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26: 막힌 사람들(막6:1~6)
1.
마가복음 26번째 시간입니다. 이제 6장을 보게 되는데, 6장 앞 부분에는 주님께서 ’차마 꿈에도 잊지 못할 곳’(정지용, 향수)인 고향, 나사렛에 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집 떠난 후 처음 가게 되는 고향길 입니다. 집 떠났을 때는 제자들이 없었는데 이제는 제자들과 함께 어머니가 있고, 가족과 동무들이 있는 그리운 곳에 가게 됩니다.
요즘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미국에 있는 교포들이 태평양을 보면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고향이 그리워서 그런 겁니다. 교포들이 굳게 믿고 있는게 있습니다. ‘태평양은 교포들이 흘린 눈물로 만들어졌다’. 교포들 정도는 아니겠지만 주님도 추억이 깃든 고향,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곳을 가면서 발걸음을 재촉했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고향 방문은 아쉽게 끝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는 앞에서 봤던 회당장 야이로와 혈루병 여인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장면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얼마나 간절하게 주님을 찾았습니까? 옷만 만져도 나을 것 같다는 간절함으로 주님을 찾았는데, 고향 사람들은 부러 찾아온 예수님을 3절 끝에 보십시오.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뿌리치고, 배척합니다. 다른데도 아니고 자신의 고향에서 이런 반응, 이런 대접을 받게됩니다. 6절에 보면 이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주님께서 ‘이상히 여기셨다’, 놀라셨다고 하는데 주님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주님의 ‘차마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 방문은, ‘차마 꿈에 나올가 무서운’ 고향 방문으로 끝나게 됩니다. 동네 사람들과 안 좋게 헤어집니다. 누가 더 손해를 본 겁니까? 주님이 손해 본 것은 없습니다. 이런 절호의 찬스가 어디있습니까? 찾아가도 만나기 힘든 분이 제 발로 찾아 온 건데 걷어 찬 겁니다. 주님이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이 사람들은, 그토록 모든 사람들이 만나기를 소원하던 분이 오셨는데도 자존심이 뭔지, 안다는 것이 뭔지 그런 것 때문에 주님에게서 받을 수 있는 치유와 능력을 받지 못하고 쫓아 버립니다.
2.
요즘 한국 사회를 자기 주장만 가득한 ‘막힌 사회’(Blocked Society)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 역시 막힌 사회의 막힌 사람(Blocked Person)들이 되버렸습니다. 막혔다는 것은 막아 논건데,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으로 예수님을 막고 있습니다. 막은 이유는 과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과거에 경험한 예수, 과거에 알고 있었던 예수에게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로 인해 현재와 미래를 막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집 떠난 이후 소문만 무성하던 예수가 와서 가르치고 행하는 것을 보면서 놀랍니다. 근데도 인정을 못합니다. 놀랐기에 더 인정을 못했을 겁니다. 3절에 보세요. 막힌 사람들이 한결 같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잘하고, 성공하면 쿨 하게 인정해 주면 되는데 걸고 넘어집니다. 뭐로 걸고 넘어집니까? 학력으로, 직업으로, 집안으로, 인맥으로 걸고 넘어집니다. 어머니가 누구니? 아버지가 누구였지? 직업은, 공부는..
3절 읽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하나같이 시비를 거는 발언들이고, 폄하하는 말입니다. ‘당신, 그래봤자 목수질 하던 예수잖아! 어머니가 마리아고’ 동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마리아가 누구입니까? 결혼도 하기 전에 얘 배서 나은 여자아닙니까? 예수는 그런 여자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집안 봐라. 콩가루 집안이다. 형제들은 여기서 사는데 집 나가서 혼자 살고 있지 않느냐?’
못난 모습입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면 되는데 그걸 못하고 있습니다. 막힌 사람들입니다. 현재도 보고, 미래도 봐야하는데 과거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생각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쏠릴 편, 치우칠 편을 써서 편견(偏見)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Prejudice입니다. pre(before)+ judice(judgement)의 합성어입니다. 이리저리 살펴보고 판단하는 게 아니고, 미리, 과거의 생각으로 단정(심판)해 버리는 것입니다. 편견이 위험한 이유입니다. 편견은 사람을 과거로 묶고, 과거로 막아 버립니다. 좋은 걸로 묶으면 좋겠는데, 편견이 묶는 것은 대부분 안 좋은 것들로 묶고, 그 편견으로 사람을 받아 주지 않고 밀어냅니다. 차별하고, 담을 쌓습니다.
