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5. 주일 설교. 마가복음 강해 44: 딥러닝, 환대(막8:34.눅4:16~19. 제자의 삶6). 양은익 목사

 

마가복음 강해 44: 딥러닝, 환대(막8:34. 눅4:16~19, 제자의 삶6)

주를 따르는 이들이 가져야 할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딥러닝, 깊게 배워서 제자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는 보람과 기쁨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1.해체(解體, Deconstruction)

오늘은 해체(解體, Deconstruction)라는 단어 하나 보고 가겠습니다. 해체는 살펴보기 위해 뜯어내는 것입니다. 해체는 파괴는 아닙니다.살펴보기 위해서 해체하기에 해체를 잘하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해체는 딥러닝의 중요한 과정입니다. 한번 보고 다 아는 것 처럼 지나가는 게 아니고 성즉명(誠卽明), 성실히 자세히 보면서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물건만 해체하면 안됩니다. 자신도, 신앙도 해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삶은 해체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보고, 들으면서 ‘제대로 가고 있나?’ 물으면서, 아닌 게 있으면 버리고, 가져야 할 게 있으면 취하고. 그러면서 주의 길을 따라가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해체 없이 자기 것만을 고수하게 되면 자기만 강화할 뿐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 해체가 없으면 변화없이 생각도, 깊이도, 행동도 똑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해체는 성장과 성숙을 가져오는 딥러닝의 과정이기 때문에 말씀에 맞춰 자신을 해체시키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해체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새로운 것을 알게하고, 깊어지게 만듭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어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기꺼이 자신을 해체하려고 하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모습이고, 겸손한 모습입니다.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딥러닝이 ‘환대’인데, 환대는 어떤 것보다도 자신을 해체해야 가질 수 있는 모습입니다. 환대는 나 아닌 너를 환영하고, 반갑게 맞아 주는 것입니다.문제는 환대해야 하는 너가 보통 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와 심각히 다른 너입니다. 내가 가진 틀로는 규정할 수 없는 너이며, 나와는 기준이 다른 너입니다.(레비나스) 통하는 것보다 통하지 않는 게 훨씬 더 많은 그런 너를 환영하며 맞아 주는 것. 그게 환대입니다. 자기 해체, 자기 부인, 자기 낮춤이 있어야 가능한 모습입니다.

환대라는 단어를 적어놓고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환대는 주님의 삶이었고,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그렇다면 우리도 환대해야 하는데, 우리가 과연 환대하면서 살고 있는가? 신앙인들에게 환대가 있는가? 교회가 환대와 환영의 공동체인가? 우리가 세상보다 환대를 더 잘하고 있는가? 환대한다면 무슨 이유로 환영하는가? 환대해봤자 돌아 오는 것은 무시고, 배반인데 그래도 해야 하는가?

EBS 교육 방송에서 탐사 보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를 떠도는 지배적인 감정을 조사했습니다. 결과를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막연하게 불안하다. 쓸쓸하다. 뭘 해도 안될 것 같다. 주저 앉고 싶다. 미래가 막막하다. 나만 불행한 것 같다. 분노가 치민다. 답답하고 짜증이 난다.

환영 받지 못하고 있는 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환영받지 못하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환대가 없으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환대받지 못하면 사람은 한이 맺히고, 병이 납니다. 환영과 환대가 없는 세상은 녹슨 세상이 되고, 어둡고 가라앉고, 배제하고, 사나운 세상이 되버립니다. 죽지 못해 산다는 사람들로 들끓게 됩니다. 환대와 환영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2. 환대 알기
환대는 환대하는 자, 환대 받는 자 전부를 변화시키고, 특별하게 만들어 줍니다. 환대는, 하나님의 환대든, 사람의 환대든 사람을 구해내는 구원의 힘이 있습니다. 환대는 구원을 만들어 내는 출발입니다. 구원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면, 구원을 만드는 환대 역시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친득구(以親得救)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이신칭의의 변형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도 하지만, 이친(以親), 친절과 환대를 통해서도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환대가 구원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연합해서 하시는 일이 구원인데, 삼위 하나님 공히 환대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성부의 환대가 그리스도의 환대를 통해서 나타나고, 그리스도의 환대는 성령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의 말씀은 주님께서 주님의 고향인 나사렛 회당에서 한 설교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자신의 사명을 선포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주님의 사역의 대상은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입니다. 전부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이런 이들을 환영하고, 손내밀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자유를 선물하며, 보게하고, 해방케하는 환대와 은혜의 사역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끊임없이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을 찾으셨고, 그들과 만나 환대를 베푸십니다.

만나서는 안되는 낙인 찍힌 사람들, 창녀, 세리, 반역자, 귀신들린자, 병자, 여자, 그야말로 거침없이 만나십니다. 같이 먹고, 같이 다니고. 비난 받아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만나는 이들을 환대하고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십자가는 환대의 정점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받아 주신 것입니다. 구원은 환대가 만들어낸 선물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환영받은 사람들입니다.

