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7.24. 주일설교. 해질녘 요한일서 묵상 23: 영생을 살라(요일 5:13). 양은익 목사

 

영생을 살라(요일5:13)

1.
5:13절부터 21절까지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사도 요한의 애틋한 소망이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힘든 그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영생이 있다, 매 순간 담대하게 구하면서(기도) 살아라. 우상을 멀리하라’. 영생, 기도, 우상. 요한 사도가 마음을 담아 권면하는 세 단어입니다. 이 세 단어를 마음에 품고 풍파 많은 세상, 헤쳐 나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과연 그런가? 오늘과 다음 주까지 살펴 보면서 요한일서 묵상을 마감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영생을 묵상하겠습니다.  13절 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한이 말하는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이들이고, 이들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너희들에게 영생이 있다. 영생을 가진 자로 살아 이겨내라’.

‘영생’이라 했습니다. 우리 신앙의 가치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굉장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은 천양지차, 삶이 다르고, 죽음 이후가 다릅니다. 영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오늘 3가지를 묵상하겠습니다. 오늘의 묵상을 통해 영생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좋겠습니다.

2. 영생을 살라.
(1) 영생을 물으라.
첫번째 묵상은 ‘영생을 물으라’ 입니다.영생은 우리의 통념과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죽음 너머의 세상이기에 더 세심하게 물어야 합니다. 세심하게 묻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영생의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K.Barth가 기억하기를 원했던 두 단어가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와 메멘토 도미니(Memento domini, 주님을 기억하라)입니다. 사람들은 메멘토 모리는 합니다. 죽음까지는 마음에 품고 삽니다. 현명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는 없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나를 더 기억해야 합니다. ‘메멘토 도미니’. 주님을 기억하라. 주님을 기억하면 더 현명하게, 더 가치있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기억하라’는 말은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또 다른 미래, 하나님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신앙과 비신앙이 갈리는 지점입니다. 둘은 지향점이 다릅니다. 지향점이 다르기에 삶이 달라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메멘토 모리, 메멘토 도미니, 둘 다를 기억해야 됩니다. 메멘토 모리와 메멘토 도미니가 있을 때 ‘영생’이라는 현상과 현실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영생에 대해 많은 것을 물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물음은 영생의 유무일 것입니다. 영생이 정말 있는가? 종교적 상상인가? 어떤 쪽이 많겠습니까? 영생이 없다가 있다보다 많을 것입니다. 지금은 신앙의 시대가 아닙니다. 신앙의 시대가 아니기에 영생은 거부의 단어고, 관심밖의 단어가 되버린지 오래됐습니다.

영생을 세상에서도 잘 살고, 죽어서도 잘 살고 싶어하는 기독교인들의 욕망이라 합니다. 영생을 현실 도피 수단쯤으로 폄하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 입니다. 과학적으로 말이 안된다는 사고에 깊이 경도돼 있습니다. 영생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영생은 과학의 사건이 아니라 과학을 넘어선 신앙의 사건입니다. 13절의 말씀 처럼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만 가능한 영적인 사건입니다.

영생(永生)은 단어 그대로 생명(生命) 사건입니다. 생명은 과학을 넘어서는 사건입니다. 과학은 생명의 현상을 살필 수 있고, 약간의 개입을 할 수 있지만 생명 자체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탄생, 죽음, 영생은 전부 신위(神爲)의 사건이지 인위(人爲)의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생명(生命)은 ‘살라’(生)는 ‘명령’(命)입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죽음은 ‘돌아오라’는 소환 명령입니다. 역시 하나님이 하십니다. 영생(永生)은 부활하여 하나님과 연결되어 살라는 하나님의 구원이고, 선물입니다. 유전자를 조작하고, 생명의 신비에 근접해 간다고 자부하는 과학의 시대에도 신앙인들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 주저없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뇌가 없어서’도 아니고, 세뇌를 당해서도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1:1의 장엄한 선언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다시 오실 주님이 완성하실 종말의 구원을 신뢰하기에 영생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세상의 통념이 있음과 없음을 결정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많이 물어야 하고, 살펴봐야 합니다.

