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18 주일 설교: 어설픈 자의 변신(요21:15~17). 양은익 목사

 

                                                     어설픈 자의 변신(요21:15~17)

제목을 보면 어설픈 자가 변했답니다. 대단히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이겠지요! 어설프고, 허술했던 것에서 벗어나면 나도 좋고, 너도 좋고, 다 좋습니다.

1.
오늘 본문에는 어설펐던 한 사람, 베드로가 어설픔에서 벗어나는 귀한 장면이 나옵니다. 장소는 디베랴 호수, 갈릴리 바다입니다. 제자들이 주님 따르기 전 고기 잡으며 살던 삶의 터전입니다. 때는 주님이 부활하신 1주일 뒤, 디베랴 호수의 아침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놀라움과 감격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와 새출발을 고민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찾아왔습니다.

생선과 떡으로 아침을 나눈 후에 꼭 만나야 할 사람, 베드로와 만나 1:1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똑같은 질문과 똑같은 대답이 세 번 나오고, 세 번의 사명을 받게 됩니다. 질문은 간단합니다. ‘너 나 정말 사랑하니?’ (Do you love me?). 이 말은 요한의 어법으로 하면 ‘너 정말 나 알고 있니?'(Do you know me?)라는 말로 바꿔도 되는 말입니다.

요일4:7에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아는 것입니다.

너 나 사랑하니? 너 나 아니? 간단한 질문이지만 베드로에게는 뼈아픈 질문입니다. 베드로의 과거 다 아시잖습니까? 다 떠나도 자기만은 주님 떠나지 않을 거고, 목숨마저도 내 놓을 수 있다고 얼마나 당당했고, 큰 소리 쳤습니까?

하지만 정작 주님이 체포당하고 고문 당하자 언제 그랬냐느듯이 세번 부인하고, 도망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의 지식(앎)은 공허했고, 허망하게 끝납니다. 그의 지식은 실패했고, 사랑은 무너졌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이 묻습니다. 너 나 사랑하니? 너 나 아니? 얼마나 부끄러웠고 아파겠습니까? 아픈 질문이지만, 할 수 밖에 없었던 질문을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왜요? 이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해야 주님의 양을 치고, 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또 다시 예전처럼 주님을 안다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벼루기도 낯짝이 있지 무슨 염치로 그렇게 하겠습니까? 하여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세 번 다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너 나 사랑하니? 너 나 아니? 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대답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사랑하니 물었으면 옛날처럼 딱 부러지게 내가 사랑합니다. 내가 압니다. 그렇게 나와야 되는데 ‘주님께서 아십니다’.

애매하고 회피하는 듯한 대답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대답은 비겁한 대답이 아닙니다. ‘안다고’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한 사람이 완벽하게 무너진 다음에 나오는 깨달음이고, 철든 고백입니다.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아십니다’

신앙이란 아는 것인데,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입니다. 가장 큰 신앙 고백은 ‘하나님을 안다’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입니다.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훤히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시139:1) 그게 큰 신앙이고, 온전한 신앙입니다.

섣부르게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더 나아가 무엇인가를 내가 안다고 강하게 주장할 때 사람은 독선에 빠지게 됩니다. 독선에 빠지면 마음을 닫아 버립니다. 마음을 닫으니 갈등이 생기고 평화가 깨집니다.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마음을 열고 듣고, 배울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여니 함께 할 수 있고, 함께 하니 평화롭습니다. ‘모른다’는 한 생각, 마음에 품고 살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더 많이 알고, 깊게 알고, 넓게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모릅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베드로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어설픈 모습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의 변신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주님께서도 이 대답을 인정하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을 먹여라, 내 양을 치라. 이 사건 이후 베드로는 어설픔의 딱지를 떼고 말 그대로 주님께서 부르실 때 의도했던 사람 낚는 ‘전문가’(Expert)가 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시에는 한 번의 설교로 3천명, 5천명의 회심자를 얻어냅니다. 바울과 함께 물과 기름 같았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지혜롭게 중재하면서 초대 교회를 세워 나가는, 그의 이름 그대로 ‘반석’(페트라)과 같은 존재로 서게 됩니다.

3.
베드로에게 ‘전문가’라는 평가를 내리는 게 생소할지 모르겠지만 베드로는 초반의 어설픔을 벗어 던지고 전도와 설교와 삶의 ‘전문가’로 변모합니다. 전문가라는 말 눈여겨 보시면 좋겠습니다. 어설프지 않은 사람이 전문가입니다. 전문가를 꼭 특정한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지칭한 필요는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일이 다 전문적이고, 어느 일에나 전문가는 필요합니다.

차가 고장나면 기름때 먹고 사는 정비 전문가가 필요하고, 수도가 터지면 하수도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전문가입니다. 일상의 삶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과 희망으로 만들어 가면 어떤 전문가보다도 귀한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정성스럽게 밥해 먹이고, 그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전문가보다 더 귀한 전문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함께 있으면 더 잘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면 그게 고수고 전문가입니다.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일이고, 가져야 할 삶의 과제고 책임입니다. 자신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정’이기에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베드로 보십시오. 전문가가 되는 3단계가 있는데 베드로는 그 과정을 다 거칩니다. ① 배우는 도제의 단계에서 시작해 ② 독립해서 자신의 일을 하는 단계를 거쳐 ③ 마지막에는 고수(전문가)가 되서 가르치고 전수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됩니다. 복음서의 베드로는 도제의 단계고, 사도행전은 독립의 단계, 서신서는 전문가의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보에서 전문가까지는 직선이 아닙니다. 오르낙 내리락, 실패와 성공, 수 많은 난관과 돌발상황을 겪어 나가면서 고수가 되는 것입니다. 인내와 지혜와 수정과 변신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베드로에게 온 것이고, 다시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고수인지 한번 보십시오.

4.
우리 성경에 보면 양이라는 단어가 구별없이 쓰여졌지만 원문에 보면 전부 다른 단어로 되있습니다. 15절에 어린양은 정말 어린양(arnion)입니다. 16절의 어린양은 청소년기 양(probation)입니다. 17절의 양은 발육이 끝난 성인 양(probaton)입니다. 이 모든 양들을 구별하지 말고, 편애하지 말고 언제나 어디서나 돌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양이라는 단어가 나올때 마다 놀랐을 겁니다. 양들의 모습 속에 자신의 어린양 같은 유치한 모습, 청소년기 양 처럼 반항하던 모습, 어른 양처럼 군림하며 큰 소리치던 모습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기 같은 양들을 돌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수,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에게만 이 일을 맡기셨겠습니까? 베드로 같은 우리에게도 맡기셨을 겁니다. 부담스런 말이겠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다. 어설프게 산 부끄러운 세월이 많아도 부활하신 주님을 깊게 만나, 주변에 있는 보채기만 하는 어린양, 반항하는 양들, 고집 센 양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람으로 알고, 돌보게 되면 삶이 바뀌고, 인생이 바뀝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어설픈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보물같은 ‘사명’입니다. 먹이고, 치십시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갖게 되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습니다.

‘다른 이들(他)을 참아 주는 것은 사랑이요, 자신(自)을 참고 견디는 것은 희망이며, 하나님(神)을 참고 기다리는 것은 믿음이다’ 이기 때문입니다. 관건은 참아 내는 것, 인내하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은 변신과 변화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의 기대와 사명에 부응하는 부활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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