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4. 주일 설교. 시편 2: 독하게 거부하는 사람들 앞에서(시2:1~12). 양은익 목사.

 

독하게 거부하는 사람들 앞에서(시2:1~12)

1.
마음에는 귀가 두 개 있다고 합니다. 듣는 귀가 있고, 거부하는 귀가 있습니다. 둘 다 필요한 귀입니다. 들어야 할 것은 듣고, 거부할 것은 거부하고. 자신을 지켜내는 길입니다. 들어야 할 게 뭔가? 생각해 보면 마음 열고, 들어야 할 게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신앙의 얘기들’ 입니다. 신앙의 얘기, 종교 얘기에는 들을만한 얘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요즘은 원천 봉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독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유가 있겠지만 아쉬운 마음도 들고, 걱정도 되고 그렇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2편은 신앙에 대해 ‘독하게 거부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2절. 하나님과 하나님의 기름 부은 사람들에게 적대적입니다. 적대하는 사람들은 1절. 이방 나라들과 민족들, 2절.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힘을 합해 조직적으로 신앙에 대해 적대하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시인이 등장합니다. 본문에는 시인에 대한 힌트가 나오지 않습니다. 행4:25을 근거로 다윗의 시편으로 보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으로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여하튼 신앙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시인이 기도의 자리로 나갔던 것 같습니다. 아픈 마음을 가지고 기도했을 것 같은데, 기도 중에 귀한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밝혀줌이 시인에게 임합니다. 세상은 적대와 거부로 가득하지만 그 세상 가운데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6절. 메시아를 보내 거룩한 시온에 세우시고, 다스릴 것이라는 위로, 힘을 받게 됩니다.

시인은 자신이 받은 영적인 계시와 감응때문인지, 거부하는 막강한 세력 앞인데도 ‘쫄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하게 도전합니다. 10절 이하가 시인의 도전입니다. 군왕들아, 세상의 재판관들아 하면서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라하면서 오히려 신앙을 권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거부’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시편 2편은 우리 시대와 ‘신앙의 거부당함’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거부당함’, 씁쓸한 상황입니다. 그 시대 처럼, 우리도 독하게 ‘거부’ 당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겠지만, 신앙의 거부는 신앙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난감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가까운 이들이 교회에 질색하고, 신앙을 독하게 거부하면 얼마나 난감합니까? 이런 일이 있는게 우리 신앙의 현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앙이 거부당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있는 교회의 과제고, 신앙인들의 숙제입니다. 각자의 형편에서 답을 꼭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각자의 답에 ‘제대로’라고 하는 신앙의 상태를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신앙이 거부당할수록 ‘제대로’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제대로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누구 신앙의 삶을 가려고 하겠습니까? ‘제대로’의 신앙이 되지 않으면 어떤 처방도 힘을 쓸 수 없습니다.

3.
‘제대로’라는 말이 무겁고, 부담스럽지만 살아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게 제대로 하는 것입니까?’

(1) 내가 하나님 편이다.
신앙의 두 줄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내편이다’가 있고, 또 하나는 ‘내가 하나님 편이다’가 있습니다. 둘은 상당히 다른 신앙의 방향입니다. 각자 필요할 때가 있지만 신앙이 거부당하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내 편이다’보다 ‘내가 하나님편이다’의 방향으로 가는게 맞습니다.

비교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내 편이다’에서 중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에게 있습니다. 중심이 나에게 있기에 하나님은 나의 승리를 위해, 교회의 성공을 위해, 우리 편의 승리를 위해 일하셔야 하고, 간섭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 되는 것은 좋지만 그러한 의식이 잘못되면 교회만, 신자만, 기독교만 하는 승리주의와, 자기 정당화, 성공, 축복, 그릇된 우월감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모습이 여기서 나옵니다.

이걸 고치려면 ‘내가 하나님 편’ 쪽으로 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내 편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하나님 편이 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내는 게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서 중심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고치고, 섬김과 순종의 책임있는 신자의 삶을 살려고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적대적인 신앙 환경에서는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자신감과 성공, 축복의 간증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면 잘못한 게 보입니다. 보이면 깨끗하게 지울 수 있고, 다시 그려 넣을 수 있습니다.

(2)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그려 넣으라.
신앙의 거부가 심할수록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지우고, 다시 그리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려야 할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본문 10절부터 보면 시인은 독하게 거부하는 군왕들, 세상의 재판관들을 향해 겁도 없이 외치고 있습니다. 새번역으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왕들아 지혜롭게 행동하여라, 세상의 통치자들아 경고하는 이 말을 받아들여라.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주님께로 피신하는 사람은 모두 복을 받을 것이다’(새번역. 시2:10~12)

네 가지를 말합니다. ① 주님을 경외함으로 섬겨라. ② 떨림으로 주님을 찬양하라. ③ 주님께 입맞추라(주님을 가까이 하라). ④ 주님께 피신하라(주님을 의지하라) 입니다.

시인은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요청하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더 절실한 모습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최고의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거부의 시대에는 강하게 살아나야 합니다.

유한자가 무한자인 절대자 앞에서 경외감을 가지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께 입 맞추고, 그분을 의지하기 위해 무릎꿇고 경배하는 모습만큼 눈물나게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있습니까? 이 모습이 여러분의 모습이 되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신앙에 독해지고, 적대적이 될수록 절실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유신론 정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유신론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매일의 희노애락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신앙은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 내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현실 안에 하나님의 용서가 있고, 구원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현실’로 뛰어들라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거부의 시대, 독하게 신앙을 거절하는 시대에는 살아계신 하나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되찾아야 합니다.

마크 트웨인 한 말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비밀이 있다, 뭔지 아느냐?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시작해야 합니다. 시편 2인의 시인처럼,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 시작하시고, 깊게 하시고, 간절하게 하십시오. 시인처럼 용기와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가 주어질 것입니다. 신앙의 거부가 심한 사회 속에서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큰 능력이 임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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