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절제 (갈5:22~23. 고전 9:24~27)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4~27)
1.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품은 ‘절제’ 입니다. 성령께서 맺게 하시는 9가지 열매 중에서 마지막 열매, 마지막 성품입니다. 영어로는 Self-control을 많이 씁니다. 자신을 통제하고, 제어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지만 ’Stop’하고, 하지 않는 의지력, 절제입니다. 절제가 쉬운 사람 있겠습니까? 할 수 있고, 하고 싶은데 하지 않겠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 아닙니다. ‘조금만 참을 것. 하지 말 것’. 많이 하는 후회이지만 참는 게 쉬우면 이런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잘 참지 못하는 시대가 돼서 오히려 다시 절제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성취 방정식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성취를 예측하기 위해서 만든 공식입니다. 성취=지능 x 자기 통제(절제, Self-control) x 긍정 정서. 일을 얼마나 잘할 것인가를 예측하고 싶으면 세 가지를 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는 겁니다. 예전에는 이런 예측을 관상으로, IQ로, EQ로 예측했지만, 지능 좋고, 사람 좋아도 절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성취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절제를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절제는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가치가 아닙니다. 절제는 최첨단 성품입니다. 잠25:28절.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절제는 방어벽입니다. 없으면 무너지게 됩니다. 마음을 제어하는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2.
변호사 한 분이 변호사 사무실을 연 젊은 후배 변호사에게 축의금을 전달하면서 축의금 봉투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개업을 축하합니다. 번성하세요. 적당히’(2011.3. 동아일보 기사) 쓰기 힘든 축하 글이지만 나이 차이도 있고, 잘 아는 후배이기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열심히 하되 너무 욕심부리지 말라. 자신을 잘 다스리고 절제하면서 진실하게 하라’는 뜻으로 해 준말입니다. 지금, 교회와 신앙인들 안에 무섭게 퍼져 있는 병이 있습니다. 과잉과 과장, 절제 없음. 어떤 곳보다도 진실해야 할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깊게 들어와 있습니다. 은밀하게 해야 할 일들조차도 간증과 은혜라는 포장지에 싸여서 절제 없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타락은 늘, 과잉과 함께 시작되는데 그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잉’을 ‘부흥’이라고 발음합니다. 교회 역사에서 ‘부흥’만큼 조심스러운 단어가 없는데, 부흥을 생각 없이, 두려움 없이 좋아합니다. 부흥은 아차 하는 순간, 과잉을 낳고, 허세를 낳고, 자만을 낳습니다. 개인, 교회, 정권, 국가 다 비슷합니다. 잘되면 ‘적당히’ ‘절제하면서’ 담백해져야 하는데 지나치게 되고, 절제하지 않게 되다 ‘파괴’되는 겁니다. 과잉과 무절제가 만들어 내는 것은 언제나 자기 파괴입니다.
3.
과잉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오바한다 싶을 정도로 열정을 가지고 과잉해야 하는 순간이 왜 없겠습니까? 한창 공부해야 하는 시기에 과잉(무리)이 없으면 어떡합니까? 일 벌여놓고 놀 거 다 놀면 언제 자리 잡습니까? 강하게 달라붙을 시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절제가 필요할 때는 과잉하면 안됩니다. 그때는 성에 안 차고, 아쉽더라도 ’Stop’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절제하게 되면 그 절제가 또 다른 삶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기회를 줍니다.
절제하는 내가 좋습니다. 절제의 최고 수혜자는 절제하는 ‘자신’ 입니다. 절제는 최고 수혜자도 자신이고, 최대 피해 자도 자신입니다. 절제할 때 절제하면, 절제는 힘든 절제 잘했다고 최고의 선물을 줍니다. ‘잘 참았어. 화목 줄게’ ‘잘 참았어. 기쁨 줄게’ 미셸 푸코라고 하는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가 있습니다. 정신의학에도 일가견을 가졌던 사람인데, 절제에 대해 한 마디를 남긴 게 있습니다. 절제는 ‘자기에 대한 배려다’.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보살피지 못해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는 많은 사람을 보면서 푸코는 절제의 중요성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절제가 절실한 세 영역이 있습니다. ① 몸 ② 생각 ③ 감정입니다. 셋 다 절제가 없으면 안 되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어디서 무너지고, 어디서 낭패를 당하는가 보십시오. 대부분 이 세 가지에서 일어납니다. 몸 절제하지 못하다가 얼마나 많이 무너집니까? 생각과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Self-control 못하다가 엄청난 일들을 겪게 됩니다.
절제하지 않고 기분대로 하면 그 순간은 굉장히 신나고 좋습니다. 분도 풀리고, 쾌락도 누리고. 하지만 잠깐입니다. 어느새 부메랑이 돼서 돌아와 비수를 꽂아 버립니다. 화는 화로, 사랑 없음은 사랑 없음으로, 불신은 불신으로. 자업자득인데 어리석은 우리는 그걸 보지 못합니다. 절제를 보는 여러분들은 그러지 마십시오.
절제는 힘이 없어서 할 수 없이 하는 비굴한 참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절제가 상당히 속상할 겁니다. 절제는 억압이 아닙니다. 절제는 삶을 아는 사람들, 절제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보여 주는 속 깊은 모습, 태도가 절제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강한 것처럼, 절제하는 사람도 강하고, 성숙한 겁니다. 절제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습니다. 화를 다스리고, 혀를 다스리고, 생각을 다스릴 때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집니다.
4.
오늘 읽은 본문에도 절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바울이 하는 얘기입니다. 자신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절제했다는 겁니다. 27절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복종했다는 말은 절제했다는 말입니다. 절제한 이유는 지금까지 잘해 놓고 막판에 무너져서 버림을 당하게 되면, 버림을 당한다는 것은 자격을 잃어버리는 건데 자신은 그런 꼴은 겪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제했고, 앞으로도 절제해서 쓰임 받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겠다는 것입니다.
하여 나온 말이 25절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 이기기를 다툰다는 말은 젖먹던 힘까지 쏟아붓겠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전력투구하여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제가 필요할 때마다 생각나면 좋겠습니다.
절제는 식은 죽 먹기는 아닙니다. ① 타자의 따가운 시선과 ② 세상의 통념과 맞서야 하는 고단한 싸움이 절제에는 있습니다. 절제하게 되면 ‘소심하네, 멋없네, 쩨쩨하네’라는 소리 분명히 듣게 될 겁니다. 그래도 절제해야 할 것은 절제해야 합니다. 과잉의 시대지만, 성령께서 절제의 마음을 우리 모두에게 강하게 심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아침, 절제의 아름다운 결론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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