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기쁨아 오라(느8:1~12)
1.
오늘은 ‘기쁨아 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기쁨아 오라’. 제목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삶이 눌리고 싫증 날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 나와야 하는 한 마디 있다면 ‘기쁨아 오라!’ 아니겠습니까?
요즘 어떠세요? 기쁨이 오고 있습니까? 달아나고 있습니까? 다가 오면 좋겠는데 달아날때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치약이 아니다’. 유명 카피라이터가 쓴 문장입니다. 사람은 치약이 아닌데, 치약처럼 사방에서 치약 짜 내듯 짜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짜내고 짜내다가 다 쓰면 어떻게 합니까? 폐기 처분, 버려 버립니다. 기쁨이 달아나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도망가는 기쁨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라고 내버려 두실 겁니까? 내버려두면 남는 것은 눌림이고, 우울이고, 허무고, 분노일텐데 그냥 두지 마시고, 잡아 오시기 바랍니다. 그게 능력이고, 성숙이고,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우리의 침체, 우울, 눌림, 지루함이 아니고 기쁨입니다. 이 바램에 부응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도망가는 기쁨’을 잡아오는 마음의 자세를 느헤미야를 통해 찾아 보겠습니다. 기쁨은 어떻게 오는가?
(1) 펑펑 울라.
첫번째 입니다. 기쁨을 오게 하고 싶으면 펑펑 우십시오. 역설이지만 진실입니다. 울어야 울음이 그치고 기쁨이 옵니다. 찬송가에도 있습니다(487장) ‘눈물난 후에 기쁨있다. 애통한 후에 위로있다. 고생한 후에 기쁨있다’
기쁨은 기쁨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기쁨은 눈물이 있는 사람, 아픔이 있는 사람이 기쁨의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울음과 눈물은 힘들지만 기쁨으로 가는 과정에 없어서는 안되는 동반자입니다. ‘울다가 웃다가’ 경험해 보셨습니까?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 웃다가. 거기서 기쁨이 나옵니다. 웃음만으로는 참된 기쁨이 나오기 힘듭니다.
9절 보십시오. 평펑 우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하도 우니까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달래기 바쁩니다. ‘그만 우세요’. 하지만 이 사람들이 기뻐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왜 이렇게 울고 있습니까? 억울해서 우는 게 아니라 그 동안 잘못 산 것 때문에 펑펑 울고 있습니다. 성벽 다 세우고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새벽부터 정오까지 말씀을 듣게 되는데 말씀이 말씀대로 살지 못했던 자신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괜찮게 산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입니다. 부끄럽고, 찔리고. 그런 자신을 참아주신 은혜가 감사하고. 울음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한 명이 아니고 많은 이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던 것입니다.
울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 분해서 나오는 눈물, 서러움의 눈물, 나아닌 너 따문에 흘리는 사랑과 긍휼의 눈물, 감사의 눈물, 회개의 눈물. 많은데 어떤 눈물이든 눈물은 우리를 만져 줍니다. 눈물 한 방울 없다는 게 자랑은 아닙니다. 눈물이 있는 게 눈물이 마른 것 보다 좋습니다.
기도하러 앉았는데 눈물이 주르르 흘러요. 감사한 순간이고, 이 눈물이 결국은 기쁨으로 연결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물 없는 병에 걸리지 마십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 눈물이 있을 때, 그 눈물과 함께 사랑도 살아나고, 믿음도 살아나고, 감사도 살아나게 됩니다.
기도 중에 나오는 뜨거운 눈물이 뭔지 감이 잡히지 않는 분들은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왕년에 흘렸지만 말라 버린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다시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뜨거운 눈물과 함께 멀리갔던 기쁨이 다시 달려 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인정하라.
기쁨이 오는 두 번째 조건은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기쁨은 하나님을 기뻐 할 때,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찾아옵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다’ 하나님이 있으면 기쁘고, 기쁘면 힘이 난다는 것입니다. 기쁨을 말할 때 잊어서는 안되는 장면입니다.
보셨겠지만 이 말은 느헤미야가 말씀 듣고 울고있는 사람들에게 한 말입니다. ‘울지 마세요. 하나님이 있으니 다시 기뻐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느헤미야의 경험담입니다. 느헤미야는 울던 사람이고, 수심으로 가득찬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식민치하에서 왕의 술관원이 될 정도로 출세했지만 어느날 고향에서 들려온 소식듣고 충격에 빠집니다.
