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 그리스도의 능력에 머무는 것(고후12::7~10)
십자가에서 찢기신 주님의 몸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를 받는 귀한 주일 아침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의 말씀이 뜨겁게 고백되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주님께서 사십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살지만 나만을 위해 살지 않겠습니다. 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주님을 믿는 믿음안에서 살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고백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이런 뜨거운 고백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이들이 이런 고백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1.
오늘 주신 말씀에서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에 있는 가시가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는 가시가 뭔지는 아직까지 ‘이게 맞다’라고 정해진건 없습니다. 안질이라는 사람도 있고, 간질이라는 사람도 있고, 바울을 적대하는 사람들이라는 설도 있지만 잘 모릅니다.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의 사자’라고 부를 만큼 바울을 힘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고, 복음의 능력을 전하는 사람입니다.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일로 자기 일 하나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 버린 겁니다.
가시 없애 달라고 세번 기도했다고 하는데, 말이 세번이지 세번만 했겠습니까? 바울 정도 되면 들어 주는게 맞는 것 같은데,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사탄이 승리한 것 처럼 보여질 수 있는데도 안 고쳐 주십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알아차립니다. 자신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7절 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 가르쳐 준게 아니고 바울이 은혜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약점이 뭔지 아십니까? 바울의 약점은 너무 잘 났다는 것입니다. 어디 하나 꿀릴게 없는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스펙왕입니다. 빠지는 게 없습니다. 집안, 머리, 학력, 거기다가 로마 시민권이라는 큰 빽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까지 만나고, 나중에는 삼층천, 세째 하늘까지 갔다오는 영발까지 가지게 됩니다. 수 많은 교회 세우면서 고생까지 하게 됩니다. 건드릴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바울에게는 독이 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어떤 독입니까? 자만이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숨만 쉬어도 교만할 수 있는 게 사람인데, 이 정도되면 충분히 교만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자신의 가시 때문에 비로서 알아차리게 됩니다.‘아! 내가 교만해 질 수 있겠구나’ 대단히 귀한, 그렇지만 쉽지 않은 진실을 알게 됩니다.
어느 하나 빠지지 않은 바울이 육체에 가시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취약한 사람인지, 약한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알게 됩니다. 자신의 취약함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0절의 고백이 그 고백입니다. ‘약할때가 가장 강할 때다’ 강함만을 추구하는 교회, 성도들, 이 세상 전부가 가져야 하는 고백입니다.
약한데 강하다. 이건 모순(contradiction)이 아닙니다. 모순이 아니고 심오한, 깊은 역설(profound paradox)입니다. 약함 안에 있는 강함. 이것을 감지해 낼 수 있는 것은 신앙인들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이 너무 두렵습니다. 약하고 없으면 얼마나 두렵습니까? 너무 두려워서 취약함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부 강해지려고만 합니다. 강해져야 하나님이 있는 것 처럼 느껴집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약하면 하나님이 없는 겁니까? 하나님은 강함 속에만 있습니까? 답을 알아도 받아들이지 못하면 답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저는 답을 줄 수 없습니다. 이런 답은 스스로 찾고, 발견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일찍 발견 할수도 있고, 늦게 발견 할 수도 있고,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바라는 것은 약함 속에 계신 하나님, 없음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감지해 내는 은혜와 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이런 취약함 속에 있는 힘(power-in-vulnerability)을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알아 차렸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십자가야 말로 가장 깊은 역설입니다. 아무 힘도 써보지 못하고 죽어 버린 무력함 속에서 부활이라고 하는 가장 센 힘이 나타났습니다. 세상의 힘에 대해서 저항하고, 그 힘을 전복시키는 힘이 십자가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고후13:4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바울이 이걸 알아차린 겁니다. 약한게 약한게 아니다. 약한 속에 강함이 있다. 강한 이유는 약한 내 안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머무시며, 함께 하시기에 강하다.
바울의 선포 한 대목 더 들어 보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7~11)
우리가 말하는 그리스도 신앙이고, 신앙을 가지 이들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잃어 버리지 마시고 가지십시오. 내가 능력을 가지고, 내가 폼나는 것은 기독교가 목표로 하는 게 아닙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내 안에 가지는 것, 그 능력에 머무는 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을 끝내버리는 것처럼 보여 질때가 있습니다. 왜 이런 기분 나쁜 일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더 강한 힘을 주기 위해서라는 것 발견하셨습니까? 내 능력 보다 더 강한 능력, 부활의 영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머물게 하기 위해서 약함을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약하지 않으면 이 역설을 알 수 없으니까 그렇게 하셨을 겁니다.
사람은 웬만하면 힘을 바꾸지 않습니다. 약할 때만 힘을 교체합니다.(Power of exchange). 하여 말씀드립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싸이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망하지 않게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기 원하면 여러분의 능력을 끝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쎄 지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신학자인 마르바 던(Marva J. Dawn, 1948~) 교수의 고백문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셨는데, 고백문을 보시면 알겠지만 평생을 아팠던 분입니다.
내가 가장 절실하게 약함을 경험했던 날이다. 15개월을 기다린 끝에 새로운 다리 보조기를 마련하여 교체하면서, 옛 보조기가 이제껏 나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 발에는 새로운 상처가 나 있었고, 그것은 내가 다시 수개월 동안 되풀이해 의지해 온 동반자인 목다리를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삶이 늘 이렇게 힘든데, 하나님은 어떻게 이런 생활을 계속하라고 하시는 걸까?’
어떤 날에는 과도한 긴장 때문에 완전히 진이 빠져 버리는 때가 있다. 나는 늘 관절염에 걸린 두 손과, 저는 한쪽 다리와 보지 못하게 된 한쪽 눈과 듣지 못하는 한쪽 귀와 17% 정도만 기능하는 양쪽 신장과 꿈틀 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죽어 버린 위 신경과 장 신경과 암 수술과 턱 수술 이후 남은 통증과, 남은 한쪽 눈의 시력마저 곧 잃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과 다리뼈 고정 수술 이후 떨어져 나온 뼈 조각들이 계속 염증을 일으켜 결국 다리를 절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것도 전체 목록은 아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나를 이토록 약하게 하실 필요가 있으신가?
그렇다.
나는 비록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믿는다. 우리의 인간적 약함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언제나 비밀스럽고 신비하고 우리의 인간적인 이해를 초월한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부지(不知) 한 복판에 하나님은 새롭게 내주 하신다.
너무 쎄서 다 받으라고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생각은 하십시오. 저럴 수도 있구나. 저런 해석도 가능하구나. 약함 속에 내주 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가볍게 보면 안됩니다.
3.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내주 하심과 머무심을 바라는 마음으로 성찬을 받습니다. 우리가 지금 받는 이 빵과 잔은 강함이 추종되는 시대에 받는 빵과 잔입니다. 교회와 신앙인들마저 강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시대에, 보십시오. 성찬 빵과 성찬 잔 마저 몇개 안되는 볼품없는 잔과 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볼품 없는 보잘 것 없음 속에 그리스도의 신비와 은총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찬은 주님이 약속하신 은혜입니다. ‘이 빵과 잔을 보면서 나의 찢긴 몸과 내가 흘린 피를 항상 기억해내라. 약함 속에 강함이 있고, 나는 너희들 속에 항상 머물러 있다’
주님 말씀하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6:56~57)
이 말씀 받고, 주께서 선물로 주신 성찬, 감사와 감격함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약한 우리에게 강함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오늘의 성찬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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