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려드리는 글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에스겔서 36장 강해 두번째 설교인 ‘반역 행위’입니다. 긴 설교를 줄여 매끄럽지 못함을 양해해 주십시오. 진화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죄의 교리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진단이 제대로 내려 져야 병든 환자를 고치고 살려 낼수 있듯이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죄에 대한 교리부터 시작 할 것 입니다. 오늘 ‘반역행위’는 에스겔서 36장 16~20절 설교입니다. 우리는 우리앞에 계신 엄청난 분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타락했는지? 그 실상(죄의 실상)을 알게 될 것 입니다.(추신: 들풀교회 밴드에 올려진 글입니다)
2. 반역행위(겔36:16~20)(마틴 로이드존스. 에스겔 강해-오직 은혜로 받는 구원, 복있는 사람, 2019)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 위에 쏟아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여러 나라에 헤쳤더니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겔36:16-20)
에스겔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 첫번째로 다룬 문제는 그들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벨론에서 왜 이러고 있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은 그 이유를 조사하며 그에 대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우리 마음에 들던 들지 않든, 성경은 항상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말을 싫어합니다. ‘그러니까 진단을 내리고 죄 이야기를 하는데 시간을 쓰지 말고 치료법만 알려 달라구요’ 조속한 치료만 받길 바랍니다. ‘그런건 다 됐구요, 하나님의 사랑만 이야기해 주세요. 모든 문제를 즉시 바로 잡을 방법만 알려 달라구요. 내가 바라는건 그겁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출발하십니다. 사람들이 이 지경이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세상이 이 지경이 된 이유? 이 곤경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항상 이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의사가 통증의 원인에 대한 검사와 진단없이 증세를 없애고 편안하게 만 해 주려고 진통제나 몰핀만 쓰는 것은 환자에게 아주 위험 할 수 있습니다. 진단과 치료의 과정없이 환자에게 주도권을 내주는 의사는 아주 형편없는 의사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의사가 환자의 질병의 원인을 최대한 찾아내려고 애씁니다. 성경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성경은 죄의 교리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모든 문제가 거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전한 말을 들어 봅시다.
첫번째 주장은 전적으로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곤경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살고 행동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이 지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의 적나라한 진단을 세상은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스스로 곤경을 자초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곤경을 자초하는 이유는 왜 입니까?
첫째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데, 인류의 전적인 비극은 이 점을 잊어 버린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등을 돌린탓에 이 지경이 된 것 입니다. 옛 이스라엘 자손들과 마찬가지 입니다. 성경은 모든 문제를 푸는 유일한 열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어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거기에는 완벽한 조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놀라운 교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지경이 됐습니까? 남자와 여자가 낙원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더 좋은 것을 알 수 있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약 성경의 탕자의 비유도 마찬가지 입니다. 집을 떠나 먼나라에 와서 들에서 돼지나 먹는 쥐엄열매를 먹었습니다. 대체 왜 이 지경이 됐습니까? 바로 자신이 의도적으로 한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의 가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핵심 문제를 보여주는 성경의 사례입니다. 우리의 모든 곤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두신 자리에 머물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살지 않으려 합니다.
두번째 원리를 통해 계속 설명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 길을 선택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그랬습니다.
애굽에 잡혀 있던 이스라엘 자손을 끌어내신 하나님은 광야에서 여정을 잠시 멈추게 하시고, 지도자 모세를 산으로 불러 백성에게 전달할 사항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십계명과 도덕법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다른 나라 백성이 사는대로 살 수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 백성은 아무나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 할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그럴수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 백성은 일주일 내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그럴수 없었습니다. 일주일 중 하루는 안식일로서 그날을 존중하고 지켜야 했습니다. 다른 나라 백성이 다 하는 일을 하나님의 백성은 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전적인 문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사는 것은 좋지만 율법은 반대한다. 이처럼 편협하고 엄격하게 사는 것은 삶이 아니다. 다른 나라 백성을 좀 봐라 우리도 저들처럼 살고 싶다’라고 말한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의도적 반역 행위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했던 짓을 그대로 반복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마귀가 찾아와 말했습니다. ‘이게 공평하다고 생각해? 저 나무 열매는 먹지 못하잖아. 하나님은 너희를 통제하고 있는거야 억압하는 거라고. 너희는 자유롭지 못해. 평생 이렇게 살거야? 왜 해방과 자유를 찾지 않는거지? 마귀의 말을 듣고 믿고 그들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이 곤경에 빠진 전적인 원인입니다. ‘왜 하나님께 돌아가자’라고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복 -젖과 꿀-은 여전히 좋지만 율법과 명령은 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살려면 그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도덕적입니다. 윤리적이고 공정하며 진실합니다. 무차별적으로 복주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모든 약속에는 항상 조건이 따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조건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은 바로 이 법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땅에 살면서도 그 땅을 더럽히며 그 땅에서 쫓겨날 짓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17-20절이 강조하는 그 다음 원리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자기 행동의 위중함을 알지 못합니다. 죄의 참된 본질을 알지 못하며, 특히 하나님이 보시는 죄의 실상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죄의 실상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일까요?
첫째로 에스겔은 하나님의 작품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땅은 하나님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거기에 두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그 땅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피와 우상과 가증한 것들과 온갖 끔찍한 죄로 더럽혔습니다. 죄는 땅을 더럽히고 오염시킵니다.
