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31.주일 설교: ‘그러나’의 신앙적 용법(엡2:1~9). 양은익 목사.

 


말씀: ‘그러나’의 신앙적 용법(엡2:1~9)

1. ‘그러나’의 用法
오늘 말씀 제목은 ‘그러나’의 신앙적 용법입니다. 용법은 사용하는 방법이므로 ‘그러나’라는 단어를 신앙적인 방법으로 사용하자는 말씀을 오늘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라는 말을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쓰는가?(用法)에 따라 달라지는 게 많습니다.

‘그러나, ‘하지만, 그렇지만, 영어로는 But. However’ 다 똑같은 말입니다. 문법용어로는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다를 때 쓰는 역접 접속사라고 합니다. ‘다들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지만 나는 믿지 못하겠다’. 부정의 역접입니다. ‘지금 많이 힘들다. 그러나 다시 일어 날 수 있다’. 긍정의 역접입니다. 긍정이던 부정이던 ‘그러나’를 기점으로 앞과 뒤의 내용이 다릅니다.

신앙인들이 ‘그러나’를 쓰는 방식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 하나는 ‘그러나 하나님, But God’의 방식이 있고, ② ‘그러나 나, But I’라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없음에서 있음에서 나가는 길이고, ‘그러나 나’는 많은 경우, 긍정에서 부정으로,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게 만듭니다.

어떤 방식을 쓰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But God’을 많이 쓰십시오. 우리 신앙인들이 써야 할 ‘그러나’의 신앙적 용법입니다. 아쉬운 것은 But God보다 But I가 훨씬 많고, 쎄다는 것입니다.

설교하면서 힘든 때가 있습니다. 결론이 버킹검일 때, 어떤 설교를 해도 답이 하나일 때입니다. 하나님이 쎄고, 하나님이 이끌어 주신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마지막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러나 나’는. 이걸로 끝납니다.

‘내 형편에 처해봐. 하나님도 별 수 없지. 배부른 목사가 내 상황을 알까?, 해도 안되잖아. 운명이고 팔자야’ 하나님보다 나 입니다. 힘들어서 그런 것을 알지만, ‘자신’ 속에 막혀 있는 것을 보면 참 심란해 집니다.

부정적인 But I의 용법이 너무 깊게 교회와 신앙들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주저하고, 하나님의 가능성과 하나님의 있게 하심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나면 희망이 살아나고, 믿음이 살아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서 꺽여도 무너지지 않는 자로 살아가는 길이 열리는 데 ‘그러나’의 하나님과 ‘그러나 나’의 경계에서 ‘그러나 나’ 쪽으로, 가 버릴 때가 많습니다.

계몽주의와 현대성의 후예답게 ‘내’가 중심이 되서 하나님까지도 나의 판단과 생각 속에서 휘두르는 삶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Ego가 강합니다. Ego가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약하고, 깊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인데, 자신이 천상천하 유아독존. 최고라는 착각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있어도 자신의 부족을 메워주는 정도의 존재, 그러면 신의 소임을 다하는 정도의 하나님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금은 분위기가 ‘그러나 나’를 버리기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Ego가 강한게 나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만 강해지고, 하나님이 사라지면 그런 자아는 강한게 아니라 취약한 자아가 될 수 밖에 없는데 자존심, 자존감만 남아 있습니다.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며 높아진 것을 내려 놓고,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서 그리스도에게 복종’(고후 10:5) 할 때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속 깊은 말, 고백, 믿음이 나올 수 있습니다.

2. 바울의 ‘그러나’ 용법(엡2:4)
오늘 본문 4절을 보십시오. 새번역으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4,5)

4절에서 ‘그러나’가 중요한데 개역개정에는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원문에는 De ho Theos. ‘그러나, 하나님(But, God)’으로 되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러나’를 놓치면 안됩니다. 표를 보시면 알겠지만, ‘그러나’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나 이전인 1절부터 3절에서는 인간의 상태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절망하고 있습니까?

