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는 설교(2019.12.29): 딥러닝, 꿈(사11:6~9). 양은익 목사. 2020.10.4

 


말씀: 마가복음 강해 46: 딥러닝, 꿈(사11:6~9)

(편집영상입니다. 원본영상은 2019.12.29 설교 참조하십시오) 

1.
메모해둔 문장 보면서 시작하겠습니다. ‘후회가 꿈을 대신하는 순간 인생은 늙기 시작한다’ (지미 카터, 나이드는 것의 미덕). 멋있지 않습니까? 후회대신 꿈을 꾸라는 것입니다. 한번 살펴보시겠습니까? 후회가 많은가? 꿈이 많은가? 꿈이 많으면 ‘내 나이가 어때서’, 후회가 많으면 ‘이 나이에 뭘!’. 이렇게 되겠지요.

과거는 후회하면 안되고 회개해야 합니다. 후회의 회개의 차이를 아십니까? 후회는 ‘왜 이렇게 못낫지. 죽어버릴까! 끝낼까! 그만할까!’로 나가는 것이고, 회개는 ‘왜 이렇게 못낫지. 근데 이대로 물러설 수 없지. 한번 더 해보자’로 나가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희망이고, 꿈입니다. 후회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후회 계속 해 보십시오. 뒤만 보면서 속상해하다가 늙어 버립니다.

오늘 배우기 원하는 깊은 배움의 주제는 ‘꿈’으로 잡아 봤습니다. 주님께서 품으신 꿈을 배우면서, 자잘한 것들에 매여서 꿈을 잃어 버린채 무겁게만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지는 기쁨’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홀가분하다’. 말이 좋지요! 서울대 심리학과에서 조사한 걸 보니까 한국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마음이 ‘홀가분’한 것으로 나옵니다. 근데 짠한건 있습니다. 사는 게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그토록 홀가분해지기를 바랄까?

꿈이 잘못되고, 헛된 희망을 갖게 되면 그 꿈에 눌려서 더 힘들어 지는데 그런 꿈이 아닌, 우리를 힘있게 만들고, 가슴 벅차게 만드는 그런 진짜 꿈, 진짜 희망이 절실합니다. 이런 꿈 어디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 있다는 것, 신앙인들만이라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2.
딤후 3장 보겠습니다. 2절 입니다. 로마가 지배하던 1세기 지중해 연안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딤후3:2~5a)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이 몇개인지 세 보셨습니까? 20개가 나옵니다. 이렇게 살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자기만 사랑하고, 돈 사랑하고, 교만하고 하나님 모독하고 무정하고 원한 품고, 비방하고, 난폭하고 자만하고. 부정과 불의와 비방과 미움으로 가득찰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꿈이 무엇입니까? ‘건물주. 임대 사업자’. 아이들이 엄마 아빠 얘기 몰래 듣고 있다가 ‘안전빵’쪽으로 가는 겁니다. 사회가 잘못되면 살아남아야 하니까 제대로 된 꿈을 갖기가 힘듭니다.

이런 세상에 누가 등장합니까? 로마의 식민지 유대 땅 나사렛 출신의 청년 예수가 등장합니다. 등장해서 꿈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희망입니까?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있고, 다른 세상이 가능하니, 여러분들, 그 세상을 희망하고, 꿈을 꾸십시오’

막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선포하면서 어떤 이들을 만나십니까? 척박한 팔레스타인 곳곳을 다니며 힘없는 이들, 아픈이들, 버림받은 자들, 약한 자들 만나면서 사랑과 섬김과 치유와 희생으로 다스려지는 나라를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종교라는 선입견에 걸려서 이런 사실을 잘 보지 못하는데 놀라운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꿈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은 모든 이들이 공평과 정의로 사랑 가운데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 한번도 이루어보지 못한 그 세상을 만들어 가는 그런 꿈을 가지고 계셨고, 그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 눈물 많은 이 땅에 당신의 꿈과 사랑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꿈을 하나님에게서 배웠기에 주님의 꿈은 하나님의 꿈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에덴의 동산’입니다. 세상 만물이 함께 하며 어떤 해함도 없이 동산에서 거니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의 세상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반역으로 망가진 에덴의 동산이지만 이 꿈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폭력과 타락을 보면서 심판하시지만,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부르시고 회복하사 당신의 꿈을 이루기를 멈추지 않으신게 구약의 역사입니다.

3.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의 본문이 바로 하나님의 꿈이 나타난 아름다운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을 거역하며 망해가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복됨과 승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11:1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다.

이새는 다윗 왕의 아버지입니다. 그 다윗왕의 줄기와 뿌리에서 새로운 왕, 메시아가 나와 열방을 다스리는, 에덴과 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암울한 이들에게 전해주는 희망이고, 꿈입니다. 왜 이런 꿈을 말씀해 주셨겠습니까? 힘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읽기를 좋아하셨던 주님은 이사야서 곳곳에 나오는 하나님의 꿈을 읽으면서 가슴이 벅찼을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나 보십시오.

