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2. 주일 설교. 마가복음 강해 45:딥러닝, 용서(눅17:1~4. 제자의 삶 7). 양은익 목사.

 

마가복음 강해 45: 딥러닝, 용서(막8:34. 눅17:1~4. 제자의 삶 7)

1.
축복의 계절을 따뜻한 마음으로 보내십시다. 이맘 쯤에 가져야 할 좋은 마음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다가 ‘부디, 아직, 홀연’ 이라는 멋진 부사 세 개가 생각났습니다.

‘부디’,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힘내. 벌써라는 말과 비교해 보면 아직이 얼마나 좋습니까? 아직이 있는 한 무너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사, ‘홀연’. 뜻하지 않게 갑자기 느닷없이 찾아오는게 홀연입니다. 그토록 안되던 일이 어느날 ‘홀연히’ 이루어집니다. 홀연은 신비고, 은혜입니다. 이 홀연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많아지기를 바라겠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도 홀연히 찾아오고, 환대도 홀연히 찾아오고, 오늘 우리가 보려고 하는 주제가 용서인데, 용서도 ‘홀연히’ 벼락같이 찾아오면 최고의 성탄 선물이 될 것입니다.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홀연히 임한 것 처럼(행2::2), 하늘의 빛이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홀연히 비친 것처럼(행9:3), 주의 사자가 옥에 갖힌 베드로에게 홀연히 나타난 것 처럼(행12:7), 여러분게도 홀연히 찾아와 ‘환대와 용서’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기쁨이 ‘부디’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2.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깊은 배움(딥러닝)의 주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홀연히 주어질 때도 있지만 배우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도 중요합니다. 배운다는 것은 깊게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내 용서, 너의 용서, 하나님의 용서를 들여다 보면서, 용서가 없는 자가 아니라, 용서하는 자로 서 나가야 됩니다. 용서가 잘되면 이런 수고 할 필요가 없겠지만, 용서는 생각만큼 안될 때가 많습니다.

용서에 관한 데리다의 유명한 정의가 있습니다. 용서가 뭐냐?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용서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거라면, 쉬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 깊게 살펴보고, 배워야 합니다.용서는 주님께서 가신 길이었기에 우리도 따라가야 하는 제자의 길입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17장 말씀을 보면서 용서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받도록하겠습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제자의 길, 제자도를 가르치고 있고, 가르치고 있는 주제는 용서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주님은 용서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용서에 대한 가르침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① 용서할 일 만들지 말라 ② 용서할 일 생기면 책망할 것은 책망하고, 용서할 것은 용서하라 ③ 한번만 용서하지 말고 계속 용서하라. 당연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는 지침들입니다.

3. 용서의 지침들

(1) 용서의 예방(17:1~3상)

① 용서에 관한 주님의 첫번째 지침은 용서할 일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용서 할 일 잔뜩 만들어 놓고, 용서가 힘드네 마네 하지 말고 먼저 용서할 일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용서의 예방입니다. 용서가 힘든데도 용서 할 일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면 그건 어리석은 것입니다.

3절 앞에 보면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이 나오는데, 잘 살펴서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신중하게 할 일이 무엇입니까? 작은 자들, 여기서 작은 자들은 약한자들입니다. 넓게 보면 사람은 다 약한 자입니다. 상처에 약하고, 말에 약하고, 감정에 약한데 그런 약한자들을 미혹해서 죄짓게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분노하고, 상하면 죄가 나옵니다. 죄가 나오면 상처가 만들어지고. 이런 게 얼마나 큰 죄인가하면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죽어야 할 정도로 만만찮은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조심하고, 신중해서 용서할 일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도 약하고,여러분도 약합니다. 그러면 용서할 일 만들지 않는 게 현명합니다. ‘스스로 조심하라’ 새겨 들어야 합니다.

② 어떻게 하면 용서 할 일이 줄어 들까요?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용서 할 일이 확연히 줄어 들 수 있습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너도 불완전하고 나도 불완전합니다. 완전하지 않기에 이중적입니다. 어떤 때는 천사 같은데 어떤 때는 악마같습니다. 선과 악, 사랑과 미움이 뒤섞여 있습니다. 서로가 감안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함께 살지만, 함께 한다는 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나와 상당히 다른 너와 함께 하기 때문에 부딪칠 수 밖에 없는데, 이런 걸 감안할 수 있는 게 ‘깊은’ 겁니다. 부족한 게 보이고, 다른 게 보일 때에는 넘어가 주는 맛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걸 관용이라고 합니까? 또 넘어가 주면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고맙게 여기는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서로에게 용서가 필요한 상당히 ‘취약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눈으로 서로를 봐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많이 넉넉해 질 수 있습니다. ‘용서할 일 만들지 말라’ 용서를 말할 때 많이 놓치는 부분을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2) 용서의 행동(17:3)
3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주님은 용서를 말하면서 책망과 회개라는 두 가지 용서의 조건을 말씀해 주십니다. 죄를 범한 형제, 잘못한 형제가 있습니다. 그럼 이 형제로 인해 상처를 입은 사람은 그냥 넘어가면 안되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분명하게 밝혀서 책망하고, 책망 받은 후에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용서에 조건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은 여기서 용서가 일어나는 조건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조건이 뭡니까? 가해자는 회개고, 피해자는 받아 줌입니다.