① 1절. 허물과 죄로 죽었다. 모든 사람이 다 영적으로 죽어 있어서 허물과 죄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습니다. ② 2절.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사탄을 따르고, 3절, 육체의 욕심을 따르고. 세상과 사탄과 욕심에 매여 있습니다. ③ 하여, 진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니라고 하면 좋겠지만 아닙니다.

절망적인 상황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은 ‘그러나, 하나님’(4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① 5절. 허물과 죄로 죽었지만 살리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있으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아멘. ②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인해 매임에서 풀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풍조와, 공중 권세 잡은자와 육체의 욕심에 매여 있던 사람들을 풀어 주십니다.

5절.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6절.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 보좌에 앉혀 주십니다.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앉히신 것은 누구에게 일어난 일입니까? 주님에게 일어난 일인데 그와 동일한 일을 우리에게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은혜로, 선물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③ 하여 진노의 대상인 우리를 행위가 아니라 순전히 은혜로 구원해 주십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고, 감격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8절.9절 다시 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런 바울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고, 여러분의 희망이 되고, 여러분의 자유함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게 우리가 가진 기쁜 소식이고, 복음이며 기독교 신앙입니다.

3. 절망에서 나오는 ‘그러나, 하나님’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을 그럭저럭 합니다. 꾸역꾸역 합니다. 억지로 합니다. 수동적으로 합니다. 그리고 재미 없어 합니다. 재미 없어 하는 이유는 예수 믿어 자신이 이익과 유익과 잘됨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대충해도 크게 손해를 보는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충합니다. 변명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신앙의 유익과 이익을 자신의 잘됨쪽으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으로 거의 고정되 버렸습니다. 비교하는 것을 보십시오. 옛날에는 슬펐는데 지금은 기쁘다. 옛날에는 약 먹어도 치료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기도했더니 나았다. 이제는 내 마음이 평안해졌다. 이제는 기쁨이 있다. 아파트 하나 샀는데 엄청 올랐다.

뭔가 유익이 되는 게 있어야 안심합니다. 이걸로는 복음을 알 수가 없고, 힘이 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걸로 신앙을 비교하고, 판단하시면 안됩니다. 이런게 없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미련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속았다 그러면서 떠나시겠습니까?

신앙은 기쁨, 잘됨, 유익, 축복에서 출발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러나 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절망이라고 하는 인간의 실존과 세상의 상태에서 출발하는 게 좋습니다. 절망에서 출발 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복과 구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을 점검하는 최고의 방법은 축복이 아니라 ‘절망’입니다. 나에게 기쁨이 있는가, 기적을 체험했는가? 사랑이 있는가?로 점검하기 이전에 절망을 알고 있는가? 절망하고 있는가? 이것을 먼저 봐야 합니다.

자신에게 얼마큼 절망하고, 실망하고 계십니까? 자신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을 얼마나 실감하십니까? 그러나 내가, 그러나 돈이, 그러나 나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아직은 아닙니다. 더 절망하셔야 하고, 더 깊게 하나님께 항복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깊게 절망해야 합니다. 절망하지 않는데 복음이 들리겠습니까? 절망 속에서 부른 하나님만이 구원의 하나님으로 다가 오십니다. 자신에 대해서, 이 사회에 대해서, 이 나라에 정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깊게 절망해야 됩니다. 편만 들면 안됩니다. 절망해야 새 길이 생기고, 고침이 생깁니다.

깊게 절망할수록 깊은 희망이 나옵니다.

의지와 믿음은 자신에게 절망하여 ‘그러나. 나’를 버리고,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오랜 습관으로 남아 있는 ‘그러나 나’, 버릴 때가 됐습니다. 버리십시오. 버리시고 ‘그러나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주님 처럼, 나도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은혜의 보좌에 앉혀 주셔서 세상이 아니라, 사탄이 아니라, 육체의 욕심이 아니라, 주님의 다스림 속에 살아가는 영광된 자리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실망과 절망이 포진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럴수록 ‘그러나, 하나님’을 더 깊고, 깊게, 신중하게 말하셔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는 신앙의 자리를 확보하고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신앙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