편견을 깨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물론, 편견은 없을 수 없습니다. 편견없는 사람도 없고, 편견없는 사회도 없습니다. 편견은 사람이 가진 본성, 죄성 같은 것입니다. 아차하는 순간에 편견은 기승을 부립니다. 미리 다 판단해서 밀어내 버립니다. 잘해도 밀어내고, 고쳐도 밀어내고, 과거만 있습니다. 못난 것 아닌가요? 깨야 막히지 않고 열리게 됩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 이거였습니다. 어떤 사람들 만났나 보십시오. 세리, 문둥병자, 귀신들린자, 소경, 창녀, 사마리아 여자. 편견의 희생자들인데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편견을 깨 버리십니다. 교회와 신자들이 해야 될 일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막혀 있던 담-이방인과 유대인/남자와 여자/주인과 종 같은 담들을- 헐어서 화해시켰던 것처럼 교회는 편견으로 가득찬 세상 한 복판에서 편견을 깨는 일에 헌신해야 됩니다.
3.
통계 하나 보고 가겠습니다. 2017년 한국 보건 사회 연구원에서 조사한 내용을 중앙일보(2017.3.6)에서 보도한 통계입니다. 만 명을 조사한 통계니까 작은 규모의 조사는 아닙니다. 만명을 대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습관을 물어 봤습니다. 정신적인 습관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습관화된 정신입니다. 습관은 계속 하다가 저절로 나오게 되는 행동입니다.
만 명을 대상으로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습관에 뭐가 있느냐? 물어봤더니 편견이 1위로 나왔습니다. 90.9%가 편견이 습관화 되있다고 답했습니다. 자기만의 안경을 쓰고 보고,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심각할 정도로 높게 나오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많은 정신적인 습관이 후회 82.4%, 걱정 70.8%. 자기비하 60.1%. 절망 48.2%. 도피 47.6%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통계를 보면 왜 우리가 그토록 공격적이고, 극단적인 자기 편에 몰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편견이라는 정신적인 행위가 습관화 되 있었던 겁니다. 편견은 담을 쌓는 거기 때문에, 편견이 많을수록 막힐 수 밖에 없고,서로를 밀어낼 수 밖에 없습니다. 편견이 어떤 모습을 강요하고 있는가? 한번 보십시오. 서로를 얼마나 삐딱하게 보게 합니까? 악수한번 반갑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몇 자 안되는 페이스북, 댓글 가지고 편 나눠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웁니다. 불행한 거 아닙니까? 버려야 되는데 언제쯤 버리지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4.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주는 도전은 만만치 않습니다. 어떤 도전입니까? 대충 보지 말고 정견(正見), 자세히, 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 생각만큼 너그럽지 않습니다. 차갑고 편향적이고, 고정적일 때가 많습니다. 바로 보려는 애씀이 없으면 편견이라는 정신의 습관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 들게 됩니다.
편견을 피하고, 막힘을 피하려면 파스칼이 말한 것 처럼 esprit de finesse, ‘섬세한 정신’을 가지고, 휘둘리지 말고, 치밀하고 정교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편견의 담으로 질식되 가고 있는 이 시대에 교회와 신앙인들이 해야 할 숙제며 과제입니다. 잘 해내면 좋겠습니다.
이 숙제 잘하려면 우리가 먼저 막히지 않아야 됩니다. 예수님 고향 사람들 처럼 과거라는 편견, 불신의 편견에 매이게 되면 하나님도, 믿음도, 믿음의 세계가 주는 풍성함과 부유함도 다 놓치게 됩니다. 신앙의 세계를 더 섬세한 정신으로 살펴서, 가지고 있는 수 많은 편견들을 깨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막히지 않아야 막힌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 줄 수가 있습니다. 마음 닫힌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신앙인 그러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극도의 편견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풀어줘야 됩니다. 어떻게 풀어주면 되겠습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다. 우선은 우리가 진실해야 됩니다. 엡5장 말씀 기억해 보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 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 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8~9)
사람들이 열 받는 게 뭡니까? 혼자 깨끗한 척, 선한 척하는데 까고 보니까 빛의 자녀가 아니라 어둠의 자녀입니다. 삐딱하게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착하고, 의롭고, 진실해 주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때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런 진실함을 가지고, 친구가 되고, 삶을 함께 하는 동반자가 되어 줄 때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인가요? 전설적인 팝송 가수, Simon & Garfunkel 이 분명하게 말해 줬지요. Bridge over Troubled Water.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주는 사람이 친구입니다. 이 노래는 친구에 관한 노래입니다. 가사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I’m on your side, oh when times get rough. 내가 너의 편에 설게, 언제? 시절이 거칠어 질 때, 고난이 왔을 때 네 편이 될 께. 이게 친구라는 것입니다. 멋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세상의 편견은 목사의 설교로, 신학자의 정연한 논리로 깨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한 분 한분의 이런 모습으로 편견은 깨지는 것입니다. 연속극에서 나온 유명한 대사있지요!. 아프냐? 그 다음 뭡니까? 아프냐? 많이 아프냐? 이게 아니지요.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게 신앙이고, 이게 기독교입니다. 이 말을 할 수 없다면 아직은 아닙니다. 막혀있는 것들을 넉넉히 풀어내는 은혜가 오늘 아침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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