(2) 영생을 확신하라.
두번째 묵상은 ‘영생을 확신하라’ 입니다. 영생을 물어본 다음에는 확신해야 합니다. 확신은 물어본 자가 가지는 선한 결과입니다. 영생은 주저하는 것보다 확신 할수록 좋습니다. 확신이 깊어질수록 살아내는 삶의 질이 좋아집니다. 영생의 확신은 이미 주님께서 다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믿고 받으면 됩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의 선언이고, 주님의 도전입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신을 믿으라 하십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시간 너머의 영생을 믿고 확신하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요5:24에서도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생은 인간의 창작품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사람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사도들은 영생을 확신했고, 모든 이들이 자신들처럼 확신 가운데 살기를 원했습니다.

영생의 삶을 묘사하는 어거스틴의 글 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끝없이 보며, 싫증 없이 사랑하며, 피로함없이 찬양 할 것이다. 그 도성에서는 모든 시민에게 한결같은 자유의지가 있을 것이며 아무도 그 자유의지가 분열되지 않고 모든 악에서 해방되어 모든 선으로 충만하며 영원한 기쁨을 끊임없이 즐기며, 과거의 죄와 벌을 잊되, 해방된 것과 해방해 주신 분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을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쉬면서 보며, 보면서 사랑하며, 사랑하면서 찬양할 것이다’(하나님의 도성)

어거스틴의 확신입니다. 요한 사도도 똑같은 말을 들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쉴틈없는 그들 아닙니까? 사랑하기 힘든 그들이고, 찬양하기 힘든 그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쉬면서 보고, 보면서 사랑하고, 사랑하면서 찬양하는 영생의 삶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영생의 복된 삶이 있다. 이 삻을 확신하면서 살아내라’. 우리에게도 필요한 확신입니다. 주님 믿고 영생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됩니다.

(3) 영생을 누리라
감사한 것은 영생의 삶은 먼 미래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삶입니다. 요17:3 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소중한 영생의 정의입니다.

영생의 고정 관념이 시간인데, 요한은 시간을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영생을 관계로 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친밀하게 ‘아는 상태’가 영생입니다. 친밀하면 어떻게 합니까? 서로가 듣고 따르고 가까이 합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런 사귐 속에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도 가능하고, 새 하늘과 새땅에서도 가능합니다. 영생은 이미 시작된 미래의 삶입니다.

찬송436장 기억하십니까?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영생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영생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해같이 환하게 주와 함께 사는 삶, 영생입니다. 시작된 영생은 죽음 후에도 계속됩니다. 요한은 이러한 영생이 그들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묵상입니다. 영생을 누리라. 영생을 살라. 잘 묵상해서 영생이 주는 놀라운 은혜, 받아 내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살면 이길 수 있고, 견딜 수 있고, 의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영생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삶을 하나님과 깊은 사귐 속에서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처럼’ 살아내는 게 영생의 삶입니다.

들의 꽃을 보며 감탄하고, 꼬리 흔들며 다가오는 동네 강아지를 쫓아내지 않고 반겨 주는 마음이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음악을 듣고, 좋은 그림을 보면서 위로받고, 불의한 세상을 보면서 애통해 하고, 자신의 아픈 고통을 보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살고, 불안 많은 세상이지만 믿음으로 이겨내리라 마음 동여 맬 때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감사하고, 사랑을 나누고, 쓸데없는 화를 줄여 나가는 것이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영생을 더는 오해하지 마십시다. 영생은 생명없는 시간의 끝없는 지속이 아니라, 생명의 하나님과 교제하고 관계하는 영의 세계입니다. 이 땅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가장 복되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세 가지 묵상했습니다. 영생을 물으라, 영생을 확신하라. 영생을 누리라. 잘 묵상해서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 깊게 받기를 바랍니다. 자신과 타자, 모두에게 복된 삶을 선물하는 보람된 인생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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