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5.9. 주일 설교: 어린양의 피로 다시 살아나는 가정(민21:4-9). 양은익 목사.

 

어린양의 피로 다시 살아나는 가정(민21:4-9)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만나게 하신 뜻은 깊습니다. 그 뜻에 부응하는 가정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 보면서 가정을 세우고, 회복시키는 모습을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불뱀을 막으라.
(1) 본문에 보면 불뱀이 나옵니다. 강한 독을 가진 독사입니다. 이 불뱀이 하나님의 가정으로 비유 할 수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 그 가정 안에 들어와 훼손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바로와 바로의 사람들의 가정에 죽음과 울음이 있었고, 오늘은 구원받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가정에 죽음과 울음이 있습니다. 불뱀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불뱀을 막아야 공동체와 가정이 보호받고 살아납니다.

불뱀들이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눈여겨 봐야 하는 대목입니다. 본문은 마음의 상함(4절) 때문에 들어왔다고 밝혀줍니다. 마음 상한 이유는 가까운 길이 있는데 그 길로 가지 않고, 먼길로 돌아가는 것 때문에 기분이 상해있습니다.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이 사람들이 모르는 게 아닙니다. 에돔이 길을 막아서 그렇타는 것을 아는데도 마음이 상해있습니다.

기분 나쁘고, 힘들면 나오는 게 원망인데, 아니나 다를까 5절에 보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원망을 보시면 알겠지만 철없는 원망, 사려깊지 않은 원망으로 가득합니다. 이미 애굽에서 나왔고, 광야입니다. 고생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일부러 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런 상황을 쿨하게 인정하고, 조금만 고생하자. 함께 잘 견뎌내자. 이러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지만, 이런 인정과 이해가 잘 안됩니다. 한번의 원망이 두번이 되고, 급기야는 선을 넘게 됩니다. 5절 끝에 보면 결정적인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한다’. 하찮은 음식은 ‘만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 공급해 주는 하늘의 일용할 양식, 먹을 것 없는 광야에서 굻어죽지 않고 살아가게하는 그 거룩한 양식을 ‘하찮은 음식’,’가치없는 쓰레기 같은 음식’이라 부르면서 이제는 그게 ‘싫다’(loathe). 혐오할 정도로, 구역질 날 정도로 싫다는 것입니다. 막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고, 더 이상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도 은혜고, 매일 먹는 만나도 은혜인데 받은 은혜는 하나도 생각하지 못하고 뜻하지 않게 벌어진 먼길 행진에 지치고, 힘들자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불뱀이 그들 안에, 그들의 가정 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불뱀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지만 사실은 그들이 자초한 것입니다. 조금만 이해하고, 공감했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인데, 감정적으로 대응하다가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게 된 것입니다.

(2) 가정에도 불뱀이 들어 올 수 있습니다. 미움이 있고, 원망이 있고, 격한 말이 나오면 불뱀이 들어와 독한 원망과 미움으로 물기 시작합니다.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게 최선입니다. 너무 쉽게 마음 상하지 않기, 상황을 넉넉하게 이해하기, 부족한 게 있어도 지금껏 받은 것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 가지기. 이 정도만 가져도 불뱀은 쉽게 들어오지 못합니다.

많은 경우 가정의 상처와 갈등은 정서적 결속이 무너지는데서 시작합니다. 정서적 결속은 감정의 교류입니다. 막히게 되면 이해도 막히게 되고, 공감의 마음도 막히게 됩니다. 막히기 전에 연결해야 됩니다. 가정에 꼭 있어야 하는 두가지 共이 있습니다. 공명(共鳴)과 공감(共感)입니다. 함께 울리고, 함께 느끼고. 그러면 가정은 결속되고 강해집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느껴보십시오. 원망 보다는 이해와 감사가 깊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많은 것을 막아 낼 수 있습니다. 공명과 공감이 많아져서 불뱀을 막는 힘을 가지는 가정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2. 회개와 중보가 필요하다.
불뱀의 공격으로부터 가정을 지켜내고, 가정을 살리는 두 번째 요소는 회개와 중보입니다. 불뱀의 공격으로 죽어나가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했나 보십시오. 다행인게, 고집 부리지 않고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 쿨하게 인정합니다. 7절.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다’

잘못에 대한 인정은 쉽지 않지만, 급해서 했든, 아쉬어서 했든 여하튼 인정합니다. ‘우리가 범죄했다’. 누구한테 합니까? 모세에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하는 것 보다 더 자존심 상하고, 굴욕적일 수 있는데 모세를 면전에 두고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들의 고백에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누구보다도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이 모세이지만, 거절하지 않고 받아줍니다. 불뱀을 사라지게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기꺼이 하나님께 나가 중보자가 되서 그들을 위해 깊게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보면 가해자와 피해자일 수 있는 사람들인데 위기 앞에서 고집 부리지 않고 다시 손을 맞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도 반응하십니다. 8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가정을 살리는 연합과 연대의 중요한 장면으로 보고 싶습니다. 나와, 나 아닌 가족의 모든 너. 그리고 하나님. 이 삼자가 연대할 때, 가정은 회복되고, 살아날 수 있습니다.

