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3.14. 주일 설교: ‘싫음과 미움’의 신앙적 용법(막3:1-6). 양은익 목사.

 

말씀:‘싫음과 미움’의 신앙적 용법(막3:1-6)

1. 싫음과 미움이 가득한 세상.
1960년대에 김수영 시인은 분노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못하고,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 자신을 보면서 모래만큼, 먼지만큼 작은 자신을 탓한적이 있는데, 우리도 싫어해야 할 것, 미워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미워하지 못하고, 하찮고, 사소한 것들만 미워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봄이 오니 봄을 기다리자고 했는데,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싫음과 미움은 아닐 겁입니다. 파릇파릇 올라오는 새순을 보는 이들의 마음이 미움과 싫음이라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입니다. 봄을 기다리고, 희망을 기대한다면 싫음과 미움은 적어지는 게 맞습니다. 미움이 가득하면 희망이 피해갑니다. 사랑도, 평화도, 기쁨도 다 도망갑니다.

꽃 만발하기 전에 검검해 보십시오. 싫어하는 게 무엇입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얼마나 많으십니까? 마주 하기 싫은 사람, 못마땅한 사람이 얼마나 많으습니까? 더 많아지고 있습니까? 적어지고 있습니까?

‘싫어’의 용법을 보면 모든 걸 다 싫어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싫고, 너가 싫고, 하나님이 싫고, 교회가 마음에 안들고, 예배가 싫고, 직장이 싫고, 일하는 게 싫고, 부모가 싫고, 시어머니가 싫고, 며느리가 싫고, 국민의 힘이 싫고, 민주당이 싫고, 못생겨서 싫고, 예뻐서 싫고, 살이 쪄서 싫고, 말라서 싫고, 공부 못해서 싫고, 심지어 그냥 싫고.

애들만 유치하게 싫어, 미워하는 게 아니라 우리도 평생 싫어하고, 미워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싫어는 ‘싫다’라는 단순한 감정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싫어가 미워가 되고, 미움이 혐오(嫌惡, 싫어하고, 미워함)가 되고, 혐오가 증오(憎惡)가 됩니다. 증오는 미워하고 또 미워하는 것입니다.

작고, 사소하게 시작한 싫음이 퍼지고 퍼져서 사회 전체를 혐오와 증오의 세력권 안에 들어가게 만들어 버립니다. 쉽게 봐서는 안되는 마음의 상태고, 감정입니다. 미움과 증오는 돌고 돕니다. 가는 말이 거칠면 오는 말도 거친법, 미움받은 사람이 가만 있겠습니까? 되돌려 줘야지. 이렇게해서 ‘미움은 세력화’가 되서 서로를 죽이는 칼이 되 버립니다.

왜 싫은가? 왜 미운가? 물으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내 책임이 아닌 싫음도 많이 있습니다. 화 낼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그럼에도 ‘싫음과 미움’은 환경을 탓하기 이전에 내 책임입니다. 화나고, 속상한 일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거기에 매여서 소중한 내 마음과 영혼을 미움으로 채운다면 손해는 내가 보는 거지, 남이 보는 게 아닙니다.

싫음과 미움의 문제는 결국 내 문제고, 내가 해결해야 됩니다. 싫음과 미움을 온전히 해결 할 수는 없습니다. 죽는 날까지 싫음과 미움의 감정적인 굴레 속에 있겠지만, 그래도 줄여야 되고, 줄이면 줄일수록 좋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많이 가진 사람들이고, 미움 많은 세상을 사랑으로 만들어 갈 소명과 책임이 있습니다. 주님이 미워하라하지 않고, 사랑하라 하셨기에 이 명제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독한 미움의 감정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2. 싫음과 미움의 신앙적 용법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마음의 온도는 몇도일까요?’라는 제목의 글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정여민이라는 13살 초등학생의 글입니다. 어머니가 갑자기 흉선암을 진단받게 되는데, 그 때 힘들었던 마음들, 치료를 위해 산골 오지로 이사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적고 있습니다.

‘왜 하필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생겨야만 하는 것일까? 엄마는 한동안 밥도 먹지 않고 밖에도 나가시지도 않고 세상과 하나둘씩 담을 쌓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엄마는 어느날, 우리를 떠나서 혼자 살고 싶다고 하셨다. 엄마가 우리에게 짐이 될 것 같다고 떠나신다고 하셨다. 나는 울분이 터져 나왔다. 엄마가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그러면 여태껏 우리가 짐이었어? 가족은 힘들어도 헤어지면 안되는 거잖아. 그게 가족이잖아!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내 눈물을 보던 엄마가 꼭 안아주었다…(산골로 이사를 갑니다)

이곳 산골은 6가구가 살고 택배도 배송되지 않는 곳이다. 이제 사람 얼굴도 못보겠구나 생각했는데 그 무렵 빨간색 오토바이를 탄 우체국 아저씨가 편지도 갖다주시고 할머니가 보낸 택배도 갖다주셨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는데 엄마가 암환자라는 얘기를 들으셨는지 ‘꾸지뽕’이라는 열매를 차로 마시라고 챙겨주셨다.

