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19. 주일 설교. 인생 수정 4: 게으름과 나태(잠6:6~11). 양은익 목사

 

인생 수정4: 게으름과 나태(잠6:6~11)

1.
오늘 보려고 하는 인생 수정의 모습은 ‘나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게으름’입니다.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 않습니다. 한번만 그런게 아니고 습관적으로 그렇게 합니다. 그럴 때 ‘게으르다’라고 말합니다. 본인만 빼고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사진보세요. 남편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피곤할 때, 주말에 가끔 저러면 이해가 되지만 늘 그러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치우지 않은 접시들입니다. 설겆이 담당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자주 저러면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요!

바쁜 생활에 대한 반작용 때문에 ‘게으름’에 대한 평가가 넉넉해진 게 사실입니다. 게으름을 예찬하고, 게으름을 주장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게으름과 쉼은 구분 해야 합니다. 게으름은 게으름이지 쉼이 아니고 안식이 아닙니다. 쉼은 필요하지만, 게으름은 조심해야 합니다. 게으름을 경고하고, 반대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누운 나무에 열매 안 열리는 것’ 처럼, 사람도 수시로 드러눕게 되면 좋은 결과가 생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10:18. 게으르면 들보가 내려앉고, 손 놀리기 싫어하면 지붕이 샌다.
잠19: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잠19:24.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게으름이 만들어 내는 참사들입니다. 비유들이 실감납니다. 게으르면 집이 무너지고, 잠에 취해 판단 할 수 없게 됩니다. 마지막 한 숟가락을 올리지 않아 모든 준비를 허무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잠26:16.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잘못을 인정할 능력도 겸손도 없습니다. 적반하장, 배짱이가 개미한테 큰 소리 칩니다. ‘뭐하러 그렇게 힘들게 일해 좀 쉬어. 좀 놀아’. 오늘 본문 6:10절입니다.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있자’

본문의 배경은 농경 사회입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땀 흘려야 하는 게으르면 안되는 사회입니다. 이런 곳에서 좀더 자자. 좀더 누워있자 그러면 누가 먹여 살리겠습니까? 남는 것은 가난 밖에 없게 되는데 지혜자는 그런 모습을 많이 봤는지 개미를 비유하면서 게으르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게으르지 말라, 근면하라’. 지혜자의 일관된 메시지입니다.

2.
게으름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게으름이 깊어자기 때문입니다. 게으르다 보면 몸만 게을러지지 않습니다. 정신이 게을러지고, 영혼까지 게을러지게 됩니다. 그게 나태입니다. 나태는 더 깊고, 더 안좋은 게으름입니다.

나태는 헬라어로 ‘akedia’ 입니다. ‘a’와 ‘kedos’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a는 ‘없다’라는 뜻이고, kedos는 ‘관심’입니다. 합하면 ‘관심이 없다’가 됩니다. 나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관심이 없다’. 무서운 말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의욕이 없고, 지루하고, 생각이 없고, 냉담하고, 권태롭고. 감각이 없고,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살아있지만 죽은 것 같은 상태. 이게 나태가 만들어 내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상태입니다.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L.Sayers, 1893~1957, 영국 작가, 시인, 영성가)가 나태에 대해 내린 정의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관심이 없고,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않고,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고, 아무것도 즐기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것에서도 목적을 찾지 않고, 그 무엇을 위해서도 살지 않고, 위해서 죽을 것이 없다는 그 이유 때문에 살아 있는 죄’.

옆에 있는 누군가가 이렇게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소름끼치지 않겠습니까? 열정도, 열의도 없습니다. 허무하고, 공허합니다. 권태롭습니다. 위험한 사인입니다. 삶을 방해하기에 충분하고, 신앙의 삶을 막아 버립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날까요? 역설적인 얘기지만 바쁘다가 게을러지고, 바쁜 것 때문에 나태해 질 수 있습니다. 사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 왜 저렇게 맥이 풀려 소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접시들이 왜 저렇게 쌓여 있습니까? 속상하고, 좌절하고, 실망하면 저렇게 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했는데 돌아온 결과가 별게 없다면 충분히 저렇게 될 수 있습니다.

사회마다 선호하는 게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회도 선호하는 게 있습니다. ‘세계 가치관 조사’라는 공인된 연구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두 가지가 대세라고 합니다. 출세와 물질. 출세를 지향하고, 물질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인 것으로 나옵니다. 이 둘을 위해서 치열하게 싸우는 동네가 한국입니다. 싸움에는 패자와 승자가 있는 법, 패자는 좌절하고 낙담합니다. 승자는 잠시 승자의 기쁨을 누리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걱정에 불안합니다. 패자와 승자, 다 나태해 질 수 있습니다. 패자는 패해서 게을러지고, 승자는 승리해서 불안하고, 공허해 집니다.

우리는 나태할 가능성, 나태의 위험성이 대단히 높은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계속살면 ‘akedia’, 관심 없는, 냉정한, 권태로운 삶은 더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3.
어떻게 하면 akedia, 나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환희와 보람입니다. 기쁨과 환희가 생기고, 삶의 보람이 생기면 나태는 사라집니다.

(1) 환희의 발견
나태가 우울하고, 무기력한 것이라면, 나태를 회복하고 치료하기 위해서는 환희가 필요합니다. 사는게 기쁘면 나태의 우울한 그림자는 사라집니다.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기쁨은 출세와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기쁨은 하나님에게 있고, 하나님 안에서 나옵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하나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기쁨으로 내 영혼이 가득할 때 나태는 꼬리를 감춥니다. 좀더 자자, 좀더 졸자가 아니라 잠이 오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게 필요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돈, 몸, 영혼입니다. 돈이 주는 기쁨도 있습니다. 건강할 때 누리는 기쁨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영혼에서 누리는 환희는 돈과 몸이 주는 기쁨보다 훨씬 더 크고, 귀합니다. 돈보다 몸이 중하고, 몸보다 영혼이 중요합니다. 놓치지 마십시다. 딤전 4:8에서 바울이 말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하여 영혼이 살면 삶은 살아납니다. 영혼이 기쁘면 실패해도 일어날 수 있고, 영혼이 기쁘면 성공해도 오만하지 않고, 허무해 하지 않고 더 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이 우상이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신자의 일 순위는 일이 아니라 영혼입니다. 일 때문에 영혼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미루지 마십시오. 위험한 나태에 빠지게 됩니다.

기도의 물을 아침마다 주시고, 감사로 삶의 윤기를 더하시고, 찬양과 예배로 삶을 풍성하게 만드십시오. 때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하십시오.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는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치며 올라가는 것 같은 힘을 주실 것입니다.(사40:29~31).

(2) 보람의 발견
이 힘이 보람된 일을 발견하게 하고, 자부심 넘치는 일을 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람은 보람된 일을 하면 신이 납니다. 힘든데 힘이 납니다. 하나씩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자신에게 어떤 보람된 일이 있나 한번 살펴 보십시오. 없으면 만드십시오.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나이, 건강, 돈과 상관없습니다.

Where you are planted bloom. 심겨진 자리에서 꽃피어라. 각자가 심겨진 자리, 삶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꽃 피우는 것입니다. 보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가 심겨진 자리, 내 삶의 언저리, 가장 가까운 이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있고, 그 자리에서 찾으면 됩니다.

심겨진 자리, 심겨진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사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사랑하고, 기도하고, 신뢰와 평안함을 선물로 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보람된 일이 있겠습니까? 꽃피우는 것입니다. 어떤 보람이든 찾아서 꽃피우십시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듯 우리도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나태는 수정해야 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환희와 보람으로 나태에서 벗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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