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는 설교(2019.6.2): 일어나라, 생명의 선언(막5:21~43). 양은익 목사. 2020.9.27.

 

마가복음25:  일어나라, 생명의 선언(막5:21~43)
2019.6.2.

1.
오늘 본문에는 ‘한계에 부딪친 사람들’,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손을 내미는 모습이 나옵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그렇구요, 혈루병으로 오랜 시간을 힘들게 지냈던 여인도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상황으로 보면 포기할만한 상황입니다. 남아 있는게 별로 없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금방 죽는 걸 보면 아버지 야이로는 대단히 위급한 순간에 주님께 온게 분명하구요,  26절에서 보는 것처럼 혈루병 여인도 할만큼은 한게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진입니다. 거리의 악사가 아닙니다. 이츠하크 펄만(Yitzhak Perlman)이라는 최고의 Violinsist입니다. 이 분의 말 하나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Perlman이 카네기 홀에서 연주를 하는데 도중에 바이올린 줄 하나가 끊어졌다고 합니다.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당황하지 않고 손잡는 법을 바꿔서 연주를 끝까지 마치게 됩니다. 이 상황을 다 알고 있는 청중들이 연주를 마치자 환호하게 됩니다. 그때 이작 펄만이 청중들을 향해서 한마디 합니다.

‘남아 있는 것으로 음악을 만드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 살다보면 줄도 끊어지고,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중단하는 게 아니라, 남아 있는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인생이고, 그것까지도 자신이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새길만한 멋진 말 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와 혈루증 여인이 보여 준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입니다. 이 사람들 보십시오. 남아 있는게 뭐가 있습니까? 별로 없지만 그런데도 손 내밀고, 찾아가고, 움직이는데, 그 작은 움직임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아픈 얘기’가 아니라 ‘일어나는 얘기’입니다. 죽은 소녀도 일어나고, 혈루증 여인도 일어나고. 일어나는 이들을 보면서 우리도 ‘일어나야’ 합니다.

2.
오늘 본문에 보면 어떻게 일어나는가? 분명하게 나옵니다. 어떻게 일어나는가 보십시오. ① 말로 일어나고, ② 믿음으로 일어납니다. 일어나기 원하면 이 둘을 잘 봐야 합니다.

(1) 말(씀)로 일어남.
본문을 보면 주님의 말, 말씀이 나오는데 요즘 말로하면 주님은 말을 참 예쁘게 하십니다. ① 혈루병 여인에게 한 말이 34절에 나오는데 이 말이 이 여자를 회복시키고, 일으켜 세웁니다. 상황 보셔서 알겠지만, 예수님 옷에 손 댓다가 엄청 쫄고 있습니다. 누구든 만지면 안되는 부정한 사람인데 허락도 안받고 예수님 만졌다가 만진 사람을 찾으니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야단 맞을 각오하고 자수하게 되는 데,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해라’

말이 참 예쁘지요? 덕담 중의 덕담을 해 주십니다. 병으로 고생하던 12년 동안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을 주님으로부터 듣고 있습니다. 엄청난 말 폭탄으로 시퍼렇게 멍든 가슴을 가지고 있었을텐데, 모르긴 몰라도 이 말 한 마디로 깨끗해 졌을 것 같습니다. 욕이나 먹고 살던 사람에게 ‘딸아’라고 불러 주시면서 ‘너를 구원한 것은 내가 아니고 너 자신이니 부담 느끼지 말고 평안히 가라. 가서 다시는 아프지 말고 건강하라’ 주님의 이 말로 사실은 치유가 완성된 것입니다.  몸만 낫고 갔다면 이 여자는 일어서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 예쁜 말씀이 혈루병으로 만신창이 된 여자의 삶을 온전히 일어서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② 36절에 보면 주님은 회당장에게도 한 말씀하십니다. 뭐라하십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무릎 꿇을 수 없는 회당장이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어렵사리 주님을 모셔 가는데 그 새를 견디지 못하고,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얼마나 낙심이 됐겠습니까? 죽었다는 소식만으로도 힘든 사람한테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제 다 끝났으니 선생 더 괴롭게 하지 말고 그만 보내라’(35절)

참 야박하고, 차가운 말입니다. 야이로에게 예수님은 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카드였고, 희망이었습니다. 하지만 딸이 죽었으니 당장 보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죽었으니 소용없게 됐다는 것이고, 게임 끝났다는 것입니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만으로도 힘든데, 위로는 커녕 이제는 ‘꿈 깨라’는 주문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현실적이고, 냉정합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아무 것도 살릴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소리 듣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아직 꿈 깨지 말라는 것이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겠지만 위로가 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서 한 일이 뭡니까? ‘달리다굼, 애야 일어나라’(41절). 말씀으로 ‘일어나게’ 만드십니다. 말로 기를 꺽고, 말로 비웃는 사람들 앞에서, 주님은 말씀으로 생명을 주십니다. 똑같은 말이지만 이렇게 다릅니다.