가정은 힘들수 있습니다. 상처 속에서 무너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회개가 있고, 중보의 기도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어떤 아픔과 힘듬 속에서도 가정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방법’을 주시고, 그 방법에 ‘순종’하면 살아나게 하십니다.

가정의 문제, 가족의 문제로 힘들때마다 두 가지를 꼭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살아온 자신의 삶과 가정의 삶을 꼭 돌아 보십시오. 늘 해야 하는 일이지만 사는 게 힘들고, 어려울 때는 더 해야 합니다. 자책하기 위해서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위해서, 감사한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돌아보다 아닌 것은 회개하고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 마음으로 가정의 새로움과 회복을 위해서 성실하고, 진실한 중보자가 되십시오. 옆에 사람에게 미루지 말고 먼저 중보자가 되십시오. 걱정하고, 원망하고, 포기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 낫습니다. 자녀를 위해 중보하시고, 남편과 아내를 위해 중보하시고, 부모와 형제 자매를 위해 중보하시고, 힘든 일을 위해서 중보하십시오. 그 중보에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3. 놋뱀이신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 보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응답은 놋뱀으로 나타납니다. 불뱀에 물려서 죽어가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놋뱀(Bronze Snake)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달게 하시고, 그 놋뱀을 쳐다 보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 누구든 살아날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마음을 푸시겠다는 것이고, 용서하시겠다는 것이고 화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의심과 불신의 마음을 접고 내민 손 뿌리치지 말고 잡으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거부하면 어쩔 수 없지만 내민 손 잡으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공은 사람들에게 넘어 왔습니다. 쳐다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시겠습니까? 무시하시겠습니까? 죽으면 죽었지 안 본다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불뱀의 독이 온 몸에 퍼져 터질 것 같이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 쥐고 괴로워 하는 ‘절박한 사람’들 중에 누군가는 쳐다 봤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자신이 들리게 되는 십자가 사건으로 설명하십니다. 요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바라 보는 자)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의 방법은 동일합니다. 그 옛날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들이 장대에 들려진 놋뱀을 믿음으로 바라 볼 때 구원받은 것 처럼, 나도 십자가에 들려질텐데 그런 무력한 자신을, 설마, 이게 가능해, 말이 되는 얘기야 하면서 의심하지 않고 바라보고 신뢰하고 믿게 되면 ‘영생’이라고 하는 놀라운 가치를 선물 받게 되는 참된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놋뱀이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의 사인이었다면 십자가도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의 사인입니다. 그 사인을 우리는 거부하지 말고 받으면 됩니다. 놋뱀처럼, 십자가의 예수도 아무나 쳐다 보지는 않을 겁니다. 독에 물린 사람들이 절박한 것처럼 삶에 대해 목마른 사람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한 사람들, 삶에서 일어나는 불행과 고통을 보면서 절박한 사람들이 결국은 쳐다 볼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십자가를 믿고 바라보는 이들에게 불뱀의 독같은 뿌리 깊은 죄의 독을 제거하고 ‘영생’을 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생은 나 혼자 구원받아 천국에서 영원히 잘 산다는 의미의 영생이 아닙니다. 요한17:3에 보면 주님이 영생에 대해 정의한 구절이 나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게 영생이다. 라고 분명하게 정의해 주십니다.

영생은 생명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인정하고, 아는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알기에 삼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있고, 교제가 있기에 교제하면서 받는 신적인 사랑과 은혜를, 이웃과 가족들과 나누며 살아가는 삶. 이게 영생의 삶입니다. 놋뱀이신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고 믿을 때 받게 되는 삶이고, 선물입니다.

정말 우리들의 가정에 필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 어떤 가치보다, 그 어떤 성취보다 앞에 와야 하는 것은 십자가의 주님께서 하셨던 것 처럼 용서고, 믿음이고, 우애며, 함께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생의 삶이 독에 물려 깊은 상처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가정을 살리는 최선의 방법, 최고의 방법입니다.

사방에 독을 품은 불뱀들이 노리고 있습니다. 쉽게 물리지 마십시다. 물려도 놋뱀이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빨리 해독시키십시다. 선물로 주신 가정, 복되게 지키시고, 살리시고, 회복시키는 십자가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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