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5.31. 주일 설교. 난관돌파4: 성령 안에서, 성령과 함께(요16:1~8). 양은익 목사. 성령 강림 주일

 

난관 돌파 4: 성령 안에서, 성령과 함께 (요16:1~8)

1.
전해 오는 얘기 한 대목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느날 스승이 제자들에게 그림 숙제 하나를 내 줬다고 합니다. ‘평화’에 대한 그림을 그려와 봐라. 어떤 그림을 많이 그려 왔을 것 같으세요? 제자들은 잔잔한 호수, 창공을 나는 새들, 저녁놀이 지는 목가적인 농촌 풍경 같은 그림들을 잔뜩 그려 왔다고 합니다. 스승이 말합니다. ‘이건 평화가 아니다. 이런 평화들은 폭풍 한 번 불면 다 날아간다. 다시 그려와!’ 그러는데, 멀찍히 떨어져 있던 그림 하나를 보게 됩니다. ‘푹풍우가 몰아치는 곳에서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고 있는 그림’ 이었는데, 그 그림을 보면서 ‘바로 저게 평화다’ 그러면서 칭찬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칭찬해 준 이유가 뭔지 아시겠습니까?

스승은 평화가 ‘상태’가 아니라 ‘관계’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는데, 이 그림이 스승이 원하는 답을 그려냈던 것입니다. 상태로서의 평화는 스승이 말한 것처럼 상태가 나빠지면 평화도 깨집니다. 하지만 관계로서의 평화는 상태가 나빠져도 서로의 관계를 통해 힘든 상태와 상황을 이겨 나갈 수 있기에 평화가 쉽게 깨지지 않습니다. 스승은 어미 닭과 병아리가 폭풍우 한 복판에서도 밀어내지 않고 품어주는 모습 속에서 평화를 본 것이고, 이런 평화만이 난관을 극복해 나갈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난관과 어려움을 겪을 때 마다 절실한게 뭡니까? 평화 평안 잔잔함인데 이런 잔잔함은 관계속에서 나옵니다. ‘서로 사랑하고, 믿어주고, 헌신 할 때’ 거친 풍랑 한 복판에서도 잔잔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관계가 주는 이런 평안이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2.
난관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주님 말씀 기억해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고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내 친구다. 서로 사랑하라. ‘관계’로 난관을 헤쳐 나가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상태를 알려주는 단어가 16장 본문에 나옵니다. 1절 실족. 6절. 근심. 33절. 평안이 아닌 불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그들에게 안겨준 시련이고, 난관입니다. 주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실족하지 말고, 근심에서 벗어나 평안하기를 원하셨고, 그러기에 13장부터 계속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게 하나 있는데, 14:26. 15:26. 16:7. 보혜사 성령이 와서 너희와 함께 하며, 너희를 도울 것이다. 이겨내라.

33절 보십시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평안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라’. 평안은 세상을 이기신 주님 안에 있을 때, 주님과 동행할 때, 관계할때, 주의 영이신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할 때 평안이 옵니다.

3.
1절에서 보는 것처럼, 지금 제자들의 상태는 실족의 상태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3년간 믿고 따랐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 버리는 순간입니다. 예수와 한 편에 서 있다는 이유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함이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철회하고,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 않은 상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실족은 난관이 만들어내는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난관이 오면 사람은 실족합니다. 무너지고, 흔들립니다. 신앙인들은 실족하면 믿음이 흔들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으로 복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아프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보시면 알겠지만 교회 언저리, 신앙 언저리에는 수 많은 실족이 있습니다. 교회만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도 실족이 없는데가 없습니다. 실망하고 흔들립니다.

하나님때문에 실족하고, 목사 때문에 실족하고, 믿는이들 때문에 실족하고, 정치한다는 사람들 때문에 실족하고, 청소년들은 부모 때문에 실족하고. 직원들은 회사에 실족하고, 회사는 직원들에게 실족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실족해서 관계를 끊고, 냉소적으로 변해 버립니다. 이런 기운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실족하면 난관을 돌파 할수 없는데 실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4.
주님이 실족한 제자들에게 내미신 회심의 카드가 성령의 보내주심입니다. 자신은 십자가를 지겠지만, 진리의 성령이 와서 무엇이 죄인지, 심판인지 의인지 밝혀 줄 것이고, 그들의 보혜사가 되서 위로하고 인도해 줄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약속과 위로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우리라도 그러지 않았을가요? 사람은 힘들면 앞에 아무리 좋은게 예비돼 있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럴만한 상상력도 별로 없고, 아량도 없습니다. 주님은 성령의 오심을 3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도 반응 없는 제자들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약속하신 성령이 오고 나서야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했는지 알게 됩니다. 약속하신 성령은 주님 부활하고 50일 후에 오십니다. 공교롭게도 오늘이 성령께서 오심을 기념하는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14:18에서 주님은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돌아온다’ 말씀하셨는데 약속한 그대로 그들의 명절인 오순절 날에 강한 불의 바람처럼 이 땅에 임하십니다.

성령은 구약시대에도 오셨지만 그 때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함께 하는(with) 방식으로 오셨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요엘서 2장에서 예언한 것처럼,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내주 하시는(within) 방식으로 오십니다. 오신 이유는 우리의 유한함 때문입니다. 유한한 사람은 무한한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성부 하나님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는 성자의 성육신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강림입니다. 성육신은 성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사건이고,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해서 하나님을 체험하게 만든 사건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고, 고백하고, 인식하게 됩니다. 생각과 사변으로만 존재하던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하는 뜨거운, 생생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오순절 날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임하심으로 시작됩니다.

5.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세상의 시각에서 볼 때는 종교인들의 체험 정도로 보겠지만, 우리에게는 인류와 세상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새 시대가 도래한 사건입니다. 행1:8에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나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약속 그대로 실현 됐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콩알 만큼 작게 시작한 복음을 싫든, 좋든,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우리가 지금 듣고 있지 않습니까?

‘권능을 받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지칠지 모르는 능력으로 인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5:17에서 고백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성령의 권능이 만들어낸 변화입니다. 새 세상, 다른 세상을 만났다는것입니다.내가 나를 보호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밖에 없는, 내가 전부인 세상에서 하나님을 언제든지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세상,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세상으로 옮겨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관심을 가지시고, 사랑을 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 벅차게 외치는 겁니다. “보라 나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고, 새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성령이 임하면 이것을 알게됩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고, 사람들과 화목하게 됩니다. 이게 우리가 받은 최고의 권능이고, 성령 강림의 뜻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과 능력에 참여하는 인생과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무능과 무력함과 무자비함과 죄를 뚫고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을 마치 개인 비서 정도로, 힘이 없을 때 쓰는 보조 배터리 정도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자기 할 일 다하고, 자기 뜻 다 내세우다가 힘에 부칠 때 성령을 찾고 구하면서 도와 달라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성령은 그런 정도의 분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6.
성령으로 난관을 극복하라 말씀 드리는 것은 우리의 난관에 성령을 이용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령으로 난관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 자이고, 어떤 존재인지를 알 때 오게 되는 극복입니다.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Remember who you are). 이 구호처럼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고, 하나님이 내 인생과 존재를 책임져 주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능력 속에 있고, 얼마나 큰 품 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십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이 목적하시는 곳으로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난관이 없는 곳도 없고, 난관이 없는 때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여러분의 영혼과 가정과 자리를 충만하게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됩니다. 거기에 길이 있고, 평안이 있고, 돌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받은 자로 살아가는 이해와 감사로 가득한 성령 강림 주일 아침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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