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7일 주일 설교. 해질녘에 읽는 요한일서 묵상 22: 나는 증언하리라(요일5:5~12). 양은익 목사.

 

나는 증언하리라(요일5:5~12)

1.
증언은 한 사람의 증인이 자신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어떤 사실에 대해서 알려주고, 주장하는 행위입니다. 모든 역사와 사상과 신앙과 삶 속에 증언이 있습니다. 증언자들의 증언이 역사와 사상과 신앙을 존재하게 하는 힘입니다.

증언 속에는 대립이 있습니다. 증언을 신뢰해서 받아들이는 쪽도 있지만, 거부하고 불신하는 쪽도 있습니다. 증언을 수용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고, 증언 때문에 살기도 하고, 죽기도합니다. 증언 속에는 기쁨과 고통이 공존합니다. 증언이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이우걸 시인의 시 한 대목입니다.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기개가 대단합니다. 가혹하게 쳐도 물러서지 않고 꼿꼿이 서서 증언해 내겠다는것입니다. 시 제목이 ‘팽이’입니다. 여기서 팽이는 가혹한 매를 맞으면서도 끝끝내 물러서지 않고 무지개를 증언하는 증언자의 비유입니다.

오늘 제목 보십시오. ‘나’ 다음에 나오는 조사가 ‘나도’가 아니고 ‘나는’으로 되있습니다. ‘나도’과 ‘나는’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나도 증언하리라’는 다른 이들이 증언하듯 나도 증언하겠다는 것이고, ‘나는 증언하리라’는 다른 이들은 증언하지 않지만, 나는 하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증언은 하는 이가 많지 않기에 ‘나도’가 아니라 ‘나는’으로 하는 게 맞습니다. 하기 힘들지만, ‘나는 증언하겠다’. 오늘 아침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고백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사도행전 1:8. 승천 직전 주께서 하신 말씀 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기대입니다. 기대는 제자들이 ‘당신의 증인’되는 것입니다. 제자들만이 겠습니까? 제자들의 제자들인 우리들에게도 원하시는 기대고, 사명입니다. 증언은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증언,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두 가지를 묵상하겠습니다.

2. 나도 증언하리라.
(1) 증언 잘 받기(6~10절)
첫번째 묵상은 ‘증언 잘 받기’ 입니다. 증언은 진공상태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증언을 받아야 증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증언을 잘 받고(듣고) 있는가?’ 중요한 묵상입니다. 교회는 증언을 듣는 공동체고, 신자 역시 증언을 듣는 이들입니다. 증언이 들려질 때 교회다워지고, 신자다워집니다. 증언을 듣지 않으면 신앙의 의미는 퇴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이유는 세상을 이길 힘이 예수께 있기에 증언하는 것입니다. ‘내가 증언 할테니 너희도 잘 받아 승리하라’ 요한은 세 가지를 증거로 제시합니다. 7절, 8입니다.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성령과 물과 피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는 삼종 셋트라는 것입니다. 간단한 문장이지만, 신앙의 사활이 걸려있는 중대한 증언입니다. ‘성령이 예수를 증언한다. 십자가의 피가 예수를 증언한다. 물이 예수를 증언한다. 이 증언을 받아라. 받아 그 안에 있는 생명(11절)을 누려라’.

여기서 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물인 예언된 말씀으로 오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세가지를 전부 목격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제자로 주님에게서 직접 말씀을 들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는 피를 봤습니다.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습니다. 요한은 목격자고, 목격자이기에 거침없이 증언합니다.

재판에서 목격자의 증언이 확실할수록 이기는 것처럼, 증언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은 목격자의 진술입니다. 목격자의 진술은 목격하지 못한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신뢰가 있습니다.자신감도 있고, 무엇보다도 자세합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복음서를 신뢰하는 이유는 복음서가 수 많은 목격자들의 진술이기 때문입니다.

증언은 대립이기에 목격자의 진술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있습니다. 하지만 증언의 진실 여부는 개인의 주관이 아니라 역사가 밝혀 줍니다. 진실한 증언이라면 남을 것이고, 거짓된 증언이라면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실하고 신실한 목격자들이 많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목격자들만이 아닙니다. 그 목격자들의 증언을 받은 사람들, 그 증언의 증언을 받은 사람들, 성령의 증언을 받은 사람들이 보여 주는 삶의 변화와 아름다움을 어떤 삶과 비교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은 지금도 예수님의 증언을 받게 해서, 목격자들이 경험했던 동일한 경험을 하게 하십니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시고, 기도를 들으시고, 죄를 꾸짖으시고, 치유하시고, 용서하시고, 섬기게 하시고, 살아야 할 길과 방향을 알려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증언하는 물과 피와 성령의 증언 잘 받으십시다. 말씀 깊게 보고, 성령 충만하면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부활의 주님이 ‘야호, 이겼다’의 신나는 함성, 외치게 하실 것입니다.

