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에 읽는 요한일서 묵상2: 기쁨(요일1:1~4)
1.
‘21세기의 문맹자들은 읽거나 쓸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배우지 않고, 배운 것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배우지 않는 사람이다’.The illiterate of the future are not those who can’t read or write but those who cannot learn, unlearn, and relearn)(엘빈 토플러)
이 문장에 세 단어가 나옵니다. Learn, Unlearn, Relearn. 변화가 필요하며, 변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이 요구되고,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에 안주하지 말고 새롭게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Relearn하기 위해서는 unlearn해야 합니다. 토플러는 unlearn하고 relearn 하는 것을 ‘혁명’이라고 말할 정도로 쉽지 않은 일로 보고 있습니다. 살펴 보면 Relearn할 게 많습니다. ‘아, 이게 아니었구나. 그 동안 잘못 알고 있었구나’. 교정하고 버릴 때 성숙과 진보가 일어납니다.
요한일서 첫 번째 도입부에서 ‘다시 배워야’ 할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기쁨’입니다. 다시 배워야 할 단어고, 삶의 모습입니다. 기쁨에 대해 다시 배워야 할 것은, ‘기쁨이 있다. 기쁨도 있다’입니다. 기쁨이 없고, 기쁨이 죽어버린 사람이 많기에 하는 말입니다. 기쁨이 있다는 것, 다시 확인하고, relearn해야 합니다.
‘기쁨’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성경은 창조의 기쁨으로 시작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쁨으로 끝납니다. 성경 안에는 절망과 고통 한 복판에서 터져 나오는 찬양과 기쁨의 고백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시30:11~12)
고난의 한 복판에서, 고난에 맞서는 자들이 외치는 고백이고 찬양입니다. 인생이 고해(苦海)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고해 같은 인생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하늘의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구원이 있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메시지입니다.
2.
오늘 말씀 4절에서 사도 요한은 ‘기쁨’이라는 단어를 토해 내고 있습니다.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면입니다. 요한일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90이 다 된 노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인은 기쁘지 않습니다. 노인이 기뻐할 게 뭐가 있습니까? 더구나 사도 요한은 고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입과 글에서 ‘기쁨’이라는 단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 기쁜 게 아니라 편지를 받는 사람들, 기뻐하기 힘든 사람들인데, 주저하지 않고 기뻐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도전이 되는 모습이고, 기쁨에 대해 다시 배워야 할 게 분명히 있습니다. 두 가지만 relearn 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기쁨의 이유고, 다른 하나는 기쁨의 가치입니다.
(1) 기쁨의 이유: 예수 그리스도.
노년에 기쁨을 주는 세 가지가 건강, 명예, 경제력이라면 요한에게는 이런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말 기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기뻐하는 척 하는 겁니까?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요한의 기쁨은 자기 최면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쁨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기쁨의 특징입니다.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책이 기쁨이고, 돈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돈이 기쁨입니다. 이처럼 기쁨은 마음 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 가에 따라 결정되는 ‘내면의 가치’입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품고 살면 누가 뭐래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요한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게 경제력이고, 명예고, 건강이었다면 요한은 절대 기뻐한다는 말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좋아하고, 기뻐하는 게 있었습니다. 요한이 좋아하고, 요한이 기뻐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생각하면서 기뻐하는 것처럼 요한은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기뻐했습니다. 기쁨은 기쁨의 대상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요한이 예수님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요한의 마음에는 함께 했던 예수님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치유와 부활의 모습과 밧모섬에서 보았던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의 마음에 벅차게 있었습니다. 요한이 가진 기쁨의 이유, 기쁨의 알파와 오메가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이 요한일서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얘기로 시작하는 것은 자신이 보고, 듣고, 만졌던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 크고 귀하기에 이 예수를 고난 중에 있는 그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고, 이들도 자신 처럼 예수님과 깊게 사귀고 교제해서 기쁨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은 요15:11절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온 말씀입니다. 요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60년 전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요한은 잊지 않고 있다가 다시 꺼내 놓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고난의 현실에 지지 말고 기쁨으로 충만해지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기쁨은 있다. 주님이 주신다. 이 기쁨을 받아라’
기쁨의 이유를 조건과 환경에서만 찾는 관행과 고정관념이 있는데 여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 기쁨의 가치: 선한 개입(介入)
다시 배워야 할 두 번째는 기쁨의 가치입니다. 기쁨의 값, 기쁨의 가치는 크고 귀합니다.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은 개입(介入)하는 존재입니다. 자녀에게 개입하든, 부모에게 개입하든, 친구에게 개입하든 관여하고, 개입하면서 삽니다. 살아 있는한 개입은 필연입니다. 개입하지 않고 사는 삶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누군가의 삶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조심할 수 있고, 선한 개입을 할 수 있습니다.
개입의 결과가 있기에 개입을 잘해야 합니다. 개입의 결과는 길게 남습니다. 욕과 미움으로 개입해 보십시오. 오래 남습니다. 개입 잘하면 좋은 삶이 만들어지고, 잘못 개입하면 인생을 망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개입에 둔감하면 안됩니다.
많은 개입 중에서 최고의 개입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으로도 개입할 수 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으로도 개입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개입은 결과가 안 좋습니다. 최고의 개입은 기쁨입니다. 기쁨으로 개입하면 기쁨이 남습니다. 연로한 부모가 자녀들에게 넉넉한 기쁨으로 개입하면, 이것보다 큰 선물이 어디있겠습니까?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의 가치는 크기 때문에 기쁨이 있게 되면 기쁨은 사귐을 주고, 기쁨으로 사귈 때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힘들다고, 마음에 안 맞는다고 기쁨을 버리는 것은 인생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의 주님 깊게 만나면 기쁨이 따라 옵니다. 이 기쁨으로 수시로 들어오는 불안들, 두려움들, 힘든 것들을 이겨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기뻐하기를 바라십시다. 내가 기뻐하면 내가 좋고, 함께하는 이들이 좋고,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기뻐하는 요한의 모습에 도전 받으면 좋겠습니다. 나이들어 갈수록 절실한 기쁨이, 여러분들의 삶에 충만해 지기를 오늘 아침 축복하고 축원하겠습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