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3. 주일설교. 인생수정6:탐식(잠23:19~21). 양은익 목사

 

인생 수정6:탐식(23:19~21)

1.
‘하나님은 덧붙임을 통해서가 아니라 덜어냄을 통해서만 영혼 안에서 발견된다’. 중세 수도사였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8)가 한 말입니다. ‘덜어냄을 통해서 발견되는 하나님’. 도전되는 말입니다. 덜어내야 할게 무엇이겠습니까?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은 덜어낼수록 삶도, 영성도 좋아질 것입니다. 뜻깊게 받아서 ‘덜어내는’ 일이 많아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도 좋고,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좋아할 것입니다.

오늘은 탐식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먹는 문제입니다. 잘못 먹는게 탐식인데, 탐식은 탐식하는 사람을 해칠 수 있는 힘이 있기에 탐식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탐식의 경고는 먹거리가 풍족하지 않은 때에 시작됐지만, 먹거리가 넘쳐나는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은 먹방의 시대입니다. 백종원의 시대고, 맛집이 넘쳐나고, 맛있는 것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시대에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 탐식의 주제가 던져주는 도전입니다.

2.
먹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먹는 게 숭고(崇高)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태어나면서 죽는 순간까지 먹어야 하고, 먹어야 힘을 내서 살 수 있습니다. 먹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먹을 게 많아도 돈이 없으면 그림의 떡입니다. 먹기 위해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고되고, 피로하고, 비루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해서 우리는 먹습니다. 그렇게 먹는것이 나를 만듭니다. 무엇을 먹고, 어떻게 먹는 가에 따라 내 몸이 달라지고, 마음과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잘 먹으면 잘 살고, 잘 못 먹으면 잘 못 삽니다. 그러니 먹는 것이 얼마나 숭고합니까?

먹는 것을 돌아본다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삶과 신앙을 점검하는 소중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먹는 것이 숭고하기에 잘 먹어야 합니다. 어떻게 먹으면 좋겠습니까? 탐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3.
(1) 탐식에 대한 지혜1: 절제
교회 전통에서 내려오는 탐식의 유형입니다 ① 급하게 먹는 속식, 감사 없이 먹는 데 바쁜 탐식입니다. ② 게걸스럽게 먹는 탐식, 음식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③ 지나치게 많이 먹는 과식, 무한 리필. 배불러도 먹습니다. ④ 까다롭게 먹는 미식, 맛 없으면 안 먹겠다는 것입니다. 요리하는 사람 힘들게 하는 타입입니다. ⑤ 사치스럽게 먹는 호식, 분위기가 좋아야 먹습니다.

해당 되는 게 있으십니까? 이렇게 되면 오히려 먹는 지배당해 먹는 즐거움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권하는 것이 ‘절식’이고, ‘절제’입니다.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 할 때 가장 먼저 와야 하는 것은 절제입니다. 먹는 행위가 숭고하다면 그 숭고한 행위를 탐식으로 해치지 말고, 절제로 보호해야 합니다. 절제는 먹거리가 풍성한 시대나, 부족한 시대나 필요한 요청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지혜자는 지혜를 권고한 후에, 가져야 할 지혜로 과음과 과식을 경고합니다. 20절. 술독에 빠진 사람과 고기를 탐하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마라.(공동) 과음과 과식을 경고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삶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21절에서는 가난을 이유로 제시하고 있지만 잠언 곳곳에서는 과음과 과식이 주는 심각한 폐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잠23:29절입니다. 29. 재난을 맞을 사람이 누구냐? 근심하게 될 사람이 누구냐? 다투게 될 사람이 누구냐? 속상해 할 사람이 누구냐? 애매하게 상처입을 사람이 누구냐? 눈이 충혈된 사람이 누구냐? 30. 술자리를 뜰 줄 모르고 혼합주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이다. 31. 잔에 따른 술 빛깔이 아무리 빨갛고 고와도 거들떠보지 마라. 32. 결국은 뱀처럼 물고 살무사처럼 쏠 것이다. 33. 눈에는 이상한 것이 보이고 입에는 허튼 소리를 담게 된다. 34. 바다 한 가운데 누운 것 같고 돛대 꼭대기에 누운 것 같아, 35. ‘아무리 때려보아라. 아프지도 않다. 아무리 맞아도 아무렇지 않구나. 술이 깨면 또 마셔야지’하고 말한다.(공동23:29-35)

무시할 수 없는 생생한 묘사입니다. 거룩했던 노아가 아들들에게 수치를 당한 것도 과음이었습니다. 소돔성에서 구원받은 롯이 딸들에게 무너진 것도 과음이었습니다. 과음만이 아닙니다. 과식도 절제하지 않고 지나친 것은 언제나 문제가 됩니다.

