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26. 주일 설교. 인생수정 5: 탐욕(잠30:7~9). 양은익 목사.

 

인생수정 5: 탐욕(잠30:7~9)

1.
오늘 보는 ‘탐욕’은 피해가고 싶은, 상당히 껄끄러운 단어입니다. 탐욕의 대상은 큰 탐욕부터 사소하고 작은 탐욕까지 모든 걸 탐욕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돈에 대한 탐욕이 가장 지배적이고 대표적인 탐욕입니다. 탐욕은 결국 돈 문제입니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기에 돈을 벌어야 하고, 모아야 하니, 많으나 적으나 우리에게는 탐욕의 마음이 들어 올 수 밖에 없습니다. 말하기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우리 형편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와 동떨어진 말을 하는 듯 합니다. 한 푼이라도 더 필요하고, 가진 것도 많지 않은 우리에게 돈 조심하라. 탐욕에 빠지지 마라. 탐욕을 이겨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돈 모을 때까지 무시해야 합니까? 이래저래 탐욕은 속상하고 거북하게 들려옵니다. 그럼에도 ‘탐욕하지 말라’는 성경의 권고는 깊게 들어야하고, 결국은 탐욕을 이겨내는 쪽으로 가는 게 맞는 선택입니다.

탐욕을 이겨내는데 필요한 지혜, 두 가지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지혜가 우리 안에 있는 탐욕을 완화시키는 힘이 되면 좋겠습니다.

2. 지혜1: 탐욕이 만들어 내는 결과를 분명히 보라.
첫 번째 지혜는 탐욕의 결과를 분명히 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떤 탐욕의 결과를 보셨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탐욕의 결과는 나쁘다는 것. 대단히 쓰다는 것. 이 사실을 외면하지 말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동서고금, 탐욕은 있었고, 그 탐욕의 결말은 좋지 않았습니다. 역사가 보여준 교훈이고 사실입니다. ‘아니지, 대박 난 사람도 있었지’라고 우기면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탐욕을 말할 때 이해해야 할 단어가 단어가 있습니다. ‘욕구, 욕심, 탐욕’ 입니다. 이 세 단어를 구별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욕구는 뭔가를 깊게 바라는 마음입니다. 없으면 안되는 하나님이 주신 삶의 자원입니다. 욕구를 통해 우리는 움직이고, 생존하고, 발전합니다. 신앙도 욕구가 필요합니다. 사랑도 일도 욕구와 욕망이 있을 때 힘있게 할 수 있습니다. 돈도 욕망입니다. 욕망이 있어야 벌 수 있습니다. 선물같은 귀한 감정입니다.

문제는 욕망하는 대상이 충분하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충분하지 않기에 더 가지고 싶고, 간절해 집니다. 하여 생기는게 ‘욕심’입니다. 욕심은 그런 부족으로 인해서 심해진, 과도해진 욕망입니다. 이러한 욕심이 불법과 죄를 만들게 되고, 죄가 자라서, 자란 죄가 탐욕인데, 그 탐욕이 사망을 만들게 됩니다. 약1:15의 말씀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탐욕’은 욕심이 자라서, 심해진 것입니다.

