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8. 주일 설교. 마가복음 강해 43: 딥러닝, 믿음 소망 사랑(막8:34, 살전1:2~10. 제자의 삶5). 양은익 목사.

 


마가복음 강해 43: 딥러닝, 믿음 사랑 소망(막8:34, 살전1:2~10, 제자의 삶5)

1.
단어 두 개 보고 시작하겠습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두 단어 다 지난 주부터 보기 시작한 ‘딥러닝’에 필요한 단어들이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를 각성시키는 단어들입니다. 하나는 견소왈명(見小曰明)(노자)이고, 다른 하나는 성즉명 불성무물(誠卽明 不誠無物)(중용) 입니다.

두 단어에 다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밝을 명입니다. 한자에서 밝을 명은 중요한 단어입니다. 모르던 것을 알고 깨닫게 될 때 밝을 명을 씁니다. 견소왈명에서 견소(見小), 작은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작은 건 잘 안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작은 것을 보는 것을 왈명, 일컬어 밝음이라 한다, 깨달음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작고 사소하다고 허투르 보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사소한 것이라도 깊게 보면 거기서 지혜가 나오고 통찰력이 나옵니다.

성즉명 불성무불(誠卽明 不誠無物)도 비슷한 말입니다. 성즉명, 성(誠),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할 때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불성(不誠), 성의없이 하면 무물(無物), 어떤 것도 생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딥러닝이 이 두 단어에 그대로 나옵니다. 작은 것을 깊게 보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 깊은 배움(딥러닝)입니다. 차이는 작은 것을 깊게 보고, 하는 일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에서 차이가 생깁니다. 깨닫는 자와 깨닫지 못하는 자,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가 생깁니다. 시간이 갈수록 차이는 더 벌어지게 됩니다.

견소왈명(見小曰明)과 성즉명(誠卽明)은 주의 길을 따르는 이들에게 필요한 모습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자신의 삶을 깊게 바라보고 정성을 다해 살아가는 것. 그게 제자의 길을 가는 자의 기본 자세입니다. 정성이 없으면 불성무물, 아무 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나비효과(Butterfly effect) 처럼, 삶은 사소하고 보이지 않는 작은 일에서 움직입니다. 작은 것의 중함을 볼 때 실패하지 않습니다.

2.
우리가 가져야 할 세 단어를 말씀 드립니다.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많이 들은 단어지만 뜨겁고, 가슴 뭉클한 단어로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한쌍으로 움직이는 세 단어는 어떤 순간에도 살아 있어야 하는 주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 가져야 하는 생명의 단어입니다.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습니다.

세상이 불신과 절망과 미움으로 가득 찰수록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줘야할 위대한 삶이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가득찬 삶입니다. 삶이 아무리 거칠고, 힘들어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보화가 빛이 나야 합니다.

오늘 두 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삶은 살만한가? 삶은 비극인가? 묵직한 물음입니다. 어떤 대답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까? 청년들은 한 마디로 대답합니다. 헬조선이라고. 살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살만하지 않으면 삶은 비극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대답을 많이 하고 있습니까?

3.
기독교의 역사는 비극의 역사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도 비극으로 삶을 마쳤습니다. 바울도 감옥에서 옥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데살로니가 교회 사람들도 박해 속에서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비극이다, 억울하다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얼추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로부터 예수에 대한 복음을 듣고 우상의 도시에서 우상을 버리고 살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로 부터 무시와 박해를 당하게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짜증을 유발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십시오. 살만하게 살고 있는지, 억지로 살고 있는지? 그들의 삶이 비극인지 아닌지? 한번 더 볼때에 그들의 삶을 상상해 보고, 느껴 보십시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억지로 살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이 살아 있고, 사랑으로 수고하고, 풍성한 소망으로 박해와 따돌림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6절 보세요. 힘든게 분명한데도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주님을 본받는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10절. 힘들지만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부터 강림하실 그날의 구원과 영광을 바라보면서 소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감격하면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는 게 고단하고, 신앙의 삶을 사는 게 힘든데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선물 처럼 주어진 믿음의 삶을 의연하게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들을 보면서도 이런 흥분과 감격을 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 사랑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봐야 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힘들수록 더 품어야 됩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지금 무엇을 믿고 있는가? 내가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소망은 무엇인가? 무엇을 희망하고 있는가? 내가 사랑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사랑해야 후회하지 않겠는가?

정말 뭘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희망 하는게 뭐고, 사랑하는 게 뭡니까? 불편하실 것 같아서 말은 안하겠지만 답이 될 수 없는 것들을 의지하고 바랄 때가 너무 많습니다. 저도 지금 이 질문 앞에 절실하게 서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엇을 희망하고, 어떤 사랑을 하며,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가?

4.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이 없으면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불만과 불신으로 살아서도 안되고, 절망과 좌절에서 헤매서도 안됩니다. 미움과 원망으로 삶을 낭비해서도 안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그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과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게 그리스도인들이고, 주를 따라가는 자들의 삶의 방식입니다.우리를 짜증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머리를 끄덕이게 만드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 여러분의 사랑, 여러분의 소망 밖에 없습니다.

깊게 배워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하면 가질 수 있을까요? 가지시라 말하면 가지시겠습니까? 그러면 감사하겠지만 우리는 그럴 정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권하기는 하겠지만 보채지는 않겠습니다. 스스로에게 절실해져야 알게 됩니다. 없으면 안되겠구나!

이런 마음은 어디서 나올까요? 묘하지요. 잘 나갈 때는 이런 마음이 안 나옵니다. 인생이 무상할 때, 삶이 공허해져야 나옵니다. 공허함과 무상한 마음은 믿음만큼 중요한 마음입니다. 전도서의 지혜자가 고백하는 것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뼈 저리게 느껴야 됩니다. 여기서 믿음이 나옵니다.

신앙을 가지면 공허한게 없어질까요?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인생의 무상함, 세상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더 예민하게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채울 수 있는 영혼의 만족을 구하게 되고, 애통하는 심령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되어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시42:1) 믿음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그 믿음에서 소망이 나오고, 소망에서 사랑의 수고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더 공허하게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힘을 더 빼 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게 축복이고, 그게 은혜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내가 만들어 내는 힘이 아닙니다. 사랑을 보십시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 내지 않고 원한 품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딘다’ (고전13:4~7)

15개의 항목이 나오는데 모두 동사입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 행할 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맨 정신 가지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도 마찬가지고,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신의 성품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때 조금씩 조금씩 생겨나는 보석들입니다. 이 신의 성품에 세상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서 그것 밖에 답이 없기에 하나님이 주신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오만을 버리고, 나태를 버리고 깊게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가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매일 뺏어가고 있습니다. 뺏기지 마십시오. 빼앗긴만큼 뼈아파 하십시오. 견소왈명, 성즉명해서 다시 찾아와야 합니다. 찾아온 만큼 살만해 집이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살아나 주를 따르는 자의 복된 삶을 누리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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