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6.20.주일 설교: 더 늦기 전에 들리기를(잠1:20~33). 양은익 목사.

 

더 늦기 전에 들리기를(잠1:20~33)

1.
‘더 늦기 전에 들리기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그림 한장 보고 가겠습니다. 램브란트가 그린 ‘세례자 요한의 선포’(1634-1635)라는 그림입니다.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광야의 소리라는 별명을 가진 이답게, 가슴에 손을 얹고 온 힘을 다해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주변을 보면 제대로 듣는 사람이 안보이고 있습니다. 어떤 누구도 요한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램브란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요한의 외침을 듣고 반응한 사람들이 아니라, 반응하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쉬운 일이지만, 우리의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혜의 소리, 옳은 소리, 바른 소리는 인기가 없습니다.

2.

오늘 본문에도 잘 듣지 않는 상황이 실감나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지혜자가 외치고 있지만 외면하고 있는 모습이 판박이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지혜자의 답답함이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1장에는 세 가지 소리가 나옵니다. 8절에 아비의 소리가 있고, 10절에 악한자의 유혹의 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에 지혜가 소리가 있는데, 사람들은 아비와 지혜자가 말하는 지혜의 소리는 듣지 않고, 철부지들이 말하는 유혹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여 지혜자가 안타까움을 가지고 외치는 것입니다. 하도 안들으니까 길거리에서, 광장에서 골목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거만한 자들아, 미련한 자들아 도대체 언제까지(22절) 그럴거냐? 23절입니다. 듣고 돌이켜라. 그러면 나의 영을 부어 주의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 주겠다. 돌이키지 않으면 27절. 광풍과 폭풍, 근심과 슬픔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고, 28절. 그때 나를 찾아도 소용없을 것이며 만나지 않을 것이고, 대답하지도 않을 것이다.

대단히 거칠지요! 27절에 나오는 광풍과 폭풍은 한 마디로 하면 ‘쑥대밭’이 된다는 것입니다. 폭풍이라는 말의 어원이 ‘끝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모든 게 끝나는 엄청난 재앙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분히 수사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자극하고, 깨우기 위해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자는 그 정도로 사람들이 지혜의 소리를 듣고 돌이키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가 32절, 33절에 나옵니다. 듣지 않으면(32절) 자기를 죽이고, 망치는 일이기 때문이고, 듣고 반응하여 돌이키면(33절) 평안과 안녕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그들이 더 늦기 전에 지혜의 소리를 들어 잘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녀들의 앞 날을 생각하면서 훈계하고, 가르쳐 주려고 하는 그 마음 그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3.
여기서 하나 묻고 가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은 왜 잘 안들을까요? 안 듣고, 안 들리고, 거절하는 이유? 아십니까? 성경에서만 봐도 항상 하늘의 소리가 있었고, 복음의 소리가 있었는데 시대마다 사람들은 거절합니다. 노아도 외쳤고, 모세도 외쳤습니다. 하지만 듣지 않습니다. 예언자들은 또 얼마나 많이 외칩니까? 앞에서 본 세례요한도 외쳤고, 예수님도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그들의 소리를 거부했고,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듣지 않은 이유를 한 두가지로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만 봐도 거절하고, 반응하지 않는 이유를 암시하는 단어들이 숱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22절, 어리석음, 거만함, 미련함도 거절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24절에 듣기 싫어하는 어떤 마음의 성향이나, 손을 내밀어도 반응하지 않는 무관심, 25절. 30절에 나오는 충고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업신 여기는 마음이 있게 되면 그게 누구의 소리가 됐던 타자의 소리는 들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는 선택적 지각의 성향이 대단히 강한데 이런 성향이 좋은 쪽으로 가지 않고, 부정적인 쪽으로 가게 되면 아무리 지혜의 소리가 들리고, 옳은 소리가 들려도 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소설가 김훈씨가 통렬하게 지적한 게 있는데 지금 우리는 ‘너는 어느 쪽이냐?’를 집요하게 묻는 대단히 편협하고 일방적인 사회에 살고 있고, 그런 사회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너는 어느 쪽인가를 묻게되면, 아무리 옳은 소리를 말해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데 이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잠언의 지혜자가 말하는 그대로 서로를 업신 여기고, 멸시하고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들을 수가 없고, 들리지 않습니다.

4.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실 많은 이들은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습니다. 또, 강제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지혜의 소리를 듣는 것은 결국은 개인이 가진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서 지혜의 소리를 받을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 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지혜의 소리, 훈계를 받아들일 수 있게하는 두 가지 마음의 자세 내지 훈련이 있습니다. 하나는 識別이고, 다른 하나는 省察입니다. 식별과 성찰을 통해 마음을 살필 때 지혜의 소리를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 들이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1) 식별
식별은 알아보는 능력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선택적 지각과 편향성이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면 식별을 통해 옳음과 그름을 분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식별한다해도 식별한 대로 하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도 식별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식별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꼭 있어야 하는 이성적인 작업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품고 선과 악에 대해서, 옳음과 그름에 대해 식별 할 때, 그때 비로서 악을 거절하고, 진실 쪽에 설 수 있습니다. 식별이 한 순간에 얻어지면 좋겠지만 그런 능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성령께 이끌리는 꾸준하고, 성실한 성찰의 삶을 통해 좋은 식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2:9~13)

(2) 성찰
성찰은 식별을 통해 가지게 되는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옳음을 알고, 지혜자의 소리를 식별하면서 자신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피게 됩니까?

① 받은 은혜를 헤아리면서 감사합니다. 받지 못한 것 때문에 속상할 수 있지만, 성찰은 받은 은혜를 먼저보고 감사합니다. ② 자신의 말과 행동, 생각을 살펴봅니다. 보면서 잘못된 것이 있으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③ 자신 안에 쌓여 있는 불안과 어두움, 굳어진 마음을 봅니다. 아픈 마음이지만 보면서 영적인 위로를 구하고, 그 위로에서 받는 감격과 사랑을 가지고 살아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성찰이 주는 선물입니다.

이런 식별과 성찰이 우리의 삶을 도약하게 만듭니다. 들을 것 있으면 기꺼이 듣고, 해야할 것 있으면 하고, 거부할 것은 거부하고. 지혜자가 원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하늘의 지혜는 ① 성경을 통해서, ② 설교를 통해서, ③ 일어나고 있는 일을 통해서, ④ 가까운 이들을 통해서, ⑤ 양심을 통해서 끊임없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더 늦지 않게, 잘 들리면 좋겠습니다. 잘 식별하고, 성찰해서 받게되면 근심과 슬픔 대신 평안과 기쁨이 선물로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롬13:11에서 바울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롬13:11-12, 공동).

희망가라는 노래 듣고 마치겠습니다. 한예종 홍혜란 자매의 노래입니다. 소리를 듣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같도다
부귀와 영화를 누릴지라도
봄 동산 위에 꿈과 같고
백 년 장수를 할지라도
아침에 안개구나
담소 화락에 엄벙 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여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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