, 나의 사위가 이렇게 불의의 사고로 죽을 수가 있습니까?” 아담 가이벨은 큰 슬픔에 잠겨서 찰스 어스틴 마일즈를 찾아갑니다. “이런 찬송 하나만 지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찰스 어스틴 마일즈가 “찬송을 지어줄게” 이렇게 말을 했겠죠? “희망을 잃고 힘없이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피곤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쉼을 주고, 죽음의 침상에서 평안의 베개처럼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찬송을 하나 지어주오.”

그래서 ‘그런 찬송을 지어야 하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날, 요한복음 20장을 펴서 읽다가 감동이 다가오는데 온몸이 전율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지는 것을 알고 울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데, 마치 자기가 서서 보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왔다가 다 갔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혼자 “우리 예수님 어디 갔지? 우리 예수님 어디 갔지?” 눈물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저쪽 뒤에 계시다 나타나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네. 당신이 우리 주님의 시체를 가지고 갔으면 내가 가져가겠습니다. 어디 옮겨 놓았습니까?”

예수님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그 음성을 듣고 마리아가 눈을 떠보니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오! 주님!” 하고 엎드린 그 감동적인 장면을 생각하면서 펜을 듭니다.(1절)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후렴)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주님께서 우리 일생을 동행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절대 절망하여 주저앉지 말고 외롭고 슬프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죽고 싶은 맘 들어도 주님 손 꼭 붙잡고 한평생 믿음의 전진해 나가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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