나는 이곳에서 우리 마음속 온도는 과연 몇도쯤 되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너무 뜨거워서 다른 사람이 부담스러워하지도 않고, 너무 차가워서 다른 사람이 상처 받지도 않는 온도는 ‘따뜻함’이라는 온도란 생각이 든다. 보이지 않아도 마음으로 느껴지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질 수 있는 따뜻함이기에 사람들은 마음을 나누는 것 같다. 이 산골에서 전해지는 따뜻함 때문에-베트남 아주머니의 고사리, 고구마 부쳐 주셨던 할머니, 수고해주시는 우체국 아저씨-엄마의 몸과 마음이 치유되기를 소망해 본다. 환하게 웃으시던 그때처럼’

이 글을 읽은 이유는 이 아이가 가진 마음 때문입니다. 아이는 산골 이웃들에게서 따뜻함을 느꼈다고 했지만, 우리는 이 아이에게서 따뜻함이라는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너무 뜨거워서 부담스럽지도 않고, 너무 차가워서 상처받지 않는 마음이 따뜻함인데, 이런 따뜻함이 우리 안에 있는 미움과 싫음을 녹여 버리는 것입니다.

미움과 싫음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미움과 싫음이 줄어들려면 이 마음이라는 공간이 따뜻해지고, 넓어지는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5절에 ‘완악’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하신 말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굳어있다는 것입니다. Hard hearts. 찔러도 피 한방울 나지 않는 돌같이 굳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다가 건수만 잡으면 잡아 넣겠다는 심산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예수가 싫고,미운 것입니다. 그 싫음이 미움이 되고, 미움이 증오가 되서 6절. 살해를 모의하는데 까지 가 버립니다. 넉넉하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습니다. 손 오그라든 사람처럼 손을 내밀지도 못하고, 잡지도 못합니다. 이게 바리새인 아닙니까? 마음의 공간이 작고 좁습니다.

쥐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순한 녀석들만 골라서 좁은 공간에 몰아 놓고 다음날 가 보니까 밤새 얼마나 격렬하게 싸웠는지 그 중 한마리가 물려서 죽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넉넉한 공간에 있을 때는 아무일 없던 쥐들인데 좁은 공간에 들어간게 불편했는지 격하게 싸운 겁니다.

마음도 똑 같습니다. 마음의 공간이 넓어야 넉넉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마음 좁으면 ‘한번 걸리기만 해봐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싫어, 미워같은 단순함에서 벗어나려면 마음의 평수부터 늘리는 게 좋습니다. 마음의 평수 어떻게 늘립니까? 마음은 자신이 늘려야 되고, 자신이 가꾸어야 합니다.

정원 가꾸는 분들 보셨습니까? 보통 정성이 아닙니다. 잡초 가득한 곳을 결국은 꽃 만발한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냅니다. 마음의 정원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자들에게 마음은 하나님 임재(臨在, Come)의 공간입니다. 거룩해야 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사람 마음 겪어 보셔서 알겠지만 마음은 가꾸지 않고, 돌보지 않으면 엉망이 됩니다. 싫어, 미워, 분노, 상처, 질투, 편견같은 악성 감정들이 애, 어른 할 것 없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하루만 지나도 수북히 쌓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 처럼 타락 이후 사람은 ‘죄짓지 않아도 되는 존재’에서 ‘죄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됐기 때문에 마음의 근본은 어둡고, 부정적입니다. 의지를 가지고 가꾸어야 주님 임재하시는 정원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어둡게 하고, 굳게 만드는 불순물들을 매일 뽑아내고, 그 자리에 말씀이라고 하는 생명의 씨앗을 심어나갈 때, 그 말씀이 주는 길을 신중하게 따라 갈 때 나도 모르게 자라 30.60.100배의 열매를 맺는 생명의 정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정원 꼭 만드시기 바랍니다.

봄이 왔는데 겨우내 속상하게 하고, 힘들게 하던 싫음과 미움이 있다면 다 뽑아 내시고, 그 자리에 감사와 사랑, 말씀과 기도의 씨앗 심으십시오. 그 마음에 주님 임재하셔서 여러분의 정원, 여러분의 마음이 넓어 지게 될 것입니다.

Charmaine Aserappa(샤메인 아세라파)라는 분이 정원을 보면서 쓴 글 한 대목 보고 마치겠습니다.

고요한 연못이 되라, 너의 얼굴이 빛과 경이로움을 반사하게 하라.
꽃봉오리가 되라,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나무가 되라, 쉴 그늘이 되어 주는.
등불이 되라, 길 잃은 이들의 앞을 비추는.
오솔길이 되라, 한 사람의 갈 길을 열어 주는.
비가 되라, 씻어 내고 맑게 하고 용서하는.
풀이 되라, 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흙이 되라, 결실을 맺는.
정원사가 되라, 자신의 질서를 창조해 나가는.
(정원 명상, 샤메인 아세라파, 부분)

우리의 모습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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