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4: 손-내밈과 손-잡음(막5:21~43)
1.
오늘은 손-내밈과 손-잡음이라는 제목으로 마가복음 24번째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 필요한 모습인데 함께 보면서 새롭게 마음을 다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거라서 지역에 가셨던 주님께서 다시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오신 후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두 가지 사건이 기록돼 있습니다. ①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난 딸과 관련된 이야기 ②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 이야기입니다. 이 두 사건이 교차하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상황이 다 안 좋습니다. 죽어가는 딸 살려 보려는 아버지의 다급함과 간절함이 오늘 분문에는 있고요, 치료받지 못하는 병을 고쳐 보려고 하는 여인의 무모한 모습도 보입니다.
우리도 많이 보고, 겪는 모습입니다. 응급실 바닥에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할 때도 있고, 이 여자처럼 이 병원, 저 병원 다닐 때도 많습니다. 회당장과 여인이 간절하고, 다급했다면 우리도 간절하고, 다급합니다. 힘든 순간들이고, 이겨내야 하는 순간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순간에 무너지지 않고 이길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찾아내야 할 과제입니다. 얼핏 보면 기적 한 방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 같지만, 잘 보시게 되면 기적보다 앞에서, 기적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걸 오늘 보고 싶습니다.
2.
오늘 본문에 보면 유난히 많이 나오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손’입니다. 6번 나옵니다.(23. 27.28. 30. 31. 41) 손을 얹어 달라 하기도 하고, 손을 대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합니다. 손을 잡는 것은 접촉입니다. 분리돼 있던 나와 네가 접촉을 통해 연결되는 것입니다. 옆의 분들 손 한번 잡아보세요. 기분이 어떠세요? 불편하십니까? 좋으십니까?
[손의 문제]라는 시가 있는데 읽어 보겠습니다. ‘손은 두 사람을 묶을 수도 있지만, 서로를 밀어낼 수도 있다. 손가락은 두 사람을 연결하기도 하지만 접으면 주먹으로 변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색하게 두 손을 내린 채로 서서 서로를 붙잡지 못하고 있다. 지혜와 어리석음이 모두 손에 달려있다’(수프라노비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손을 얼마나 잡는가? 물리적인 손만 보지 말고, 마음의 손까지 같이 보세요. 손잡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 이 시인은 손을 맞잡고 사는 게 지혜고, 잡지 않는 걸 어리석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손잡는 게 지혜인 이유는 서로를 묶어주고, 연결해 주기 때문에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4장의 말씀 기억해 보세요. 전도서 기자가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 보다 낫다. 나은 이유가 뭡니까? 넘어지면 일으켜 주고, 함께 누우니 따뜻하고, 세 겹줄처럼 쉽게 끊어지지 않으니까 낫다는 것입니다. 삶은 동행(同行) 하는 것이 단행(單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야이로의 딸과 혈루 병 여인의 치유도 보십시오. 어떻게 해서 고치게 됩니까? 가만히 앉아 있는데 고쳐진 게 아닙니다. 손을 내밀었고, 내민 손 뿌리치지 않고 잡아준 손 덕분에 고치게 된 겁니다. 손 내민 사람의 간절한 찾아감과, 내민 손잡아 준 이의 온화한 맞이함에서 평안과 생명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찾아감과 맞이함. 손 내밂과 손 잡음. 이 단순한 도식에서 엄청난 사건이 만들어집니다. 세상은 이런 모습을 인맥이라 하고, 처세라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신앙입니다.
1. 손-내민 사람들: 찾아감
오늘 본문에서 손 내민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와 무명의 혈루병 여인입니다. 근데 두 사람 다 손 내밀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손 내밀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야이로는 회당장입니다. 제사장 빼고 넘버 2입니다. 상당한 지위의 사람입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남 찾아가서 아쉬운 소리 하기 힘듭니다. 혈루병 여인은 하혈하는 여자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사람입니다. 부정한 사람은 나서서 손 내밀면 안 됩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 다 손 내밀기 힘든 사람들임에 찾아가서 손 내밉니다. 급하고 간절해서 그랬겠지만 기본적으로 ‘용기’가 없으면 아무리 급해도 이렇게 하기는 힘듭니다. 손 내미는 것, 누구를 찾아간다는 것. 그때나 지금이나 쉬운일 아닙니다. 손을 내민다는 게 뭡니까? 부족한 자신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겁니다.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회당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예수님 발 아래 엎드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이기에 용기내서 한 것입니다. 회당장 아니라 제사장이라도 손 내밀 때는 내밀어야 합니다. 그래야 치유할 수 있고, 극복 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손 내밀어서 잡아줘야 합니다. 그래야 캄캄한 터널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습니다.
