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6.23. 주일 설교. 마가복음 강해 27: 파송된 사람들(막6:7~13). 양은익 목사

 

마가복음 27: 파송된 사람들(막6:7~13)

보신 것 처럼 오늘 본문에는 제자들이 파송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둘씩 짝지어서 6팀이 전도하러 나가게 됩니다. 제자로 부름받고 나서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입니다. 지금까지는 따라만 다녔는데 이제 처음으로 주님 없이 주님께서 하셨던 일을 ‘하는 자’들로 세상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실전에 투입되는 만큼 긴장이 되고, 걱정도 됐을 겁니다. 따라 다니기만 하면 부담이 없었을텐데 주님은 그렇게 두지 않고 ‘너희들도 해 봐야지’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꼭 있어야 하는 모습이기에 내 보내셨던 것입니다.

‘나가라. 세상 앞에 서라’ 흔히 하는 말로 전도고, 파송인데, 지금은 문제가 많은 단어가 되 버렸지만 없으면 안되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책을 읽었는데 너무 좋은 거에요. 한번 읽어보라고 말해주지 않겠어요.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이게 그냥 김치찌개가 아니네요. 기가막혀요. 어떻게해야 합니까? 좋은 걸 알려준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게 아닙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삶에 대해 알게된 진실, 깨닫게 된 진리가 있다면 은폐가 아니라 전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좋은 것을 전하는 것은 귀한 일이고, 먼저 알게된 자의 책임같은 겁니다. 주님도 이 사실을 알리기위해서 이 땅에 파송 받으신 것이고, 제자들도 파송한 것이고, 우리도 파송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제대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전하지 못하게 되면 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일이 되 버립니다. 전도 잘못한 댓가를 우리가 얼마나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까? 전도 때문에 전도 문이 막히고, 전도 때문에 교회 가지 않겠다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분명히 잘못된 겁니다.

물론 우리만의 잘못이라는고는 할 수 없겠지만 무시할 수 없는 우리의 잘못도 분명히 있습니다. 전해야 하고, 파송받아야 한다면 어떻게 전해야 하고, 어떤 파송자의 모습으로 서야 하는지가 전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문제 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찾아 보고 싶은 게 바로 이 모습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몇가지 요구를 하십니다. 세 가지로 정리해 봤는데 전도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대안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보면 좋겠습니다. 하나하나 좀 보겠습니다.

1. 소진된 사회 한 복판으로 들어가라(7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첫번째 요구는 소진된 사회 한 복판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주님은 열 두 제자를 불러 둘씩 둘씩 보내게 되는데, 가게 되는데가 어디입니까? 특별한 곳이 아닙니다. 당신이 가셨던 곳입니다. 주님이 가셨던 곳은 7절 앞에 나옵니다. 모든 촌. 모든 마을,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촌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현미경으로 한번 자세히 보십시오. 어떤 모습이 나옵니까? 거의 모든 사람이 지쳐있고, 힘이 빠져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소진된 사람들, 소진된 마을, 소진된 사회 한 복판으로 보내신 겁니다.

소진(燒盡)은 쓸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고갈된 상태. Burn-out 된 상태가 소진인데, 이 사람들은 지금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모든 것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하얗게 타 버렸습니다. 소진되면 어떻게 됩니까? 사는게 힘들고, 재미가 없습니다. 무기력해지고, 불만만 많아집니다. 보는 것 만나는 것 전부 밉고 싫습니다. 위선 같아 보이고, 의심만 많아집니다. 우울합니다. 소진의 아픈 증상들입니다. 소진되면 참 힘듭니다.

소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학생들은 공부하다가 소진되고, 살아 보려고 애쓰다가 소진되고, 직장인들은 뒤쳐지는게 싫어서 무리하다가 소진됩니다. 어떤 곳보다도 소진된 사람이 많은 사회가 한국사회라고 하는데 수 많은 일들이 우리를 소진시키고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이런 곳으로 파송하신 겁니다. 너희가 가서 소진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라. 세상은 로마가 지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 살아가는 방법과 길을 바꿔 보라. 새로운 길이 있다. 이것을 알려 주라는 것입니다. 소진된 사회, 소진된 사람에게 가는 것이 파송이고, 전도입니다. 한 인생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의미있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해 볼만한 일입니다.