용서는 묵인이 아닙니다. 잘못한게 있는데도 용서라는 이름으로 묵인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똑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고,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잘못한 것은 잘못했기에 밝혀서 잘못했소라고 말해야 하고, 그 사실이 납득되야 잘못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근데 이 과정이 만만치 않습니다. 잘못하면 싸움에 더 커질 수도 있구요, 피해자가 볼 때는 잘못인데도 가해자는 잘못이 아니라고 우기면 더 힘들어 집니다. 용서가 일어나려면 가해자와 피해자 둘 다의 애써야 합니다.

잘못을 한 사람은 자신의 입장이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피해를 받은 사람도 쿨하게 그 사과를 받아 들여야 합니다. 사과했는데도 앙금이 남아 있으면 용서한 게 아닙니다.

온전한 용서가 이루어지려면 다섯 단계가 필요합니다. ① 가해자에 대한 분노의 제거 ② 도덕적 빚의 탕감 ③ 가해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 형성 ④ 가해자에 대한 정죄적 판단 지우기 ⑤ 가해자에 대한 용서 선언.

용서에 왜 이런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냐하면 용서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용서한다고 해도 용서가 안되고, 마음 한 구석에 쌓여있는 게 너무 많습니다. 그런거 하나하나를 제거해 나갈 때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힘든데 안보고 살지! 그러면 할 말은 없습니다. 근데 그런 삶은 제자들의 삶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도하라 가르쳐 주신 것 중에 용서가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내용이 길지만 중심 골격은 용서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용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사실을 잊지말고 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기 전에 먼저 용서받아야합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자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용서를 생각할 때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 받은 자이기에 용서가 힘들어도 용서하려고 애쓰는 이들이 주를 따르는 이들입니다.

마18장에 만 달란트 빚진 사람 얘기 기억하십니까? 엄청난 빚을 졌지만 다 탕감받게 되지요. 용서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게 많은 돈을 탕감받아놓고,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진 친구가 탕감해 줄 것을 요청하니까 매몰차게 거절해 버립니다. 놀라운 얘기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이루어지려면 사람됨의 그릇, 용서의 그릇, 믿음의 그릇이 커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6:14~15입니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이다’(새번역)

나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겁니다. 내가 용서하면 하나님도 나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내가 용서하지 않아도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그릇, 용량이 커져서 더 많은 용서,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만 달란트의 탕감을 선물해주어도 받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받은 용서, 받은 은혜 다 날라가 버립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나의 용서는 별개가 아니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나의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내는 귀한 그릇입니다. 용서의 마음이 깊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깊게 다가오게 됩니다. 용서의 마음, 버리지 마십시오. 용서가 힘들수록 용서하면 더 큰 은혜가 올 것입니다.

(3) 계속해서 용서하라(4절)
그래서 4절이 중요합니다. 용서하라는 말을 듣고 제자들이 질문 한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용서해 주면 됩니까? 실력 없는 사람들이 늘 하는 질문입니다. 마18:21에서도 이 질문이 나옵니다.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해 주면 됩니까?

주님 대답하십니다.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 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단번에 용서가 일어나면 좋겠지만 그런 법은 별로 없습니다. 구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구하고, 구하고, 받고 받고 하면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두번 시도해서 용서가 되면 용서 못할 사람 없을 겁니다.

Forgive and Forget, 용서와 망각(Lewes B. Smedes)이라는 유명한 책에 나오는 목차입니다. 어떻게 용서하나? 라는 챕터입니다. 어떻게 용서하나? 1. 서서히 용서한다. 2. 이해함으로 용서한다. 3. 혼란 가운데 용서한다 4. 분노하며 용서한다 5. 조금씩 용서한다. 6..자유롭게 용서한다 7. 근본적인 감정으로 용서한다. 완벽해서 용서하는 게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용서하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말씀 맺겠습니다.
우리에게 용서는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수단이 아닙니다. 용서는 우리 신앙을 관통하고 있는 근본 줄기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용서하셨고, 성자 예수님은 용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지금 여기서 우리의 용서를 돕고 계십니다. 이 용서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용서하면서 사는 게 맞습니다.

용서의 조건이 똑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용서도 있지만, 마음 먹어도 힘든 용서도 많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도 용서에서 벗어나게 만들지는 마십시오. 용서는 희망과 자유와 회복과 사랑을 주는 생명의 삶입니다. 용서, 깊게 배우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