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6. 주일 설교. 해질녘에 읽는 요한일서 묵상 7: 아름다운 遺書(요일2:1~6). 양은익 목사

 

해질녘에 읽는 요한일서 묵상 7: 아름다운 遺書(요일2:1~6)

1.
짧은 인생 살다 가지만 겪은 게 있기에 알려 주고 싶어서 남기는 사랑이 유언이고 유서입니다. 잘하고 잘 들으면, 하는사람, 듣는 사람 모두에게 유익을 주는 축복의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유언을 남기고 싶으십니까? 신자인 우리는 어떤 유언을 해야 합니까? 받는다면 어떤 유언을 받고 싶으십니까? 마음 다해 들으시겠습니까?

요한일서는 노인 사도 요한이 그의 영적인 자녀들에게 하는 유언과 같은 말씀, 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 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이 요한의 씀은 단순한 끄적거림이 아닙니다. 한자 한자 꾹꾹 눌러가면서 마음을 다해 써내려가는 90 노인의 유서입니다. 저는 그렇게 보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쓴다. 꼭 들으면 좋겠다’. 쓴다는 것은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이고, 기록으로 남겨서 가르쳐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 ‘쓴다’는 단어가 13번이 나오는데 2장에 11번이 몰려서 있습니다. 1.7.8.12.13절에 2번. 14절에 3번. 21절. 26절에 나옵니다. 쓰는 대상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1절. 나의 자녀들, 7절에는 사랑하는 자들, 12절. 자녀들(little children), 13절. 아비들, 청년들(young men). 14절. 아이들.(chrildren). 5:13절에 가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들입니다. 모두에게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아들에게도 쓰고, 며느리에게도 쓰고, 딸에게도 쓰고, 손주들에게도 쓰고, 함께했던 교우들에게도 쓰고. 함께 했던 한 사람, 한사람을 떠올리면서 요한은 쓰고 있습니다. 유서는 바람이고, 소원이고, 기대인데, 그 마음을 가지고 자신은 떠나지만, 남아 있는 자들의 복된 삶을 바라면서 마음 다해 쓰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간 사람의 남기는 말이 필요할까요? 저는 필요하다고 보는데 여러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김용택 시인의 시에 소리꾼 장사익 선생이 절절히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납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우리도 정말 그랬지요! ‘이게 아닌데’까지는 아는데 거기까지입니다. 그 이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봄 오고, 또 봄 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시인은 이런 ‘그랬다지요’를 깨고 싶은 것입니다. ‘이게 아닌데’가 있는 이상 유언은 필요합니다.

2.
오늘 본문은 사도 요한이 첫 번째로 내세우는 남김, 유언입니다. 2:1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한의 첫 번째 당부는 ‘죄짓지 마라’입니다. 잘못 받으면 상당히 기분 나쁜 말일 수 있지만, 요한은 죄짓지 말라는 것으로 유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1장에서 본것처럼, 요한에게 ‘사귐'(코이노니아)만큼 중요한 게 없습니다. 이 중차대한 사귐을 ‘죄’가 막아 버립니다. 그래서 당부하는 것입니다. ‘죄짓지 말라’. 죄 짓더라도 죄의 대언자(변호자, 1절) 되고, 화목제물(2절) 되시는 예수께 나가 죄에서 벗어나라.

요한이 제시하는 죄의 해법은 계명을 지키는 것(3절)입니다. 계명은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인바, 요한은 2:7 이하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계명을 ‘사랑’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요13:34에서도 요한이 말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계명을 지키라’는 요한의 당부는 ‘사랑하라’는 것이고, 그 사랑하라는 당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순종. 이 두 가지가 요한이 당부하는 유언의 요지입니다. 사랑과 순종이 있는 삶을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순종은 에덴에서 하나님이 원하셨던 원형적 인간의 삶의 바탕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가장 먼저 주신 선물이고, 순종은 가장 먼저 하신 당부입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당신 같은 사랑을 주신 것이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신 것은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는 두 가지 입니다.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실패(failure)와 선을 넘는 행위(transgression)입니다.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이 죄며, 죄의 뿌리입니다. 죄의 바닥, 근본에는 사랑이 없고, 순종이 없습니다. 살펴 보십시오.

사랑과 순종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없으면 또 어떻게 될까요? 천국과 지옥의 차이 아니겠습니까? 삶이 힘들고 힘들어도 사랑이 있고, 순종이 있으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감당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갈등이 줄어들고, 평화가 만들어 집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기에 견뎌내고, 견뎌낼 수 있습니다.

3.
요한의 이 말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았을까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잘 받았을까요? 아니면 노인들이 하는 지극히 당연한 말로 치부하면서 대강 넘겼을까요? 깊게 받아들여다면 왜 깊게 받아들였고, 대강 넘겼다면 왜 대강 넘겼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내가 유언하고, 유서를 남기면 자녀들과 사람들이 잘 받을까요? 무시할까요?

유언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받는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모든 유언은 쌍방향입니다. 유언과 유서가 빛을 발하려면 하는 자와 받는자, 쓰는 자와 받는 자가 서로를 받아 들이고 인정할 때 유언은 유언이 되고, 유언은 살아남습니다.

저는 요한이 하는 말을 많은 이들이 깊게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에게는 그들에게 보여줄만한 삶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를 평생 모시는 사랑을 보여줬고, 심한 박해 속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기는 모습을 보는데 어떻게 그런 이의 유언의 말을 대충 넘기겠습니까?

유언을 하는 자와 받는 자 중에서 누구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유언이 유언 되기 위해서는 유언을 남기고, 유서를 쓰는 자의 삶이 중요합니다. 물론, 반면 교사라는 게 있어서 나는 이렇게 못살았지만 너만은 그렇게 살지 말라 할 수 있겠지만, 좋은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4.
가장 아름다운 유언과 유서는 유언하는 자가 매일의 삶을 통해 만들어내는 삶입니다. 유언의 말과 유언하는 이의 삶이 가까울수록 유언은 오래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유언이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삶’입니다. 삶이 최고의 유서며, 유산입니다.

죄 짓지 말라는 유언은 죄지으면서도 할 수 있지만 죄짓지 않고, 사랑과 순종의 삶을 살면서 하는 유언은 깊게 남아서 사랑이 필요하고, 순종이 요구 될때 ‘살아나’ 사랑과 순종의 삶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 게 인생입니다. 언제가는 우리 모두 떠나고, 싫든 좋든 유언도 하고, 유서도 쓸텐데 이왕 쓰는 유서라면 최고의 유서, 신자다운 유서를 써야하지 않겠습니까? 최고의 유서는 사랑과 순종으로 걸어가는 매일의 삶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다시한번 더 깊게 사랑하고, 순종하는 삶, 살아 내십시다. 이 삶의 아름다운 유서가 이 땅을 떠나도 사랑하는 이들에게 힘을 주고, 복된 기억과 추억을 선물할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오늘 아침 가정마다, 예배하는 모두에게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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