바울도 롬15:7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은 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ESV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Welcome one another, as Christ has welcomed you.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을 환영하셨듯이 서로를 환영하십시오.

주를 따르는 자들에게 환대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해야 되는 것이고, 하는 게 맞습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에 환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환대 받았음을 아는 게 은혜고 신앙이고, 신비입니다. 사랑을 하면은 얼굴이 예뻐지는 것 처럼, 하나님의 환대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 마음이 따뜻해 집니다. 마음이 따뜻해 지는 게 은혜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 보십시오. 마음이 좋습니다. 푸근하고, 넉넉합니다. 마음이 좋으니까 말도 좋습니다. 격려가 나오고, 위로가 나옵니다. 표정은 당연히 좋습니다. 우리도 이런 은혜 속에 살아가십시다.

3. 환대 받기, 환대 하기.
미국 작가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이 쓴 ‘나 자신의 노래’라고 하는 장편 시, 한 대목 보겠습니다.

도망친 노예가 내 집으로 찾아와 집 밖에 멈춰 섰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나무 더미에서 잔가지들이 탁탁 소리를 냈다.
반쯤 열린 흔들리는 부엌문 사이로 나는 가냘프고 허약한 그를 본다.
그러고는 그가 앉은 나무둥치로 가서 그를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안심시켰다.
그리고 물을 가져다주고 땀에 젖은 몸과 상처 입은 발을 씻을 수 있도록 욕조 가득 물을 채웠다.
그리고 내 방과 통하는 방을 내주고, 그리고 그에게 두툼하고 깨끗한 옷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의 뻣뻣한 목과 발목에 반창고를 붙여준 것을 기억한다.
그는 나의 집에 일주일을 머물렀고, 몸이 회복되자 북쪽을 향해 떠났다.
나는 식탁에서 그를 내 옆에 앉게 했다. 나의 총은 구석에 기대놓았다.

남북 전쟁 당시 자신이 경험했던 일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시입니다. 도망친 노예가 집에 숨어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총으로 내 쫒지 않고 집 안으로 들입니다. 도망 노예는 위험한 노예입니다.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낯선 사람인데, 그런 위험하고 낯선 이에게 문을 열어주고 방을 내주고 회복시켜서 보낸 것입니다. 도망 나온 노예를 어떤 조건도 없이 손 내밀었고, 품어주었습니다. 흑인 노예에 대한 고정 관념과 위험과 편견을 해체하고 그에게 자리를 내 준 것입니다.

환대는 ‘너’라는 타자에게 자리를 인정하고, 자리를 내주는 행위라고 하는데 이 사람도 노예에 대한 적대를 포기하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 환대로 겁에 질려 죽어가던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웁니다. 환대가 만들어낸 생명이고, 구원입니다. 짤막한 시 한 대목이지만, 이 장면에 환대가 가진 힘과 사랑과 은혜와 위험성과 긴장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보신것 처럼 환대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나와 어떤 것도 같지 않은 너를 만나는 구체적인 현실이기 때문에 긴장될 수 밖에 없고,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환대는 네편 내편, 친구 적, 유리 불리라는 경계를 그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선과 경계를 해체 할 때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뽕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보고 한 마디 하십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겠다’ 삭개오도 놀랐고, 다 놀랐습니다. 가서는 안되는 사람의 집에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어 놓은 경계를 해체 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 환대에 세리가 감동하게 되고,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환대를 보십시오. 다 힘든 환대였고, 위험한 환대였습니다.

4.
환대와 환영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는 환대의 불가능성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습니다. ‘나 혼자 버티기도 힘든데, 힘든 너까지 환대하라니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지만 환대는 그런 불가능속에서 나오는 사랑이고, 선물이기에 더 값진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환대를 막는 것은 너가 아니라 내 안에 있기 때문에 환대의 불가능성을 말할 때마다 내 안에 있는 편견과 이기심과 고정 관념을 의식해야 됩니다. 환대는 단순히 너에게 잘해 준다는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환대는 세상의 근본 악과 싸우는 영적 전쟁의 수단입니다. 환대가 없고, 환대가 약하면 악이 자랄 수 밖에 없습니다.

환대가 없어 보십시오. 온갖 모욕과 무시와 경멸이 독버섯처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라게 될 것입니다. 너는 없는 자기만의 세상이 만들어 질 것이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침없는 조작으로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편을 갈라 낙인 찍어서 집단 증오심을 만들어 내는 일을 거침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환대는 포기하면 안되는 제자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여러분들도 환대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환대하지 못하게 하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다 깨버리시고 이겨 내야 합니다. 환대가 시작되야 빛이 들어오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환대하지 못하면 못한만큼 삶의 그늘로 남게됩니다.

대림의 계절 보내고 있습니다. 환대의 모습이 여러분들의 삶에 넘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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