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6.30. 주일 설교. 마가복음 28: 세례자 요한의 죽음(막6:14~29). 양은익 목사.

 


마가복음 28: 세례자 요한의 죽음(막6:14~29)

1.
그림 몇 장 보고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목 잘린 장면을 보여주는 그림들입니다. 춤을 추었던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모습도 보이고, 요한을 죽이라고 사주했던 악녀 헤로디아도 보입니다. 많은 화가들에 의해서 이 장면이 그려졌는데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기에 그려졌을 것입니다. 잔인한 장면인데 이 죽음의 대상자가 나쁜 놈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이 누구입니까? 위상이 높은 사람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고(눅7:28), 주님께 세례를 준 사람이고, 광야 한 복판에서 낙타 털 옷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수 많은 사람들을 깨우고 도전하던 예언자입니다. 급으로 치자면 예수님과 동급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던 사람인데 30세 초반의 한참 나이에 목 잘려 그것도 접시 위에 올려져서 사람들의 눈요기 감이 되는 치욕스런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죽어야 할 자들은 죽지 않고, 죽지 않아야 할 자가 죽는 불의한 죽음이고, 어이없는 죽음이며, 비극적인 죽음입니다. 요한 같은 이가 이렇게 죽으면 어떻합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결론과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하면 복도 받아야 하고, 으시댈만한 무언가를 누려야 한다는 ‘확신’ 같은게 있는데 요한을 보면 이런 우리의 기대와 확신이 완전히 깨지게 됩니다. 이러면 누가 선뜻 예수를 믿고, 신앙의 길을 간다고 하겠습니까? 신앙을 통해 무엇인가를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의 죽음을 잘 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요한의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수치스럽고, 허무한 죽음이라는 결론에서 벗어나면 좋겠습니다.

2. 자처한 죽음
요한의 요한은 죽은 겁니까? 죽임 당한 겁니까? 얼핏 보면 힘 한번 못쓰고, 권력자의 손에 무력하게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요한은 죽임 당한게 아니라 스스로 자처해서, 자발적으로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이 죽은 이유가 18절에 나옵니다. 권력자를 향하여 겁도 없이 ‘옳지 않다’. 이 말 하다가 죽게 됩니다.

뭐가 옳지 않다는 겁니까? 동생의 아내와 사는 거, 동생의 아내와 불륜 관계를 맺는 게 잘못됐다는 것입니다.(레20:21) 헤롯(안티파스)의 형제는 이복 동생 헤롯 빌립이고, 그의 아내는 헤로디아입니다. 더구나 헤로디아는 헤롯의 이복형인 아리스토불의 딸입니다. 이복형의 딸이니까 헤롯에게는 조카가 되는 것이고, 이복 동생의 아내니까 제수씨가 20년 넘게 산 조강지처가 있었습니다. 이웃 나라인 아라비아 왕의 딸이었는데 헤로디아가 헤롯의 청혼을 받을 때 내건 조건이 ‘저 여자 죽이면 결혼해 주겠다’는 거 였습니다. 고생하고 있는 나라에서 자신들의 치정 문제로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요한은 ‘옳지 않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두운 시대에는 부끄러움이 없어지는 인간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뭘해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런 거리낌 없음으로 어두운 시대를 더 어둡게 만들어 버립니다. 해야 되는 것과 해서는 안되는 게 분명히 있는데 이 구별을 못합니다. 누가봐도 요한이 맞은 거고, 헤롯과 헤로디아가 틀린 겁니다. 근데도 보십시오. 그 많은 율법 학자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신하들 전부 칼을 가진 헤롯과 헤로디아 앞에서 숨 죽인채 숨어 있습니다. 요한만 숨지 않습니다. 죽을 수 있고, 몰락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면서도 자처하여, 자발적으로 나섰던 것입니다.

요한은 왜 이런 위험한 일을 자처했을까요? 어디서 이런 마음, 이런 용기가 생겼을까요? 세례 요한의 자발성과 용기는 그의 일관된 삶에서 나온 삶의 결과입니다. 요한의 선포를 기억하십니까? 회개하라 했고, 회개했으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는데 요한은 그런 자신의 선포에 스스로가 반응하고, 응답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삶에 충실했고, 그 충실함이 자처함으로, 자발성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신앙의 백미, 신앙의 꽃은 자발성에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여기서 기쁨이 있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자처함과 자발성이 있을 때 ‘하나님을 필요로 하던 신앙’에서 비로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언제나 하나님만 필요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필요했으면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도 되봐야 됩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있습니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이런 자원함와 자처함에서 신앙의 사건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원함이 있는 신앙에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자원함이 넘치는 신앙, 자원함이 넘치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한번 해 보세요. 뭐든 자원함이 있게 되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겁니다. 회복이 일어나고, 밝아지게 됩니다. 요한의 죽음은 값싼 죽음이 아닙니다. 그건 요한에 대한 모독입니다. 요한은 어둔 시대 한 복판에서 하나님께 충실했던 사람에게서 나온 자처한 죽음, 자발적인 죽음을 죽었던 겁니다.

3. 존엄한 죽음
그래서 요한의 죽음은 존엄한 죽음입니다. 요한은 술 판에서 벌어진 춤의 댓가로 피 뚝뚝 흘리면서 접시 위에 그의 머리가 담겨져 왔지만 보이십니까? 요한에게는 그 어떤 이 에게서도 볼 수 없는 ‘존엄함’이 있습니다. 존엄’(Dignity.위엄.품위) 이라는 말, 가슴 설레게 하는 말입니다. 가지고 있어야 되는 귀한 단어입니다.

존엄은 어떻게 생깁니까? 존음은 누가 주는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 됩니다. 수 많은 유혹과 흔들림에 무너지지 않고 자신을 지켜낼 때 존엄해 집니다. 존엄은 물질적이지 않습니다. 뭐가 있다고 해서 존엄해 지는 게 아닙니다. 존엄은 믿음에서 생기고 내면에서 생깁니다.

20절에 보면 헤롯이 요한을 보는 마음이 나옵니다. 힘 있는 자지만 요한의 일관된 모습, 자신을 향해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말, 옳지 않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을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했다고 합니다.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요한의 확신과 믿음과 삶에 쫄고 있는 겁니다. 함부로 하기 힘든 사람이라고 하는 존엄함을 요한에게서 본것입니다. 20절은 우리가 잃어 버리면 안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이 살아 있으면 교회는 살지만, 죽으면 교회는 죽습니다. 우리에게도 절실한 모습입니다. 스스로 잃어 버린 존엄, 되찾아야 합니다.

어떻게 찾으시겠니까? 보이는 세계에만 머물지 마시고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십시오. 혈루병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가 찾았던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크심과 은혜로우심을 만나셔야 됩니다. 우리는 세상이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자랑 가지고 사십시오. 그러면 존엄해 집니다.

롤랑 바르트(1915~1980. 프랑스 철학자, 문학 비평가)가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네가 아니다. 나는 네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모습입니다. 사람들의 예상을 깨는 모습이 우리에게 많아져야 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사랑, 놀라운 용서, 놀라운 희생이 있게되면 치유가 일어나고, 존엄과 존경이 넘치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이 목 잘리면서 보여준 자원하는 삶, 존귀한 삶의 가치가 여러분들의 것이 되는 자랑과 기쁨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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