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9. 주일 설교: 눌림에서 누림으로(시16:1~11). 양은익 목사.

 


말씀: 눌림에서 누림으로(시16:1~11)

1.
오늘은 ‘누림’에 대한 묵상을 하면서 우리의 삶이 눌림이 아니라 누림으로 가득한 삶 되기를 기대하면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지난 주에 본 싫증은 무언가에 눌리게 되면 나타납니다. 싫증나지 않으려면 눌리는 대신 누려야 합니다. 눌리면 싫증이고, 누리면 기쁨입니다. ‘눌림에서 누림으로’, 가 볼만한 길입니다.

무엇을 누려야 하는가? 누려야 할 게 많은데 누리고 싶은 게 무엇입니까? 누림을 말할 때 빠지면 섭섭한 것 있습니다. 부귀영화.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누림을 말할 때 불변의 1순위 입니다. 한번 쯤은 겪고 싶은 누림입니다. 누려본 사람이 별로 없어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는 누림입니다. 요즘은 부귀영화가 아니라 소확행(小確幸)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작지한 확실한 행복을 누려보고 싶어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큰 누림이든, 작은 누림이든 눌리지 않고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 사람 마음임을 일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뭘 누려야 할까요? 하나님이 기회 주시면 부귀 영화도 누릴 수 있습니다. 소확행의 누림도 필요합니다.하지만 이런 누림만 가져서는 안되겠지요! 우리는 신앙의 삶, 신앙 생활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누림이 중요합니다.

2.
시편 16편을 읽었습니다. 읽으시면서 시의 분위기가 ‘눌림에서 누림으로’ 변해가는것을 보셨는지요? 빛으로 비유하면 처음에는 막막한 어둠이지만, 나중에는 환한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1절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깊은 탄식과 탄원입니다. 눌려있습니다. 시편 16편의 표제어가 ‘다윗의 믹담’으로 되있습니다. 믹담이라는 말은 확실한 뜻을 모르는 단어입니다. 여러 설명이 있지만 추정하는 정도입니다.

믹담이라고 쓰여있는 시편이 여섯편 있는데(시16. 시56~60편), 여섯편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같이 심각한 위험과 심한 눌림이 있습니다. 16편.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56편.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 59편.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60편.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60편)

모두 다 눌림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 좀 지켜 주세요’ 많이 눌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눌림이 누림으로 바뀝니다. 어둠이 빛으로 바뀌고, 단어가 바뀌고, 마음이 바뀝니다. 8절부터 다시 볼텐데 어떻게 이렇게 변했는지 궁금해 하시면서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손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16:8~11)

단단함이 느껴지십니까? 눌림으로 떨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기쁘다, 즐겁다. 충만하다’ 누리고 있습니다. 뭘 누리고 있습니까? 부귀도 영화도 아니고, 하나님을 누리고 있습니다. 힘든 눌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분인지를 발견하고, 고백하면서 이겨 나가고 있습니다.

3.
1절에서 7절에 보면 하나님에 대한 네 가지 고백을 시인이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누구인가?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1절), 하나님은 나의 주권자(2절), 하나님은 나의 보물(2절), 하나님은 나의 상담자(7절).

이 고백 어떻게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고백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심한 눌림이 있을 때 어떻게 합니까? 세 가지 유형의 반응이 나옵니다. ① 욥의 아내처럼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 버려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갈 길을 갑니다. ② 하나님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자기 뜻대로 계속 밀고 나갑니다. ③ 아픔이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기대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세 번째가 우리가 갈 길입니다. 눌릴수록 하나님을 찾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은 어둠과 눌림 속에도 계시고, 밝음 속에도 계십니다. 모든 곳에 계십니다.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을 찾게되면 흔들리지 않는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파스칼이 한 말, 한 구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자기 주변에 있는 것들로 채우려고 하지만 허사다. 무한한 심연은 오직 무한하고 불변하는 대상 즉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다’(팡세 113)

누림의 꿈을 크게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 가지면 누린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누림으로는 턱도 없다는 것입니다. 무한한 심연을 가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한하신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을 찾을 때 참된 만족과 누림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도 이 말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느8:10)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왔기에 하나님이 계셔야 힘이 납니다. 하나님을 기뻐 할 때 모든 눌림을 누르는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시37:4 보십시오. ‘여호와를 기뻐하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 내 마음의 소원보다 크고, 앞서야 됩니다.

욥22:25.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다’ 가장 귀한 보물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비교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전능자가 최고의 보물입니다. 보화되신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 최고의 누림이고, 기쁨이고, 만족입니다. 하나님을 필요한 때만 찾고 폐기하는 하나님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필요한 때만 찾고 입 닦는 사람을 뭐라 말합니까? 두 글자. 얌체. 이러면 눌림에서 누림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4.
하나님이 없게 되면 신앙은 눌림이 되고, 강요가 됩니다. 뭘 해도 힘듭니다. 예배도 힘들고, 기도도 힘들고, 말씀도 지루하고, 싫증이 납니다. 신앙이 기쁨이되고, 즐겁고, 누림이 되려면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누리고, 삶을 누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십시오. 무한히 크고, 신비 가운데 계시지만 묵상하고 찾으면 남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내 안에서 샘솟듯 솟아납니다.

누림으로 가는 중요한 길 두 개가 있습니다. 첫번째 길은 말씀이고, 두번째 길은 기도입니다. 기도가 잊혀지고, 말씀이 사라지면 하나님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보면 됩니다. 두 길이 막혀 있다면 뚫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두 구절의 말씀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① 말씀: 만군의 주 하나님,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말씀을 주셨을 때에, 저는 그 말씀을 받아먹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저에게 기쁨이 되었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렘15:16). 여러분들에게도 말씀이 이렇게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② 기도: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말씀과 기도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기쁨이고, 누림이고, 발견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항상 앞에 모셔 보십시오.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을 선물로 주셔서 모든 눌림에서 벗어나 누리며 사는 기쁨 가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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