욕구에서 욕심이 나오고 탐욕으로 발전되는 것이지요. 탐욕으로 무너진 사람들을 보면 이 단계를 그대로 거칩니다. 작은 욕구와 바램에서 시작하지만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집착하게 되다 욕심과 탐욕으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 함락할 때 아간이 무너진 것 기억나십니까? 어떤 전리품도 가지지 말라는 말을 분명히 들었는데도 널려 있는 물건들 보면서 눈이 돌아갑니다. 인마이 포켓하다 자신도 죽고, 전쟁도 지게 만듭니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죽게 된 것도 탐욕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탐욕의 결과는 위험합니다. 이 위험을 탐욕의 신호가 올 때 마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탐욕을 경고하는 고대의 지혜입니다. 탐욕이 일곱 딸을 낳은 것으로 비유해 줍니다. 일곱 딸 이름입니다. ① 배신 ② 사기 ③ 거짓 ④ 위증 ⑤ 불안 ⑥ 폭력 ⑦ 냉담입니다. 6세기에 나온 탐욕에 결과인데 놀라울 정도입니다. 보십시오. 탐욕은 지금도 똑같은 딸들을 낳고 있습니다. 탐욕으로 인해서 상대 회사에, 상대 진영에 정보를 주면서 파는 배신을 합니다. 수 많은 사기는 탐욕이 만들어 낸 비열한 작품입니다. 탐욕에 사로 잡혀 거짓과 위증을 거리낌없이 합니다. 배신, 사기, 거짓, 위증, 불안, 폭력, 냉담이 많다는 것은 세상에 탐욕이 많다는 것으로 봐도 됩니다. 탐욕이 많을수록 탐욕의 딸들은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굴은 두 가지 기도를 합니다. 하나는 정직이고, 하나는 탐욕입니다. 7절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저에게는 당신께 간청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것을 제 생전에 이루어주십시오 허황된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하나님이 다 뭐냐?’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잠언에서 부하지 않기를 요구하는 유일한 본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부도 아니고, 가난도 아니다’. 요즘말로 하면 ‘중산층의 삶이면 된다’. 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굴이라고 부자되는거 싫어했겠습니까? 욕구도 있고, 욕심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굴이 내린 결론은 부자도 싫고, 가난한 것도 싫다입니다. 9절에서 이유를 밝혀줍니다.

부자는 부해서 탐욕하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해서 탐욕하고, 부자는 부해서 하나님 무시하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해서 하나님께 욕 돌리고. 싫다는 것입니다. 부해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가난해도 진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굴은 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기도가 된 것입니다. ‘가난한 것도, 부한 것도 싫습니다. 필요한 양식만 주시면 자족하고, 감사하면서, 인색하지 않게, 나누면서 살겠습니다’ 아굴의 지혜였고, 탐욕에 대한 현실적인 해법이었던 것입니다.

3. 지혜2: 삶의 방향을 바꾸라.
탐욕에서 벗어나려면 이런 마음의 다짐이 필요합니다. 탐욕은 마음의 문제이기에 탐욕이 지배하지 않도록 마음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지혜가 절실합니다

시119:36,37에서 시인은 기도합니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주의 증거가 있고, 탐욕이 있는데 탐욕보다 주의 증거 쪽으로 시인은 가기를 원합니다. 주의 증거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과 함께 하심입니다. 그 증거를 보면서 자신은 탐욕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으로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삶의 방향을 바꾸고 싶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40일 금식하고 굶주려 있을 때 사단이 유혹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이 빵이 되게 해 보라’. 돌이 빵이 되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빵은 욕망입니다. 욕망을 채워주는 주님. 사람들은 환호할 것이고, 예수께로 몰려들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맥빠지는 대답하십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마4:4). 말씀은 하나님을 지향하고 신뢰하는 신앙적인 가치입니다.

주님께서 빵의 중요성, 돈의 중요성을 몰라서 이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누구보다도 가난한 자의 설움과 불안을 잘 알고 계시지만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빵(욕망)과는 다른 차원의 삶이 있다는 것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빵 만으로는 안된다. 욕망 만으로는 안된다. 그걸 보라는 것입니다. 욕망에 집착하면 탐욕의 노예가 되서, 봐야 할 주의 증거들은 보이지 않고, 말씀도 들리지 않고, 은혜와 기적이 들어오는 길은 막혀 버립니다. 자족도 나눔도 다 없어지고 자기만 아는 괴물로 변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원숭이(북아메리카) 를 잡을 때 조롱박 속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열매 넣어놓고 잡는다고 합니다. 웅켜 잡은 손 놓고 도망가면 되는데 원숭이는 안 놓다가 잡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것인데 원숭이만 어리석다 말하기는 그렇습니다.

탐욕은 생각만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웅켜 잡고 있는 것을 과감히, 집착하지 않고 놓을 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빵에서 말씀으로, 욕망에서 신앙의 가치로 삶의 방향을 바꿀 때 탐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살펴 보십시오. 하나님을 멀리할 정도로 집착하는게 있는지! 욕망하는 게 무엇인지! 탐욕 때문에 인색해지지 않았는지!

탐욕이 가득한 시대지만 탐욕과 인색함에 지지 않는 여러분들의 인생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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