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1. 주일 설교: 당신은 당신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눅18:9~14). 양은익 목사. 종교개혁주일

 

당신은 당신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눅18:9~14)

1.
오늘이 10월 31일입니다. 마틴 루터가 1517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부패한 교회를 향한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한 날이 504년전 오늘입니다. 역사는 이 사건을 ‘종교 개혁’이라고 부르고, 이 종교 개혁으로 인해서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교황은 무오하지 않다는 것, 교회가 말씀과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부패해졌다는 것, 구원은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 예술 교회 전반에 엄청난 ‘변화’가 몰아치게 됐던 것입니다. 종교 개혁은 ‘변화’입니다. 우리에게도 여전히 필요한 모습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당신은 당신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로 한 것도 똑같은 이유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쓴 유명한 문장이지만 종교 개혁 주일을 보내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쓰게 됐습니다. 바꿀 삶과 바꿀 신앙이 없으면 바꾸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교회도 없고, 그럴 수 있는 사회도 없습니다.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야 한다’는 종교 개혁의 모토처럼, 삶이 변화를 요구하는 이상, 바껴야 한다는 판단이 들면 바꿀 때 존재와 삶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오늘 읽은 본문, 주님의 비유에 보면 성전에서 기도하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명은 바리새인이고, 한명은 세리입니다. 기도하는 모습만 봐도 둘은 비교가 안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모습보십시오.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세리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세리는 내세울게 없는 사람답게 기도하는 모습도 초라합니다.

이 두 사람 중에 변화가 절실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으로부터 ‘너, 그만 삶을 바꿔’라는 말을 들을 사람은 바리새인입니까? 세리입니까? 11절과 13절에 보면 두 사람의 기도의 모습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기도한 것으로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 있습니다. 왜 따로 서 있었을까요? 당신들과 나는 ‘다르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 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따로 서서’, 자신은 토색도, 불의도, 간음도 하지 않았고, 금식과 헌금에도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르다’고 하는 ‘구별의식’으로 꽉 차 있습니다. 노는 물이 다르고, 수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겸허한 자리인데도 ‘따로 서서’, ‘난 당신들과 다르지’라는 우월감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 있습니다. 멀리 서 있는 이유는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부끄러운 일에 대해서 기도하러 왔지만 자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할 자신도 없고, 사람들에게 가까이 갈 용기도 없습니다. 하여, 멀디 서서 가슴치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나는 죄인입니다’(13절)

두 사람의 기도가 그려지십니까? 이 장면으로만 본다면 바리새인은 존재론적으로 교만하고, 세리는 존재론적으로 겸손합니다. 바리새인은 잘한게 많다고 생각했기에 자신감 넘치는 기도를 한 것이고, 세리는 잘한 게 없기에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이 두 사람 중에 변화가 절실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14절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새번역)

삶을 바꾸고, 변화가 필요한 사람은 바리새인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에게 보여지는 타자에 대한 우월감, 자기과시, 공로의식, 구별의식은 사람을 죽이는 악성 종양입니다. 깊어지면 손 쓸 수가 없습니다. 바꿔야 됩니다. ‘난 당신과 달라’, ‘우리 교회는 수준이 높지’ 같은 우월한 마음, 배제의 마음, 존재론적 과시의 마음을 겸손한 마음으로 바꿔야 됩니다.

3.

개혁의 영어 표현은 reformation입니다. 잘못된 것을 다시(re) 만들고(formation), 다시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절박하고, 간절할 때 일어나는 각성의 마음입니다. ‘이대로 하면 안되겠구나! 죽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 때 사람은 reform,개혁하고, 바꾸기 시작합니다.

단어 하나 말씀 드리겠습니다. ‘다시 알아보기’라는 말입니다. 개혁과 변화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 조건입니다. 처음 볼 때는 잘못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다시 보게 될 때 처음 볼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고, 더 깊게 볼 수 있습니다. 제대로 알게됩니다.

사람은 다시 보고, 알게 될 때 깊게 알게 되고, 마음에 남아 머물게 됩니다. 이 머무름이 삶을 변화시킵니다. 사랑을 다시 봐서 깊게 알게되면 사랑이 머물고, 믿음을 다시 봐서 깊게 알게되면 믿음이 머물게 되서 삶이 바뀌게 됩니다.

루터가 거대한 교회 권력과 맞설 수 있던 힘’은 성경입니다. 루터는 성경을 깊게 보고, 새롭게 다시 알아가면서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들이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모른척, 넘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루터의 연설 한 대목 읽어 드리겠습니다. 루터를 재판하는 보름스 의회 앞에서 한 루터의 항변입니다. 루터는 여기서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면 파문도 면할 수 있고, 화형의 위험도 피해 갈 수 있는데 그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성경과 진리에만 굴복합니다. 나는 교황과 의회의 권유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항상 모순적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는 어떤 신념도 바꿀 수 없습니다. 나는 여기 섭니다. 이제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루터는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늘 우리의 적으로 다가온다. 말씀은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과 남에게 인정받고픈 우리의 모습이 옳다고 인정하고 지지해 주지 않는다’

성경을 깊게 보면서 알게 된 사람이 했던 고백입니다. 루터는 오래 시간 집중하고, 반복 반복 하면서 ‘적’과 같은 말씀을 마음에 담았고, 그렇게 담겨진 말씀은 그의 마음에 머물러 그의 삶을 변화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종교 개혁은 이렇게 말씀을 ‘다시 알게 된’ 한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고 퍼져 나간 운동이고, 개혁입니다.

성경뿐이겠습니까? 어떤 변화든 변화는 다시 보고, 다시 알게 된 이들, 그 ‘다시 앎’이 주는 진리와 깨달음에 눈뜬자들에 의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변화를 원하는 게 있으십니까? 다 안다 생각하지 마시고, 내 판단이 맞다 생각하지 마시고, 바리새인 처럼 자신만만해 하지 마시고 세리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다시 깊게 보고, 다시 알아가기 시작하십시오.

그렇게 집중하고, 반복하면서 다시 알게된 그 앎으로 Reform, 다시 만들어 가면, 변화는 그런 이들에게 일어나고, 삶은 아름다운 회복과 개혁과 구원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 말이 귀하게 들리는 아침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겸손한 들음’이 삶을 바꾸는 힘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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