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4.21. 주일 설교: 환한 주의 얼굴 보게 하소서(시31:15~16). 양은익 목사. 부활주일

 

 

말씀: 환한 주의 얼굴 보게 하소서(시31:15~16)

15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6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31:15~16)

1.
‘환한 주의 얼굴 보게 하소서’ 제목으로 말씀드릴 텐데 제목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의 환한 얼굴이 보이는 감동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16절에 이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치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좀 더 실감 나게 번역하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환히 웃는 주의 얼굴빛을 종에게 비추소서. 다함없는 사랑으로 이 몸을 구원하소서’

16절만 보면 잘 느껴지지 않지만, 시인은 정말 갈급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5절 보십시오. 어떤 기도가 나오고 있습니까?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 하나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하면서 이 기도하셨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 집사도 돌에 맞아 순교할 때 이 기도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서’(행7:59)

시인은 지금 영혼을 부탁할 정도로 심각한 고통을 겪는 중에 ‘주의 환한 얼굴빛을 비춰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9절, 근심으로 인해서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할 정도로 힘들고, 10절, 기력이 약해져서 뼈가 쇠할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주의 환한 얼굴 비춰주시면 일어설 수 있으니 환한 주의 얼굴 보게 해 달라고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하게 웃는 주의 얼굴을 비쳐 달라는 것은 결국, 힘을 달라는 것이고, 자신을 해하는 핍박자들의 손에서 구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캄캄한 어둠 중에 있을 때 하나님,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면 얼마나 힘이 되고, 든든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에 보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시편 80:7.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당신의 밝은 얼굴 보여 주시면 우리가 살아나리이다’. 아멘. 시 4:6~7에도 나옵니다. ‘주님, 주님의 환한 얼굴을 우리에게 비춰 주십시오.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 주신 기쁨은 햇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큽니다’ 사람도 환하게 웃어주면 기분이 좋고, 힘이 나는데 하나님의 환한 얼굴을 보면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2.
물론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의 임재와 신성한 하나님의 빛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시편 기자처럼 주께 피하고(1절), 주께 기도하고(2절), 주를 의지할 때(6절) 환하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뜬구름 잡는 소리 같겠지만 이게 믿음의 비밀입니다.

너무 힘든 어느 날 탄식하며 기도하는데 평안해지기 시작합니다. 412장 찬송처럼, 내 영혼의 그윽이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리면서 힘든 내 영혼을 고이 싸 버립니다. 평화가 하늘 위에서 내려옵니다. 감사가 넘치고, 자신의 허물과 연약함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환한 얼굴이 비치는 아름다운 순간들입니다. 그 순간 내 얼굴도 환해집니다. 주의 환한 얼굴빛을 많이 받은 이들의 얼굴은 아름답습니다. 자매들이 그토록 소원하는 원판 불변의 법칙이 깨지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스데반 집사 보십시오. 얼굴이 뭐 같다고 나옵니까? 유대인들이 스데반 잡아서 심문하는 험악한 분위기인데 천사의 얼굴 같다(행 6:15)고 나옵니다. 어둡고, 겁먹어야 하는데 하나도 겁먹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했기에 그 빛을 받아 그의 얼굴, 그의 영혼이 밝아져 ‘천사’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부활하신 주님을 마음에 품었기에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죽음을 죽인 게 부활인데, 두려울게 뭐가 있겠습니까? 천사의 얼굴이 나오는 겁니다. 부활 후에 제자들 변한 거 보십시오. 배신의 아이콘들이었는데 부활하신 주님 만난 후에는 ‘죽으면 죽으리라’ 그러면서 부활하신 주님 전하다가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3.
오늘 부활 주일인데 부활은 주님께서 다시 얼굴을 비친 사건이 부활입니다. 주님 부활하신 후에 한 일이 뭔가 보십시오. 얼굴 보여 주는 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시고, 실의에 빠져있던 제자들에게 얼굴 보여주시면서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얼굴을 보면서 부활을 체험합니다. 이때부터 환한 주님의 얼굴빛이 퍼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에게 전해지고, 제자들은 다시 이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비치다가 이 부활의 빛과 파장이 지금 우리들에게 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환한 얼굴을 우리도 잘 봐야 합니다. 죽음을 극복한 그 생명의 얼굴을 볼 때 걱정도 많고, 힘든 일 많은 삶이지만 그 한가운데서도 환한 얼굴을 가진 자로 세상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며, 소명입니다. 여러분들의 환한 얼굴을 보고 많은 이들이 위로와 용기와 힘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4.
함석헌 선생은 ‘얼굴’이라는 장문의 시에서 부활의 생명을 가진 이들의 얼굴을 찾습니다.

이 세상 뭘 하러 왔던고? 참 얼굴 하나 보러 왔지. 그런가? 그 얼굴을 보지 못해 우리 삶이 이렇게 무거운것인가? 남자 얼굴, 여자 얼굴, 젊은 얼굴 늙은 얼굴. 간사한 얼굴, 얄미운 얼굴, 실망한 얼굴, 병에 눌린 얼굴.. 얼굴 얼굴 그 많은 얼굴들 속에 참 아름다운 얼굴은 하나도 없구나.

참 고운 얼굴이 없어? 하나도 없단 말이냐?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얼굴, 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

이런 얼굴 어디서 찾아야 됩니까? 여러분들이 아름다운 얼굴이 되십시오. 하나님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게 되면 화난 얼굴, 실망한 얼굴, 얄미운 얼굴에서 벗어나 환하고 밝은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살면 천사의 얼굴이 되는 거고, 욕망에 감동돼서 자기만 알고 살게 되면 악마의 얼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자주 얼굴을 살펴보십시다. 내 얼굴이 어떤지, 내 옆의 있는 이의 얼굴이 어떤지. 어떻습니까? 천사인가요? 악마인가요? 아니다 싶으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5.
나이 들고, 살다 보면 ‘삶이 피로하다’(삶의 피로) 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데, 이때가 중요합니다. 피로를 느낄 때 잘못하게 되면 삶의 왜곡이 일어납니다. 다 마음에 안 들어요.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만날 때마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분노와 아픔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얼굴도, 마음도 시든 꽃처럼 돼버립니다. 더 시들기 전에 살려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으로 돌아서야 됩니다.

어디서 이런 마음이 오겠습니까?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내 안에, 내 삶에 나만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얼굴을 악마처럼 만들어 버리는 계산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계산만 하고 살면 영혼은 죽습니다. 영혼뿐입니까? 얼굴도 죽고, 사랑도 죽고, 믿음도 죽고, 많은 게 죽어 버립니다. 죽는지도 모르고 계산이라는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산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절대 생명’ 밖에 없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던 것도, 계산과 죽음이 꺾지 못한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죽기 전에 한 선포가 사도행전 7장 마지막에 나옵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이 외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를 반기며 서있다. 그게 보인다’. (행 7:55,56)

스데반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으로 느꼈고, 영의 눈으로 보았던 겁니다. 이런 뜨거운 생명이 부활의 아침,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얼굴을 비추고 계십니다. 이 생명의 빛을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받아 내십시다. 부활은 죽음을 죽이는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힘이고, 사랑입니다. 이 힘은 어떤 고난보다, 어떤 아픔보다 더 큰 힘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우리도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힘든 가운데서 주의 환한 얼굴을 구하던 시인은 오늘 본문 24절에서 강하게 선포합니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부활의 아침입니다. 부활하신 주의 환한 얼굴 바라보시면서 강하고 담대한 부활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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