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서기(눅1:67~79)
2019.12.25. 성탄절
1.
대림절의 초 네 개가 전부 밝혀졌는데, 초를 켜는 이유는 ‘밝히자’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너무 어둡습니다. 마음도 어둡고, 생각하는 것도 어둡습니다. 오셔서 당신의 은총으로 이 어둠을 밝혀 주십시오’ 맞지요? 이 밝음이 성탄의 아침, 우리에게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밝아지려면 ‘밝음’에 가까이 가야됩니다. 78절에 보면 ‘돋는 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들을 찾아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님이 밝음이고, 그 밝음에 다가갈 때 그 빛을 받아 밝아지게 됩니다. 다가서지 않고, 멀어지고, 떨어지고, 거리를 두면 어둠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온기와 사랑을 느낄 정도로 가까이 다가설 때 밝아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지난 1년간 생명의 주님께 얼마나 다가서셨습니까? 가까이 했다는 고백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허형만 시인의 ‘겨울 들판을 거닐며’라는 시 한 대목 읽어 드리겠습니다.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며/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겨울 들판 보면서 아무 것도 얻을게 없을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걸어보니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묵직합니다.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저는 한 단어 더 붙이겠습니다.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별거 아니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뼈아픈 말입니다. 멀리서 보면 보일 수가 없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나태주, 풀꽃)는 시구처럼 그리스도도, 우리의 신앙도 다가서야, 가까이 가야 볼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다가서는 겁니다. 신앙은 접근하는 것으로 끝내면 안됩니다. 접근과 다가섬은 같지 않지요! 접근은 냄새가 납니다. 어떤 냄새가 납니까? 왜 접근합니까? 다는 아니겠지만 접근해서 무엇인가 자신이 의도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접근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다가서는 게 접근입니다. 이용하려고 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접근은 뜻을 이루면 다시 멀어집니다. 관심도 없고, 그러다가 다시 필요하면 접근하고.
접근은 접근하는 상대방을 알 필요도 없고, 자기 볼 일만 보면 그걸로 끝입니다. 상당히 계산적입니다. 별 도움이 안된다 싶으면 차갑게 돌아섭니다. 접근이 사는 데는 편합니다. 근데 접근으로는 얻을 수 있는게 별로 없습니다.
삶에서 정말 필요한 것, 귀한 것은 다가섬에서 나옵니다. 다가서서 함께 할 때 감추어졌던 것이 열리게 되고, 나와 너가 참되게 마주할 때 거기서 귀한 가치들, 사랑, 섬김, 희생, 관용, 용서 같은 것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가섬을 포기하게 되면 다가섬 속에 숨어있는 ‘가능성’이라는 씨가 죽어 버립니다.
사람에게 다가서든, 하나님에게 다가서든 다가섬은 주를 따르는 이들이 버리면 안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누구를 만나든, 한번을 기도하든, 한번을 교회에 나오든 ‘접근’이 아니라 ‘다가서려’는 마음으로 나올 때 ‘아무 것도 없을 것처럼 여겨졌던 매서운 겨울 들판에서 따뜻함이 나오는 것’처럼, 은혜와 믿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가까이 다가 서지도 않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네’ 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장의 본문은 예수님 보다 출생 신고가 6개월 빠른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자기 아들 요한의 이름을 짓고, 성령 충만하여 부른 찬양, 찬가입니다. 찬가를 보면 자기 아들 요한이 아니라, 요한 뒤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면서 찬양하고 있습니다.(베네딕투스, 눅1:67~79)
성탄절 아침이라 길게 보지는 못하지만 이것만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돋는 해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찾아 오셨다’는 것. 사가랴는 성령 충만하여 자신의 아들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불러주셨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68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보사’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돌보사(ἐπισκέπτομαι)’라는 단어가 ‘찾아 오셨다’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대로 ‘오신 것’입니다.
요1:14에 나오는 요한의 선포가 그 ‘오심의 선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누가 나에게 은혜를 주기 위해, 사랑을 주기 위해 다가 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은혜와 사랑을 받으려면 나도 ‘다가서야’ 은혜와 사랑과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거절하면 아무리 사랑을 주고 싶어도, 은혜를 주고 싶어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오심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가랴는 ‘구원의 뿔’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면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서(68절), 우리를 해하는 원수와 우리를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사(71절), 종신토록 성결과 의로움으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기(75절) 위해서 ‘오셨다’고 감격하여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깝게, 더 가깝게 다가서야 합니다.
주의 오심은 나의 다가섬으로 완성됩니다. 성탄은 오신 주님과 나의 기쁜 다가섬이 함께 할 때, 비로서 주님은 나의 돋는 해가 되서 어둠과 탄식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만 오시면 안됩니다. 나도 다가서야 합니다. 이게 성탄절이고, 예수님 나신 날입니다.
구약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찾아 오십니다.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왔으니 나에게 와라.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사55:1~3)
자신에게 주는 말씀으로 받고, 더 찾고 찾으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55:6~7)
오심과 다가섬이 함께 할 때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독생자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접근으로는 안됩니다. 다가가셔야 합니다. 다가가려고 하는 의지와 갈망이 있을 때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 질 수 있습니다.
3.
1929년 12월 21일 토요일, 성탄이 가까워오는 시절에 이용도 목사님이 남긴 짤막한 기도문입니다.
주님, 살림이 가난하고 심령도 가난하던 조선에 찾아 오셨던 주님! 처소를 잡으셨던 주님! 오늘날 한국은 주님의 처소를 맘몬의 안방과 바꾸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속 깊은 관심이 없어 주님은 외로운 주님이 되셨나이다. 그러나 이대로 주를 떠나보내 드릴수는 없사오니 어서 정신을 차리어 사랑하는 그 귀하신 주님을 우리가 어떻게 박대했는지 깨달아 거국적인 회개 운동이 치솟게 하소서. 아멘.
지금부터 90년 전 기도인데, 어쩌면 이렇게도 바뀐게 없는지 진한 아픔이 있습니다. 가난할 때는 가난해서 주님 찾지 않고, 살만하게 되니까 살만해서 찾지 않고. 보잘 것 없는 나라에 주님 찾아오셔서 믿음 주시고 은혜 주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속 깊은 관심 없이 주님께 다가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께 다가가지 않는 죄성에 저항해야 합니다. 목사님 기도처럼, 이대로 주를 떠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정신을 차려서 거국적인 회개 운동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 우리도 회개하십시다. 주 없이 안일하게 산 것, 주께 다가서지 못했던 삶의 모습들, 불안과 불신으로 가득한 마음의 악들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돋는 해’가 다시 이 땅 가운데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희망은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구원의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 가십시오. 이 땅 가운데 예수의 정신과 사랑이 흘러 넘치기를 기도하는 성탄의 아침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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