(2) 증언 잘 하기(11~12절)
두번째 묵상은 ‘증언 잘하기’ 입니다. 당연한 묵상입니다. 받은 것으로 끝낼 수 없습니다. 받았다면 증언하는 자로 서야 합니다. 생명 받았는데, 받은 증언, 잘 전하고 있는가?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증언자들의 릴레이(이어달리기)입니다. 9절에 나온 것처럼 증언의 시작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을 사도들이 받았고, 사도들의 증언을 바울이 받았고 바울의 증언은 디모데와 디도와 초대 교회 성도들이 받았고, 초대교회 성도들의 증언은 중세 교회 성도들이 받았고, 그렇게 흘러흘러 고난의 땅인 한반도에 들어와 우리 부모들과 형제들과 친구들과 나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증언은 흐를 때 가치가 있습니다. 증언을 통해 받은 모든 것은 흘러야 됩니다. 사랑을 받았으면 사랑을 전하고,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전하고, 용서를 받았으면 용서를 전하고, 무지개를 받았으면 무지개를 전하고. 생명을 받았으면 생명을 전하는 게 증언의 존재 이유입니다. 재판에서 증언을 안하면 어떻게 됩니까? 선의의 피해자가 생깁니다. 똑같습니다. 생명의 증언을 받고 증언하지 않으면 생명의 삶을 살 기회를 빼앗는 것입니다.

증언은 해야 하고, 해야 한다면 잘해야 합니다. 증언의 요소가 말과 행동이기에 말과 행동을 잘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증언은 트럭 끌고 다니면서 예수 천당 외치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평범한 증언자들이 진실한 삶을 살아내는 것에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내 고백과 성품이 함께 할 때 증언이 일어납니다.

말과 행동, 둘 다 있어야 증언이 시작됩니다. 말만하면 말쟁이기 되고, 몸만 교회가면 예수쟁이가 됩니다. 말과 삶이 함께 갈 때 증언이 일어나고, 증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증언은 말로 하는 것이기에 증인의 말(언어)은 중요합니다. 말에는 겉과 속이 있는데, 겉의 말은 말의 표현이고, 속의 말은 말의 내용입니다. 겉의 말이 좋아야 속의 말도 받을 수 있기에, 증인은 표현과 말의 내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늘 마음에 둬야 합니다.

말의 표현은 거칠지 않아야 합니다.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은 우리가 쓸 말은 아닙니다. 말에 가시가 돋치면 숨어 있는 마음의 폭력성이 들어나기 때문에, 주님의 온유함을 배우는 우리에게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증언자의 말이 온유하고, 화평할 때 스펀지 물 먹듯, 증언이 가슴 깊게 스며들게 됩니다. 자신의 말이 어떤지 ‘묵상’해야 합니다.

증언의 두번째 요소는 행동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동은 드러나는 내 삶의 모습 전부입니다. 내 태도, 내 성품, 내 분위기 전부가 행동인데, 이런 모습 전부가 증언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뿜어내는 분위기가 나쁘면 증언은 중단됩니다.

11절,12절입니다.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증거입니까? 요17:3에 의하면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했습니다. 다시말하면 생명이신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인생이 됐다는 것입니다. 관계를 맺으니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예수를 아니 예수의 구원이 일어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가치 속에 살게 됩니다. 이 다른 거룩한 삶이 증언하는 자로 만들어 줍니다. 삶이 아름다우면 뭘 해도 증언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뭘 해도 막힙니다.

증언은 자신이 잘하는 것으로 하면됩니다. 증언은 장기(은사)자랑입니다. 논리적인 사람은 신학으로 증언하고, 웃기 잘하는 분으로 웃음으로 녹이면 됩니다. 눈물 많은 인생을 산 분은 눈물 가운데 함께 하신 주님을 증언하면 됩니다. 반찬 잘하는 분은 반찬으로 증언하고 등산 좋아하면 등산하면서 증언하고. 모든 것으로 증언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증언이 살아나야 가정과 교회와 이 땅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우리 모두는 증언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나는 증언하리라’. 생명을 전하는 복된 길에 서시는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