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5. 주일 설교: 내 안에 새겨진 그리스도(갈6:12~17). 김명숙 전도사.

 

말씀: 내 안에 새겨진 그리스도 (갈 6:12-17)

우리는 모두 세월을 지나며 우리 몸에 크고 작은 굳은 살과 주름살과 자국들을 만들고 남기며 살아갑니다. 마음에도 기쁨과 아픔이 고스란히 추억과 경험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 곁에 함께하는 물건들, 닳고 헤지는 옷과 신발을 보면서도 삶의 흔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자국들마다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아기와 할머니 손을 그린 이 그림을 보면 세월에 따른 흔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림의 할머니의 굵어진 마디와 굽은 손이 저의 할머니 손과 많이 닮았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노년에 실명하시고 치매로 많이 고생을 하셨습니다. 어느 겨울날, 거친 손을 보이시며 어린 제게 크림을 발라 달라던 할머니 손을 외면하고 잠을 잤던 것이 지금도 얼마나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모릅니다. 그 까칠하고 거친 손으로 저를 많이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지금이라면 말씀하시기 전에 손 잡아 드리고, 크림도 발라 드리고, 마사지도 해 드렸을 텐데요. 그땐 너무 철이 들지 않았습니다.

1.
본문의 사도 바울은 예수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며 온 몸과 마음과 영혼에 재겨진 지울 수 없는 자국입니다. 바울은 이 상처 자국을 그 당시 유대인들의 삶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 헬라어인 ‘스티그마(στίγμα)’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스티그마는 자국, 마크를 뜻합니다. 당시 동물이나 사람에게 달군 쇠로 몸에 도장을 찍어 지워지지 않도록 하는 표입니다. 이 낙인의 첫 번째 의미는 주인의 소유라는 표입니다. 당시 누구에게 속한 가축인지 나타내는 표식으로 가축에게 자국을 남겼습니다. 목축 농경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가축과 섞여도 이 마크를 보며 구분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사람인 노예의 몸에 주인의 이름을 인두로 새겨 놓습니다. 노예가 도망해도 이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노예는 다시 주인에게 되돌려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의미는 주인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라는 표입니다. 낙인이 있는 가축이나 노예는 주인에게 자기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주인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주인의 손에 의해 가축은 키워지고, 사람은 통제를 받으며 명령대로 살게 됩니다. 거대한 식민지 군대조직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 로마는 몸은 아니지만 군사들의 복장에 군 소속과 지휘관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그 병사는 군대와 상관의 지휘 아래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세 번째 의미는 주인의 손에 생명과 죽음까지 달려 있음의 표입니다. 낙인이 없는 동물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태어나고 살다가 죽습니다. 그러나 낙인이 찍힌 가축은 생명과 죽음이 주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주인에 의해 젖을 공금하는 용도로, 번식용으로, 그리고 최종 식용 고기로 그 생을 마감합니다. 노예의 경우도 주인의 집에서 주인의 필요에 의해 일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죄에 대한 대가로 죽이고 살리는 권한도 주인에게 주어졌습니다.

스티그마! 가축과 노예에게는 주인에게 소유권과 의사결정권과 생존권까지 있음을 의미하는 단어를 바울은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다고 고백하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 흔적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소유된 종이요, 예수님께 복종하는 종이요, 예수님께 생명과 죽음도 달려 있는 종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자신이 지닌 예수의 흔적의 의미를 유대인들이 깊이 인식하는 할례를 들어 이야기를 풀어 갑니다. 12절-13절에서 말씀합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유대인은 할례가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구원 받을 수 있는 몸의 증거라고 여겼고 이를 자랑하였습니다. 유대교의 뿌리 깊은 선민사상의 영향 아래 있던 율법주의자들은 갈라디아 교회의 이방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유대인과 같이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정치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통제하였지만 종교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유대교는 공인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리스도교(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쯤으로 여겨 핍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가 다르며, 이미 반역죄로 십자가에서 처형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독교가 커지자 로마에 위협하는 신흥종교로 여겨 박해를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로마의 박해 속에서 율법주의자들은 로마로부터 기독교인이라는 위협을 받을 때에는 할례 받은 것을 증거로 유대교인이라고 주장하며 로마로부터 핍박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믿지만 할례를 받아야 언약의 백성의 증거가 되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할례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를 오고 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유대교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오는 박해는 피합니다. 반면 교회 안에서는 유대 율법인 할례를 받은 전통을 따르고 경건한 자라고 칭찬받고 자랑합니다. 고통 없고 희생 없는 편안한 종교생활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할례를 하고 종교활동에 열심이 있었어도 예수의 십자가가 없는 신앙은 참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3.
14절에서 바울은 할례를 자랑하는 이들에게, 할례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할례, 종교 의식은 경건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엔 경건의 내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며 종교생활을 하지만 예수님이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눈물이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고통은 피합니다.

바울은 할례를 자랑하는 율법주의자들처럼 자신의 할례를 비롯한 종교적 배경을 넘치도록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뿐이라고 고백합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며 저주의 형벌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 십자가의 박해를 피하려고 했지만, 바울은 온 몸으로 십자가를 짊어집니다.

4.
15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말씀합니다. 새로 지으심, 즉 새 생명은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됩니다.

예수와 죽음으로 새 생명을 얻습니다. 로마서 6:4에서 세례의 의미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으로며 예수의 생명이 몸에 나타납니다. 고린도후서 4:10-11에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워가는데 흘린 고난과 눈물의 이야기, 그 십자가가 바울의 몸에 새겨져 있습니다. 고난에서 자유하는 종이요,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 종입니다.

5.
우리는 모두 삶의 흔적을 지니고 삽니다. 그 흔적 중에 가장 깊이 새겨진 것은 무엇입니까? 영혼 깊이 가장 자랑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기를 소망합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 몸과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새겨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께 나의 모든 소유권이 있음을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나, 배우자, 자녀, 집, 지식, 경험, 건강, 생명, 죽음 등등)을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몸에 짊어지며 감내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초대역사에서 십자가를 실제 몸에 짊어진 동화같이 빛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황해도 소래교회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성경을 읽으며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이 자생적으로 모여 세운 교회입니다. 이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서울로 내려가 언더우드 선교사를 찾아 갑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들이 말씀은 잘 알았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주저하였습니다. 그러자 일제히 옷을 벗었는데 등 뒤에 각자 나무 십자가를 메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에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들 모두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순전한 마음을 잃어가는 우리들에게 고개를 숙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6.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위해 그 몸에 우리의 이름과 우리를 위한 희생의 상처 자국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손바닥에 이름을 새기시고 잊지 않으시며 우리의 처소를 살피시고 계십니다. “보아라, 예루살렘아,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을 늘 지켜 보고 있다”(사 49:16).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친히 못 박히셨습니다. 그 못 자국과 상처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눈물과 고통이 담겨 있습니다.

7.
가만히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 보길 원합니다. 내 삶에 예수님과 어떤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지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눈물이 내 몸에 상처가 될까봐 십자가를 피하고, 걱정 근심 없는 편안한 종교생활을 쫓지는 않았는지요?

깊어가는 가을날, 세월을 함께하는 부모님, 남편, 아내, 그리고 자녀들의 손을 감싸주시며 그동안의 삶의 수고를 감사하고 격려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흔적이 새겨져가는 가족이 되길 서로 축복하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