글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네이엄 브레이버먼(Nachum Braverman) 이라는 랍비가 쓴 글입니다. 이 사람도 야이로 처럼 어린 딸이 암으로 아프게 되는데, 그 때 쓴 글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야엘의 병을 처음 알게 된 그 악몽 같은 시련의 나날 동안 나의 모든 인간관계가 시험에 들었다. 나는 친구들을 예전보다 더 단순한 가치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총명함이나 탁월함보다 온정이 더 중요하고 희귀한 듯했다. 내가 그토록 절박했던 시기에 정작 시간을 내어, 내 삶을 살펴봐준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처음에는 찾아오지 않는 이들을 가혹하게 평가했지만 문득 나라고 다르게 행동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재능만 믿고 다른 이들을 실망시킨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깨달았다. 사실 재능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온정이었다.
손 내미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에 놀라고 있습니다. 딸의 아픔을 통해서 능력과 실력보다 중요한 게 손 내밀어 함께 하는 동행의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우리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 보십시오. 성경의 사건은 손 내미시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든 살든 알아서 하라고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계속해서 자신의 손을 잡으라고 손 내미세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손 내미시고,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손 내미셔서 깨지고 터진 상처투성이의 세상 한복판에서 담대하게 살 수 있도록 동행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손 내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약할 때도 손 내밀고, 강할 때도 손 내밀고. 사람에게도 손 내밀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손 내밀고. 그래야 손-잡아 주는 이가 생기게 되는 겁니다.
2. 손-잡은 예수님: 맞이함.
누군가 손을 내밀 때, 해서는 안 되는 일 있습니다. 뿌리침입니다. 손 내밀 때 뿌리치면 안 됩니다. 내민 손은 어찌 됐든 잡아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죽은 야이로의 딸과 혈루병 여인은 부정한 자들이기 때문에 손 내밀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설사 손 내밀었다고 해도 잡으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근데도 주님은 거부하지 않고 손-잡아 주십니다. 지독히도 손을 타는 우리와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어떤 사람 손을 잡을지 고르고 골라서 잡으면 괜찮을 손만 잡고, 잡으면 불리한 손은 거부하는 게 우리 모습이고, 세상인심입니다. 불행으로 가는 길인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면서도 아직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40절에 보면 ‘비웃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야이로의 딸이 분명히 죽었는데 잔다고 하니까 비웃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주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이들을 밖으로 내 보냅니다. 있어봤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내 보낸 겁니다. 비웃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비웃음에는 죽음의 기운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계속 비웃어 보십시오. 그 사람 죽이는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다르고 세상의 통념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죽음을 만드는 것도 모르고 비웃기 바쁩니다. 생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죽은 소녀를 일으켜 세우려는 생명의 현장에 죽음의 기운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생명의 소원으로 가득한 사람들, 어떤 사람들입니까? 부모와 제자들, 이 사람들만 데리고 들어가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보고 싶습니다. 대단히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손 내밀고, 손잡아 주는 것, 정말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잡으면, 오늘 말씀 보십시오. 잡으면 치유와 생명과 사랑과 회복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굳어진 마음 풀고 손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굳어져 있습니까? 얼마나 손잡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까? 이제 좀 벗어나 손잡고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야 일어설 수 있습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우리도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손 내밀고, 손잡기 위한 조건이 하나 나옵니다. 믿음입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아닌 동행의 삶이 가능해집니다.
오늘 네 단어 봤습니다. 손 내밀고, 손잡고. 찾아가고, 맞이하고. 믿는 이들이 보여줘야 하는 자랑스러운 모습입니다. 이 모습으로 손잡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 땅을 치유하고, 고치는 일이 많아지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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