이 장면은 주님께서 가지신 권능으로 읽어도 되지만, 말이 가지고 있는 말의 능력, 말씀의 능력으로 읽어도 됩니다. 주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말이 가진 능력을 보면 좋겠습니다. 말은 힘이 있습니다. 말은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닙니다.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고, 사람을 죽이는 능력도 있습니다. 말의 힘은 셉니다. 사람의 말도 힘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도 힘이 있습니다. 힘이 있기에 잘 써야 하고, 좋게 써야 합니다. 잘쓰면 사람을 일으키고, 잘못쓰면 사람을 쓰러뜨립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법사의 주문 하나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아브라-카다브라’. 아람어입니다. 달리다굼도 아람어입니다. 예수님이 쓰던 언어가 아람어입니다.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할 때 아람어를 헬라어로 기록했지만 달리다굼은 주님이 쓰던 아람어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생명이 있는 말씀이기에 그대로 기록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아브라-카다브라. ‘말하는 대로 이루어져라’.  이 말입니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니까 악담은 하면 안됩니다.

우리 몸의 근육 중에서 가장 위험한 근육이 ‘혀’라고 합니다. 혀 그림 보십시오. 혀 앞에 뭐가 있습니까?  ‘이’가 있고, ‘입술’이 있습니다. ‘이’와 ‘입술’을 ‘혀’를 막고 있는 이중문이라고 합니다. 혀가 너무 위험해서 이중문으로 잠궈 놨다는 겁니다.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옛 사람들의 해석입니다. 혀는 잘쓰면 약이지만, 잘못쓰면 독이 됩니다. 이게 말이고, 말의 힘입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나온 사람의 얘기가 있습니다. 부모님은 실종되고, 15살 누나와 8살 남동생이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게 됩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남동생의 신발이 없는 걸 보고, 누나가 동생한테 한 마디 합니다. ‘너는 왜 그렇게 멍청하니. 자기 물건 하나 간수 못해!’ 보통하는 말 그대로 했고, 이 말이 남동생한테 건넨 마지막 말이 됐습니다. 그 뒤로는 동생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누나가 아우슈비츠에서 나올 때 맹세를 합니다. ‘어떤 말이 마지막 말이 될지 모르니 견딜 수 없는 말은 절대하지 말자’.  마지막 말이라는 것도 모르고 야박한게 말한게 너무 힘들어서 한 맹세입니다. 말은 듣는 사람만 죽이고, 살리는 게 아닙니다. 하는 사람도 죽일 수 있고, 살릴 수 있습니다. 말 잘못해서 후회하고, 아파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잘못하면 이 누나처럼 마지막 말이 견딜 수 없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말의 권세, 말의 능력을 새롭게 보면 좋겠습니다. 넘어진 이들, 쓰러진 이들 어떻게 일으킬 수 있습니까? ‘말’로, ‘말씀’으로 ‘일어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 기억하십시다. 여러분들의 말이 일으켜 세우는 생명의 말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고통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2) 믿음으로 일어남
어떻게 일어나는가? 두 번째 조건은 믿음입니다. 야이로의 딸이 일어난 것도 믿음이고, 혈루병 여인이 나은 것도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손을 얹고, 그분의 옷에 손만 대면 회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결국은 그들을 일어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가진 간절함이 믿음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유영모 선생이 믿음을 우리 말로 풀이한 게 있습니다. 믿음은 ‘밑-소리’라는 것입니다. ‘바닥 소리’라는 것입니다.  내 존재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믿음’으로 본 것입니다. 

야이로의 ‘밑소리’, 혈루병 여인의 ‘바닥 소리’가 뭐겠습니까? ‘고쳐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 이거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힘들고,아프고, 위급할 때 내뱉는 ‘바닥 소리’.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일으켜 주십시오’. 이 밑소리가 믿음이 된 것이고, 이 밑소리가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자신의 밑-소리가 어떤지 꼭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밑-소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소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 믿음이 ‘일어나게’ 만들 것입니다.

3.
이자크 펄만의 말 다시한번 새깁니다. ‘남아 있는 것으로 음악을 만드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 우리 또한 남아 있는 것으로 삶을 만들어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살다 보면 남아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 순간이 올 수 있습니다. 그 때마다 바닥에서 일어난 이 사람들을 기억하십시오.

어떤 고통도, 어떤 슬픔도 마지막이 될 수 없다는 강한 희망을 주님은 보여 주고 계십니다. ‘달리다굼’, ‘일어나라고 하는 생명의 선언’이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비웃음’이라는 죽음의 기운으로 거절하지 말고, 받으십시오. 권세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믿음으로 받아내서 ‘일어나고’, ‘살아나는’ 신비한 주의 은혜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