2. 동행하라(10절).
주님은 이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셨기에 10절에서 길 떠나는 제자들에게 두 번째 요청을 하십니다. 10절 입니다.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전하러 가서 이곳저곳 다니면서 東家宿西家食 하지 말고 한 곳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요청을 한 이유가 뭘까요? 그 당시의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할수는 없지만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한 곳에 머물면서 그 사람들과 동행하고, 함께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믿어봐. 좋아! 이러고 한 마디 툭 던지고 가지 말고, 함께 자고 먹으면서 살갑게 만나라는 것입니다.

메시지를 주고 받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인데 수신과 발신에 꼭 있어야 하는게 있습니다. 信(믿음)입니다. 受信, 發信 할 때 신은 믿을 신입니다. 대화의 기본은 신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얘기가 오가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의 말을 누가 듣겠습니까? 말은 믿음이 생겨야 통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몸으로, 몸의 감각으로 들으라는 겁니다. 소진된 그들이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 답답한지 말못할 사연이 있는지 지난 주 말씀 드렸던 파스칼의 말, esprit de finesse, 섬세한 정신으로 수신하고, 들으면서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말이 통해 제대로 발신(선포. 전함) 할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파송의 원리입니다.

미치 앨봄(Mitch Albom. 유명 칼럼니스트과 방송인)의 ‘8년의 동행’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영어 제목은 ‘Have a little Faith. 작은 믿음이라도 가져라’로 되 있습니다. 자신의 얘기를 글로 담은 겁니다. 실화입니다. 앨봄은 어려서부터 회당에서 자란 유대교 집안 출신입니다. 대학때까지 회당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사회에 나오면서 부터는 멀어지게 됩니다. 방송인으로, 칼럼니스트로 잘 나가는 그에게 종교는 그렇게 필요하지 않았던 겁니다. 하나님에게 간절하게 요청할 것도 없었고, 회당에 나가면 매이는 것 같아 불편했던 겁니다.

근데 어느날 어려서 다녔던 회당의 랍비인 렙(앨버트 루이스)에게서 뜻밖의 부탁을 받게 됩니다. 자신의 추도사를 써 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받게 됩니다. 주저하다가 받게 되는데 받으면서 앨봄은 렙에게 제안을 합니다. 추도사를 쓰려면 당신을 알아야 하는데 만나지 않고는 알 수 없으니 만나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렇게 앨봄과 렙은 8년간을 동행하게 된 겁니다.

앨봄은 렙의 삶을 보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과 신앙과 삶에 대한 생각들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랍비 렙을 통해 믿음을 가진 삶의 아름다움에 눈뜨면서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렙의 장례식 날, 그와 함께했던 8년간의 순간들을 떠올리면서 그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추도사를 낭독하게 됩니다. 동행이 만들어준 변화고 아름다움입니다. 여건이 되시는 분들은 꼭 읽어 보십시오. 신앙은 강요로 생기지 않고 동행할 때 생깁니다. 동행할 때 신앙의 메시지가 발신 될 수 있고, 들려질 수 있습니다.

3. 야성을 가지라(8절~9절).
주님의 세 번째 요구는 8절 9절에 나옵니다. 떠나는 그들에게 주님은 단호한 요청을 하십니다. 8절입니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주님이 허락한 것은 의식주 중에서 신발 한 켤레, 옷 한 벌, 지팡이 하나가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 믿고 가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얘기듣고 정신이 바짝 났을 겁니다. 만만한 일이 아니구나. 주님은 생명이 사라진 소진된 사회, 힘 빠져 있는 이들을 살리려면 이 정도의 펄떡 거림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보신 겁니다. 타성에 사로 잡혀 있으면 늘어져 있는 것 밖에 없습니다. 생명과 살아남는 타성이 아니라 야성에서 나옵니다.

야성(野性)이 뭡니까? 굴하지 않고 헤쳐 나가는 강한 정신입니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해 내고야 말겠다는 근성과 치열함이 야성인데,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정신이고, 우리가 가져야 할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불 하나씩을 가슴에 심어 주셨는데 식게 그냥 두지말고, 이 땅에 사는 날 까지 불타오르게 만드십시다. 그러면 우리 삶도 불타 오르게 될 겁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이 12.13절에 나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파송에 그대로 따릅니다. 소진된 사회 한 복판에 들어가서 소진들 그들을 회복시킵니다. 회개와 치유가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들어 줍니다. 이런 귀한 일이 쓰임받는 인생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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