이것이 죄의 핵심 본질임을 알고 있습니까? 아담은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더럽혔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1:27) 그런데 아담은 그 형상을 망쳐 버렸습니다. 아름다운 그림이나 태피스트리를 더럽히고, 찢고 훼손하며 흙칠한 것과 같습니다. 죄는 사람을 그렇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서 인류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모습,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실제로 만드신 모습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인간을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을 닮게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나님은 자신의 존재와 본질의 일부를 인간 안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손으로 빚으신 인간은 완벽한 표본이었습니다. 흠이 없었고 병든데나 아픈데도 없었으며 손상된 데도 없었습니다. 정신과 혼도 주셨습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수 있는 놀라운 능력도 주셨습니다. 사색할 능력도 주셨습니다. 정신과 이성의 능력을 주어 하나님의 논리를 따라올 수 있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을 받아들일수 있는 능력, 하나님을 알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고 교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이 위대한 형상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고, 핵심적인 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간은 죄를 짓지 않았고 그 속에 악이 없었고 악에 끌리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의로웠습니다. 도덕적으로나 모든 부분이 흠없이 완벽했고 하나님 앞에 똑바로 서 있었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인간 안에 있는 이 하나님의 형상, 작품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원형의 인간의 모습과 오늘날의 인간의 모습을 비교해 보십시오. 죄는 이토록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행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은 죄에서 가장 덜 중요한 부분입니다. 죄의 무서운 점은 저와 여러분의 본성을 타락 이전에 아담이 가졌던 본성과 딴판으로 만들어 버린데 있습니다. 나를 과연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의 작품을 더럽히는 데서 더 나아가 하나님 자신을 모욕합니다.’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 위에 쏟아'(겔36:18) 죄는 참으로 충격적이고 악하며 더럽고 끔찍한 것입니다!
죄가 어떻게 하나님을 모욕할까요? 죄는 자기 우상을 세워놓고 그 우상을 예배합니다. 참되고 살아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께 등을 돌립니다. ‘우리를 위해 신을 만들자’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께 이보다 더 큰 모욕이 있겠습니까?
이 모습은 현대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와 방식만 좀 다를 뿐입니다. 여전히 신을 만들어 섬깁니다. 우리의 신은 우리가 삶의 목표로 삼는 대상이자 돈과 시간을 바치는 대상입니다. 우리가 예민하게 느끼는 대상이며 그것을 위해 얼마든지 싸울 태세를 갖추는 대상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있는 것들 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예배하고, 자기 자신을 예배하고, 자기 머리와 돈과 지워와 신분과 부와 집과 차와 아내와 자식들을 예배합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보다 앞 세웁니다.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그의 법을 무시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합니다. 자기 신에게 재물을 바치며, 전능하신 주 하나님은 뒷전으로 밀어냅니다.
이와 연결되어 죄가 하는 또 한 가지 일은 하나님과 원수들에게 항상 기뻐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겔36:20)
이방 나라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의 하나님이 유일힐 하나님이요 심히 놀랍고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떠들더니, 별로 그렇지도 않네. 그런 명성에 걸맞는 신이라면 자기 백성이 저런 꼴을 당하게 두겠어? 저들을 좀 봐. 고국 땅을 떠나 저 먼 데까지 잡혀가잖아. 저런 신이 저들의 하나님이라고? 저런자들이 하나님의 작품이라고?’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죄와 실패가 원수들에게 하나님을 비웃을 기회를 제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중의 메시지입니다. 우선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원수들이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했고 예수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다더니, 저 꼴을 좀 봐’ 라고 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죄는 마귀를 기쁘게 합니다. 오늘날 인류를 보면서 지옥이 기뻐하고 있으며, 사방에 있는 하나님의 원수들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죄와 수치에 빠져 불행하고 비참하게 서로 다투며 하나님의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자들을 보면서 ‘저런게 전능자가 만든 피조물이라고? 저들의 꼴을 좀 봐’하며 비웃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가 위중한 또 한가지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죄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거슬리는 것입니다.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왜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고 우리가 왜 계속 죄를 범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모르는 탓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복음이 너무 편협하다고 생각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 안에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 앞에 심히 가증한 것이며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죄가 얼마나 위중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무서운 것인지를 알 것입니다! 새하얀 종이는 점 하나만 찍혀도 더러워집니다.
세상이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은 죄가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이처럼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형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까지도 형벌을 받아 왔고 앞으로도 받을 것입니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이해가 되든 되지 않든, 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이런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은 그들을 고국 땅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려가 새출발하게 해주셨습니다. 탕자도 자기 죄의 위중함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 환영받고 용서받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기독교 복음이 전하는 복된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거역했음을 깨닫고 완전히 낮아져서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며 그 앞에 엎드려 자비와 긍휼을 외쳐 구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이 받아주신다는 선언, 그가 죄의 모든 오염과 죄책을 처리하며 형벌을 끝낼 방법을 마련해 놓으셨다는 영광스러운 선언을 들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분노를 그들 위에 쏟겠다’고 하셨고, 아들에게 그 분노를 쏟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쏟으실 분노를 아들에게 쏟으셨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를 값없이 용서하시고 우리 죄를 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돌이키시고 새로 출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하고 복된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의 위중함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의 사랑에 대해 말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타락의 타격을 받고 상처를 입으셨습니까? 아니 더 정확히 자신이 그런 상태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와서 쉬라고 하십니다. 즉시 평안하게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의 손이 자신을 치료하심을 느끼는 순간, 상처는 아물고 힘과 활력과 능력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도록 여러분을 초청하실 것이며, 거듭된 승리와 말할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이처럼 타락에 상처 입은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아들을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오. 아픔과 고통 속에서 그분께 부르짖으십시오. 그가 평안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정리: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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