지금까지 음식에서 찾아낸 화학성분이 3천만가지라고 합니다. 커피만 해도 카페인만 있는 게 아니라 70~100가지의 화학성분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좋은 성분을 강조하면 좋은 음료가 되고, 나쁜 성분을 강조하면 마시면 안되는 음료가 됩니다. 술에도 좋은 성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절제하지 않으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납니다. 모든 음식이 비슷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많이 먹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먹는 게 풍족한 시대에는 절제가 답입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이 먹고, 너무 자주 먹고, 너무 기름지고, 달게 먹습니다. 칼로리가 넘쳐 납니다. 조금만 절제해도 몸이 가벼워지는데 이걸 잘못합니다. 먹는 것 주의 하라고 하면 무슨 낙으로 사냐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먹겠다는 것을 말릴수는 없지만 답은 절제에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먹는 얘기로 꽉차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동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롬14:17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을 줄여도 됩니다. 소박하게, 절제하면서 하나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위해서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눈을 조금만 돌리면 아직도 먹기 위해서 고단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고, 한 끼 식사를 먹지 못해 배고파하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과식으로 죽는 사람이 없으면 배고픔으로 죽는 사람도 없어야 하는데’(에드리아노 갈레아노, 60억 번째 세계 시민에게 보내는 편지) 현실은 배고파서 죽는 사람이 여전히 있습니다. 탐식이 죄가 되는 이유고, 절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2) 탐식에 대한 지혜2: 영적인 삶
어떻게 하면 잘 먹을 수 있는가? 영적인 삶을 사는 데 있습니다. 영적인 삶과 잘 먹는것은 지대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언제 과식하고, 과음하나 보십시오. 스트레스가 심하고, 압박이 오고, 우울하고, 실망할 때 사람은 허기지는데 그때 과하게, 정도 이상으로 먹습니다. 허기진 마음을 먹는 것으로 달랩니다. 이 때 먹는 것은 순한 것이 아닙니다. 강하고 자극적으로 먹습니다. 폭음을 하고, 폭식을 합니다.

조심해야 되는 순간입니다. 힘들 때 마다 이렇게 하면 장사 없습니다. 건강도 나빠지고, 노아와 롯처럼 실수 할 수 있습니다. 기분과 정서는 이해 할 수 있는데, 습관화되면 신앙적인 삶의 모습은 잃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허기가 찾아 올 때 허기를 달래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천편일률, 폭식과 폭음일 필요는 없습니다. 에크하르타가 한 말입니다. ‘당신 속에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라. 그것을 선언하고 선포하고 생성하고 세상에 내보내라’. 선언과 선포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목구멍에서 나옵니다. 재미있는 것은 목구멍과 탐식(gluttony)의 라틴어 어원이 굴라(gula)로 똑같습니다.

목구멍으로 음식을 꾸역꾸역 집어넣기에 탐식이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목구멍은 들여 보내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내 보내는 곳도 목구멍입니다. 내 안에 있는 귀한 것들을 소리내서 선포하고, 선언할 수 있는 곳이 목구멍입니다. 폭식과 폭음이 필요할 때 이 목구멍을 사용하십시오. 폭음으로만 반응하지 말고, 내 안에 있는 것을 살펴서 밖으로 내 보내보십시오. 말씀을 내 보내고, 찬양과 기도를 내 보내고, 힘든 것을 나누고, 사랑과 감사를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허기진 영혼이 살아나고, 예상치 못했던 위로와 회복이, ‘나를 기뻐하시는 자녀’로 대하시는 하늘의 아버지로 부터 오게 됩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이런 저런 삶의 허기짐으로 힘들 때 과음과 과식으로 몸이 상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잘먹어서 건강하면 좋겠습니다. 영육간에 강건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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