(1) 하나님의 꿈 1: 화해와 평화의 세상(6절)

6절입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묘사가 기막힙니다. 이리, 표범, 사자는 포식자고, 양과 염소, 송아지는 그들의 먹이감입니다. 하나는 강자고, 하나는 약자입니다. 쫓고 쫓기는 사이. 약자는 언제나 불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는 세상인데, 그런 세상이 끝납니다. 더 이상 쫓기지 않아도 됩니다. 흑인들이 흑인 전용 버스, 흑인 전용 식당에 다니지 않아도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강자와 약자, 능력있는 사람과 부족한 사람이 함께 하는 평화와 화해의 세상. 하나님이 꿈꾸시는 세상입니다. ‘함께’라는 단어 계속 나오고 있는 것 보셨습니까? 5번 나옵니다. ’함께 살며, 함께 누우며, 함께 있어, 함께 먹으며, 함께 엎드리며’.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었는데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어서와. 환영해. 함께 살자. 함께 먹자’

내 편만 오라가 아닙니다. 필요하니까 오라가 아닙니다. 부족해도 오고, 아파도 오고, 다 와서 함께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2) 하나님의 꿈 2: 에덴의 회복, 만물의 변화(7절)

7절입니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곰과 사자는 잡식인데, 이들이 전부 풀을 먹게 됩니다. 세상의 질서가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짐승들이 풀을 먹는 것은 에덴의 회복입니다.

에덴은 순한 동네고, 에덴 밖, 에덴의 동쪽은 지독한 동네입니다. 에덴 밖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고, 고통을 당해 왔습니까? 그런 세상의 질서가 바뀌게 되는 겁니다. 악에서 선으로, 잔인에서 배려로. 꿈꿔 볼만 하지 않습니까?

(3) 하나님의 꿈 3: 저주의 제거, 적대 관계의 사라짐(8절)

8절입니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갓난쟁이들이 독사, 코브라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창3:15에 의하면 뱀과 여자의 후손은 서로 공격하는 적대적인 관계인데, 이제 그 저주가 풀려 서로가 무서워하지 않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저주가 없는 세상입니다. 모든 원한이 풀려지고, 용서가 있는 세상. 이 꿈을 품고 계십니다.

9절에 하나님의 꿈이 오롯히 정리되 있습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아멘. 하나님의 꿈이고, 주님의 꿈이며, 우리가 ‘이어 받아’ 꾸어야 할 꿈입니다.

4.
(1) 이런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정글과 같은 적대적인 세상 한복판에서 화해와 평화를 만들어 가는 꿈을 가지고, 그 꿈을 만들어 가는 삶을 사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이 절망적일수록 이 꿈을 가져야 합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눈에 빛이 납니다. 꿈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고 힘차게 만듭니다. 모세가 마지막 순간까지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은 이유(신34:7)가 뭡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복낙원의 꿈이 있습니다. 만물은 반드시 회복될 것입니다. 이 꿈을 하나님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함께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주를 따르는 주의 제자들입니다. 자부심을 느끼셔도 됩니다.

하여, 이 꿈을 매순간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독사 같은 사람을 만나도 어서와 함께 합시다. 부족한 사람을 만나도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없는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물이 바다에 넘침 같이 내 안에 넘칠 때 믿음이 생기고, 사랑이 생기고, 소망이 생겨, 환대가 나오고, 용서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꿈이 없으면 세상을 추종하게 되고, 신앙이 유치하게 보이고, 모든 것이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 처럼 살게 됩니다. 짜증과 욕심만 많아지게 되고, 불안할 때가 많아질 겁니다.

(2) 교회가 할 일, 신앙인들이 할 일은 이 꿈을 보여 주고, 전하는 것입니다.
꿈과 희망이 고작 이 세상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 꿈이 보이는 세계, 물질에만 있는 이들에게 이리와 표범과 사자가 어린 양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 젖먹는 아이가 코브라와 함께 노는 놀라운 세상을 보여주고, 전해주는 게 교회의 사명이고, 신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있을 때 교회는 교회다워집니다. 로마시대, 노예와 여자가 사람도 아니었던 시절에 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과 함께 모여, 노예를 형제라 부르고, 여자를 자매라 부르면서 함께 예배했고, 함께 먹었고, 함께 살았습니다. 세상을 뒤집어 놨습니다.

이런 꿈을 펼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실력입니까?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온 세상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실력. 지금도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돌아보시면, 하나님의 꿈에 동참한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선교사로, 어떤 이들은 직장에서, 어떤 이들은 가정에서 사랑으로, 화해로, 평화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꿈을 실천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대열에 합류하십시오.

5.
어떤 꿈을 품고 사셨습니까? 어떤 꿈을 가지시겠습니까? 여러분의 꿈과 희망의 근원에 주님이 꿈꾸셨던 세상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의 꿈을 막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욕심이 막고, 어떤 때는 사단이 막고, 어떤 때는 불신앙이 막지만, 이겨내서 주님이 품으신 꿈을 꾸는 자로, 그런 가정으로, 그런 교회로 서 나가야 합니다.

정동목 시인의 ‘꼭 가야할 길’이라는 시 보고 마칠텐데, 이 마음의 노래가 ‘주의 꿈을 따라가는’ 여러분들의 마음과 기도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걸어가지 못하는 길을
나는 물이 되어 간다.

흐르지 못하는 길을
나는 새벽 안개로 간다.
넘나들지 못하는 그 길을
나는 초록으로 간다.

막아도 막혀도
그래도 나는 간다
魂이 되어 세월이 되어.
(정동목, 꼭 가야할 길)

막아도 막혀도 이 큰 꿈, 포기하지 말고 밀고 나가는 은혜와 용기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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