떠나온 고향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거룩한 곳, 예루살렘이 다 불타고 폐허가 된 채 여전히 위기 가운데 있다는 얘기 듣고 수심 가득한 채 근심하며 울기 시작합니다. 1:4절 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여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하나님께 나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느헤미야는 이 순간부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됩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의 고민을 먼저 알아 보고 예루살렘으로 보내 줍니다. 고향에 돌아가니까 그토록 무력했던 사람들이 힘을 합쳐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해 냅니다. 그리고 오늘 8장에서 보는 것 처럼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뜨겁게 은혜’를 받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에스라가 서서 외치면 좌우에 13명의 사람들(4절)이 배치되서 그 말을 다시 외치면서 전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13명이(7절) 그 말씀의 뜻을 풀어서 가르쳐 줍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울게 된 겁니다.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 그런 자신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도 이 광경을 보면서 마음이 뜨거워졌겠지요.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만 믿고 폐허의 땅으로 왔는데 말씀을 받고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 벅차 오르게 터져 나온 말이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여러분의 힘입니다’ 이 말이 툭하고 튀어나온 겁니다. 준비된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경험이고, 체험이었기에 튀어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정하니까 기쁨이 오더라. 그게 힘이 됐다. 힘내라. 울지마라’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존중하며,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힘입니다. 신자의 힘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나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때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자가 됩니다.
나태주 시인의 선물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은 오늘입니다. 오늘 받은 선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입니다. 당신 나지막한 목소리와 웃는 얼굴, 콧노래 한 구절이면 한 아름 바다를 안은 듯한 기쁨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선물도 있습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최고의 선물입니다. 오늘도 이 선물을 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길 때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에만 관심이 있는데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들은 안개와 같은 것들 아닌가요? 잠시 있다 다 사라집니다. 건강도, 재물도, 명성도. 기쁨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가치가 있는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만이 기쁨이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만이 힘이 되고, 소망이 됩니다. 이 기쁨을 우리가 발견해야 합니다. 기쁨아 오라는 초청은 하나님이여 오십시오. 하나님만을 기뻐하겠습니다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3) 평소의 시간을 잘 보내라.
그래서 필요한게 평소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신뢰하기 위해서는 평소의 시간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기쁨은 이 평소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평소는 특별할 것 없는 매일의 삶, 일상이 평소입니다. 비상도 중요하지만 대부분의 삶을 이루고 있는 것은 평소이기 때문에, 이 평소를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삶의 결과 무늬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논어에 보면 평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 나옵니다.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 하루 세 번 자신을 돌아보라. 뭘 돌아봐야 하는가? 세 가지를 말합니다. ① 최선(정성)을 다했는가? ② 신의를 잘 지켰는가? ③ 배운 것을 꾸준히 익혔는가? 이걸 하루 세번 하라는 것입니다.
오일삼성오신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묵상’입니다. 말씀을 앞에 놓고 말씀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삶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누리고,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사는 평소의 삶. 여기서 기쁨이 나오고, 살아갈 힘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지 못하지만 느헤미야는 묵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에 말씀이 있었고 고비고비마다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이 있었는데 그 힘이 바로 얼마 전에 말씀 드렸던 아침에는 고백, 낮에는 찬양, 밤에는 기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4에 보면 느헤미야의 이런 모습이 잘 나옵니다. 왕이 수심 가득한 느헤미야를 보면서 왜 그런지 이유를 묻고 원하는 게 뭐냐고 묻는 찰나의 순간에 느헤미야가 보인 모습입니다.‘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말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긴박한 순간인데 그 찰나의 순간에 느헤미야가 묵상하는 겁니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지만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뜻을 구하고,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평소의 습관이었고, 이 습관으로 느헤미야는 무너지지 않고 삶을 지혜롭게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평소의 묵상이 결정합니다. 묵상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사인입니다.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깊은 묵상 속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평소의 묵상이 나를 만들어 갑니다. 정직하게 만들고, 겸손하게 만들며 성실하게 만듭니다. 묵상을 하면서 우리는 이해하는 자가 되고, 감사하는 자가 되고, 따뜻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역경을 헤쳐 나가는 강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맛 보게 되고, 누리게 됩니다.
묵상의 결론은 기쁨입니다. 묵상 속에 기쁨이 있고, 기쁨이 만들어 집니다. 꼭 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사람’(고후6:10) 근심은 항상 있고, 눈물도 항상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누리고 하나님을 기뻐 하게 되면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달아나는 기쁨, 잡아 오는 여러분의 복된 인생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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