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 관리(요일 4:19-21)
1.
요한 사도는 사랑론의 마지막을 ‘위선’의 문제로 끝내고 있습니다. 20절은 위선입니다.‘하나님 사랑한다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하나님도, 형제도 사랑하지 않는 거짓이고, 위선이다’. 위선이라는 말을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르며, 척만하는 게 위선이라면 이 사람들의 사랑은 거짓이고, 위선일 수 밖에 없습니다.
위선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깝게 있습니다. 살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우리는 남의 위선에는 분노하고, 자기 위선은 합리화하면서 위선 합니다. 위선에 순기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위선하면, 그 위선으로 악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고지식하게 다 드러내면 좋을 게 없습니다. 그럼에도 위선은 위험하고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위선은 하나님과, 타자와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줍니다. 밝혀져도, 밝혀지지 않아도 부끄러운게 위선입니다. 그때는 몰라도 나중에 알게 됩니다.
위선은 품위를 갉아먹는 독입니다. 그대로 두면 안됩니다. 오늘 제목 처럼 관리해야 합니다.관리할 게 많으시겠지만, 위선도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위선을 어떻게 관리하는가? 어떻게 줄이는가? 오늘의 묵상입니다.
2. 위선 관리
(1) 위선을 싫어하라(20절)
위선을 싫어하기 바랍니다. 남의 위선뿐만 아니라 내 위선도 싫어해야 합니다. 많이 싫어하면 많이 줄어듭니다. ‘위선 없이 어떻게 살아? 위선 떨지마!’ 이러면 줄어들지 않습니다. 주님도 위선을 대단히 싫어했습니다. 선지자들, 바울, 사도 요한 전부 위선을 싫어했습니다. 우리도 싫어해야 합니다. 싫어해야 안합니다. 겉만 꾸미는 것, 말만 하는 것, 나만 옳고 너는 틀리다는 아시타비(我是他非), 내로남불, 속이는 것. 싫어하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렘17:9)이라 위선의 유혹은 강합니다. 위선으로 얻는게 많아도 맛들이면 안됩니다. 위선으로 얻는 이익, 쾌락, 권세, 인기, 추종자는 사상누각입니다. 시간과 양심과 하나님 앞에서 위선과 거짓은 드러납니다. 위선의 피해와 아픔은 고스란히 자신과 자신과 함께 한 이들의 몫으로 남게 됩니다. 목사의 위선은 목사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부의 고통입니다. 신자가 위선해서 위선의 딱지가 붙으면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것’처럼 교회가 우스워집니다.
빛이 어둠을 멀리하듯, 죄를 미워하듯, 구더기 피하듯, 위선을 피하고, 싫어해야 합니다. 위선과 실속 없는 꾸밈이 싫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 진실을 추구하라(21절)
위선 관리 두번째 묵상은 ‘진실을 추구하라’ 입니다. 싫어한 다음에 할 일입니다. 위선 대신 진실을 찾아야 합니다. 진실은 모호하지 않습니다. 21절 보십시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우리에게는 사랑만이 아니라 계명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어떤 것도 위선과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말씀과 뜻을 이룰 때 진실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도 진실, 비판도 진실, 기도도 진실, 믿음도 진실, 설교도 진실, 정치도 진실. 섬김도 진실, 일도, 말도 진실해야 합니다.
매일의 진실이 모여서 감동을 주고, 감동이 모여 위선의 유혹을 이겨냅니다. 위선은 빠르고, 진실은 느립니다. 하지만 위선보다 진실이 오래가고, 아름답고, 힘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한 주님의 비판(마23장)입니다.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다(3), 사람에게 보이려고만 한다(5), 높은 자리에 앉기 좋아한다(6),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버렸다(23), 잔과 접시는 깨끗히 하지만 속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찼다(25) 회칠한 무덤 처럼 겉은 깨끗한지 모르지만 그 안은 죽은 사람의 뼈와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다(27), 겉으로는 의롭게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28). 위선자들아,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진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실이 없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위선은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막는 나쁜 장애물입니다. 거짓과 겉치레에 속지 마십시다. 거짓을 진실처럼 말하는 사람을 골라내는 이가 현자(賢者)입니다. 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타고르의 기탄잘리(7)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내 노래는 모든 장식을 벗어 던졌습니다. 자랑할 만한 옷도 장신구도 이제는 걸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어떤 장식이라도 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아, 우리의 하나됨을 방해할지 모르니까요. 장신구의 짤랑이는 소리가 님의 속삭임을 지워 버릴지 모르니까요’
순수하게 진실하게 사랑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 이런 진실을 우리도 소망해야 합니다. 위선도 진실도 드러나게 됩니다. 힘들어도 위선을 거부하고, 진실을 추구하게 되면 위선과 거짓이 주지 못하는 귀한 것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3) 안으로 들어가라(19절)
위선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세 번째 묵상은 ‘안으로 들어가라’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내면적인’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잘 없어지지 않는 위선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길입니다.
위선은 외면과 겉과 보여 주는 것에 신경쓰다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본성입니다. 초라하게 보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겉을 신경쓰다 위선이 나오게 되는데 겉의 문제는 겉모습에서 해결되지 않고, 내 안에서, 내면에서 해결하는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위선자(hypocrites)라고 비판할 때 위선자는 겉만 꾸미는 사람, 외식(外飾)하는 사람들입니다. 마23:26절입니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안이 먼저입니다. 안을 보지 못하면 겉만 보게되고, 겉만 보는 자는 눈먼 자가 됩니다.
안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관문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먼저 찾아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겉보다는 안을 들여다 보게 되고, 위선은 줄어 들게 됩니다.
신앙은 자신 안에 있는 어둠을 보고, 어둠 너머에 있는 하늘의 빛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하구나, 도와주셔야 하는구나. 내 안에 죄가 많구나. 사랑이 없구나. 위선이 가득하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주님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해 주십시오’.
위선뿐만 아니라 사람답게, 신자답게 살려며 은혜가 필요하고, 주의 사랑이 필요하고, 주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 위선에서 자유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 부끄럽고, 부족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잘 관리해서 위선에 지지 않아야 합니다. 세가지 묵상했습니다. 위선을 싫어하자. 진실을 추구하자. 하나님 안으로 더 깊게 들어가자. 위선에 지지 않는 여러분의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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